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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화양연화

1000만 송이 연꽃이 피었다. 여름이 피었다. 1400년 전 백제 왕이 궁 남쪽에 조성했다는 충남 부여 궁남지는 지금 꽃이 궁궐을 이룬다.

UpdatedOn June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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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꽃이 피었다. 물 아래에서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가느다란 꽃대를 세우고 끝에 하양, 노랑, 분홍, 보라 꽃을 피워 냈다. 그 조화가 궁금해 쪼그려 앉아 응시하자 그제야 물에 잠긴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 뿌리도 내렸을 것이다. 단 며칠을 위해 훨씬 긴 시간을 물속에서 치열했을 존재. 꽃이 결말이라면 이 정도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는 듯 이들은 의연하다. 다시 일어나 시선을 360도로 돌려 본다. 꽃이 여행자를 꽃잎처럼 감싸고 돈다. 여름날 부여 궁남지는 사방이 고고한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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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는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이 634년에 조성했다고 기록된 못이다. 세월이 지나 원래 못은 사라졌으나, 저습지였던 곳을 궁남지 자리로 추정해 1960년대에 복원했다. 버드나무와 연꽃 등이 물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궁남지는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이 634년에 조성했다고 기록된 못이다. 세월이 지나 원래 못은 사라졌으나, 저습지였던 곳을 궁남지 자리로 추정해 1960년대에 복원했다. 버드나무와 연꽃 등이 물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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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존재하는 최초의 인공 정원

궁남지는 왕의 못이다. 기록이 명확하다. <삼국사기>는 백제 무왕이 634년 궁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에 걸쳐 물을 끌어들이고 주변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가운데에는 방장선산을 본뜬 섬을 쌓았다고 말한다. 방장선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산이다. 정확한 규모는 몰라도 겨우 몇십 평짜리 못을 만들자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오는 대공사를 했을 리 없다. <삼국사기> 집필 시기가 1145년경이니, 500년이 지나서도 역사가가 유의미하다 판단해 기록할 만큼 중요하고 이름난 못이었다는 뜻이다. 신라의 월지보다 40년 먼저 조성한 궁남지는 현재 한국에 남은 모든 인공 정원 가운데 최초라 전한다.

부여, 곧 사비는 백제의 세 번째 수도다. 당시 왕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게다가 수도를 옮기는 복잡한 일을 두 번 단행한 나라의 왕이다. 누군가는 그릇이 안 되어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는 데 그쳤겠지만 제대로 된 왕은 강한 나라, 백성의 풍요로운 삶을 목표로 했겠다. 외교와 내치에 힘써 백제의 마지막 불꽃을 일으킨 제30대 무왕이 그랬다. 좋은 평가를 받은 왕이기에 역사가가 지면을 풍부하게 할애했을 것이다. 마를 캐서 생계를 꾸리던 고단한 어린 시절을 보낸 서동이 왕에 등극했다는 신분 상승 스토리, 타국 왕족인 선화공주와 결혼한 로맨스를 담은 향가 ‘서동요’ 덕분에 그는 다른 왕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신라 공주와 결혼하고도 백제 왕으로서 신라와 영토 전쟁을 여러 번 벌이는 등 바쁘고 거친 나날을 지나 재위 35년, 인생 말년에 이르러 그는 궁 남쪽에 못을 조성한다. 한숨 돌리려 했는지, 세를 과시하려 했는지 이유는 불분명하다. 여기부터 상상의 영역이다. 굳이 그의 사랑을 역사가 기록했으니 사랑을 재료 삼는 상상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해로해 준 아내에게 보이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최선을 다해 못을 꾸며 놓고 때때로 아내와 산책하고 가끔은 배를 띄워 탔겠지. 잔잔한 못가에 버드나무 잎이 흔들리고 낮에는 해와 구름이, 밤에는 달이 비치는 풍경을 앞에 두고 아내에게 “사실은 당신께 이런 세상을 살게 해 주고 싶었어요”라고 읊조리는 남편을 떠올린다. 사랑은 1400년 전에도 지금도 사랑이므로.

