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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On February 14, 2020

한 기자가 폴 매카트니에게 물었다. “비틀스는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가요?” 그는 이렇게 답했다. “All you need is love.” 사랑이 세상사에서 가장 중요해지는 2월, 풋사랑의 기억을 꺼낸 4명의 여성이 보낸 편지들.

아직 봉인되지 않은 마음들에게

아직 봉인되지 않은 마음들에게

_강선임 방송 작가
우리 집에는 갈색 가죽으로 덮인 007 가방이 하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 갔을 때 썼던 가방이다.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장롱 위에 방치되어 있던 그 가방은 어느 날 내게 발견되었다. 한창 비밀스러운 것에 끌리던 사춘기 때였다. 나는 3개의 다이얼을 하나하나 돌려가며 비밀번호를 찾아냈다. 하지만 가방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도 잠시, 비어 있는 007 가방의 쓸모는 나를 기쁘게 했다. 바로 ‘나의 비밀을 봉인해두는 것’. 친구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쪽지와 편지, 그리고 일기장 같은 것들이 그 가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방의 존재를 잊었다.

다시 그 007 가방을 떠올리게 된 건 찾을 물건이 생겼을 때였다. 가방은 부모님 집 책장 위 짐 더미 속에 있었다. 생각했던 비밀번호가 몽땅 아니어서 또다시 세 개의 숫자 다이얼을 하나하나 돌려야 했다. 마침내 가방이 열리고, 제일 먼저 쪽지가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그땐 참 비밀스럽게 느껴졌는데 지금 펼쳐보니 시시콜콜한 내용들뿐이었다. 가방 안 포켓에 들어 있던 일기장도 그런 마음으로 펼쳤다. 그런데 몇 장을 넘기다 이런 내 용을 발견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면, 그건 내가 한을 품었기 때문일 거야.”

놀랍게도 그건 내 첫사랑의 한 조각이었다. 그 어릴 때 뭐 대단한 사랑을 했다고, 이런 오그라드는 저주의 일기를 썼을까. 게다가 그 일기장을 007 가방에 보관해둔 덕분에 박제까지 되어버렸다. 그런 흑역사를 애지중지 보관해둔 나를 원망하며 일기를 쓴 시점을 떠올려보니, 하필 딱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성당 오빠 하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때. 갑자기 생긴 감정은 속도도 빨랐다. 짝사랑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오빠네 집 근처에 있는 음반 가게에서 뭘 사다달라는 핑계를 만들어 연락을 했다. 내 불순한 의도는 바로 들켰던 것 같다.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던 오빠가 대뜸 자기 삐삐 비밀번호를 알려줬으니 말이다. 아니, 그 은밀한 것을 나와 공유하다니!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솔직히 그게 사귀는 건 줄 알았다. 따로 데이트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오히려 그 비밀스러움에 더 설레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어쩌다 그 마음이 저주로 바뀌었을까. 연락을 주고받은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평소처럼 음성 사서함을 하는데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끝.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끝났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건 짐작할 수 있다. 처음 겪는 설렘이 더 짜릿했던 만큼, 처음 겪는 이별도 더 서늘했을 거라는 것. 그 심정을 다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기장에 한이 서린 글귀를 꾹꾹 눌러썼던 게 아니었을까.

20여 년 전의 일들이 봉인된 일기장을 꺼내 읽으며, 나는 새삼 내가 이렇게나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분명 내가 쓴 것인데도 어쩐지 남의 일기처럼 낯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건 지나간 사랑들을 떠올려봐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늘 삐딱해서 모두 어려워하는 동아리 선배를 좋아했다. 그 모난 성격을 둥글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게 이유였는데, 친구들은 지금도 그걸 가지고 놀린다. 이제는 나도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는다. 반면 내 이상형에 가까웠던 사람을 매몰차게 밀어냈던 적도 있다. 특별히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때의 내 마음은 그때의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007 가방에 담겨 있던 일기장처럼, 내 마음도 007 가방에 봉인된 채 영원히 기억 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건 아닐까.

최근에 넷플릭스로 <빨간 머리 앤> 시즌 3를 보다가 나는 다시 한번 그런 007 가방의 존재를 떠올렸다. ‘빨간 머리 앤’은 내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앤’은 내 기억과 달랐다. 신나게 웃던 앤이 갑자기 화나서 소리를 지르며 들판을 달릴 때마다 몰입했던 마음이 툭 튕겨 나왔다. 그러다 앤의 나이를 떠올렸다. 내가 일기장에 저주를 적었던 바로 그 나이. 앤도 앤과 닮았던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길버트’에게도 마찬가지. 게다가 시즌 3에서 길버트는 ‘앤’과 ‘위니 프레드’라는 여자 친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앤과 그렇게 많은 눈빛을 주고받았으면서 혼란스러워하다니. “그냥 다 그만두고 공부나 하러 떠나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길버트는 뒤늦게나마 앤을 향한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즉시 ‘위니 프레드’를 찾아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프러포즈를 기대하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위니는 길버트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그러자 그는 용서를 구한다. “혼란스럽게 한 건 너무 미안하지만, 그래서 내 마음을 알아차리자마자 달려온 거”라고. 다른 사람은 둘째 치고, 내가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그 귀한 순간과 순간이 만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또 