1000만 송이가 만든 꽃길

궁남지는 사랑, 낭만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사계절 어느 때나 마찬가지지만 연꽃이 만발하는 여름은 더욱 그렇다. 중앙의 3만 3000제곱미터(약 1만 평) 궁남지 둘레로 33만 제곱미터(약 10만 평) 땅 곳곳에 연지를 조성해, 마치 궁남지를 연꽃잎이 겹겹이 감싼 형상이다. 세월 속에 원래 못이 사라지고 1960년대 복원한 궁남지는 역사서를 참고해 버드나무를 심고 가운데 섬을 만들어 다리를 놓았다. 작은 섬에는 방장선산 대신 포룡정을 지었다. 초록의 나무와 물이 빚어내는 장관에 눈이 즐겁고, 깨끗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히는 정자다. 반짝이는 윤슬이 바람과 놀면서 모습을 수시로 바꾼다. 사랑하는 이가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 생각나, 윤슬을 따라 웃었다.

이제 연지 탐험을 나선다. 50여 종, 1000만 송이 연꽃이 꽃길로 이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주라는 말처럼 연꽃 또한 다 다르고 신비롭다. 이르게 피는 수련은 ‘잠자는 연’답게 밤에는 꽃잎을 웅크린다. 가시연은 넓적한 잎이 뾰족한 가시로 가득한데, 이를 뚫고 꽃이 솟아난다. 둥그런 쟁반을 닮은 빅토리아수련에는 아이가 위에 앉을 수도 있다. 빅토리아수련이 세상을 보는 시간은 여름의 단 3일. 밤에 흰색으로 피었다가 낮에 오므린 꽃은 차츰 짙은 분홍색으로 변해 3일만 얼굴을 내밀고는 물 아래로 몸을 감춘다. 1000년을 산다고 세상의 신비를 다 알까. 홍련, 백련, 왜개연꽃, 대하연, 물양귀비, 부처꽃…. 이름을 새기고 꽃과 눈 마주치며 나아가는 걸음이 행복하게 느려진다.

크고 작은 연지 사이로 구불구불 두렁길이 나 있어 꽃에 가까이 다가가 감상한다. 어느 연은 아직 잎이 무성한 채 꽃의 시간을 준비 중이다. 오늘 내가 모든 꽃을 볼 수도 없거니와 볼 필요도 욕심도 없다. 내일은 내일의 꽃을 내일의 누군가가 감탄하고 사랑해 줄 것이다. 군데군데 들어선 오두막 정자에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자전거 타고 온 이는 기대어 세운 다음 걸터앉아 책을 꺼내 읽는다. 바로 앞에서 뒤뚱뒤뚱 걸어가는 오리가 놀랄까 산책을 멈추고 곁의 연꽃에 눈길을 건넨다. 문득 끼쳐 온 향기. 눈을 감는다. 한번 깨달으니 연꽃 향이 내내 코끝에 머무른다. 궁궐이 별건가. 이곳이 궁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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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낭만 한가운데로

연꽃은 진흙에서 자라지만 진흙을 탓하거나 진흙에 물들지 않고 도리어 더러움을 정화한다 했다. 건조한 인생에 촉촉이 찾아와 순수함을 돌이키게 하는 사랑처럼. 궁 남쪽의 못이라. 궁은 사라지고 사람은 떠났지만 사랑 이야기는 남았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궁 남쪽에 여전히 살아 있는 낭만의 한가운데로. 꽃과 향기에 둘러싸인 여름날, 궁남지의 화양연화다.

부여서동연꽃축제

부여서동연꽃축제

1000만 송이 연꽃이 피는 궁남지의 여름, 부여서동연꽃축제가 찾아온다. 올해는 20주년을 맞아 더욱 풍성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수상 특설 무대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궁남지 판타지>, 드론 300대가 밤하늘을 수놓는 <로투스 별밤 드론 아트쇼> 같은 공연은 물론 연지 카누 탐험 등 흥미진진한 체험이 기다린다. 기간은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문의 www.lotusfestiv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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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현정
photographer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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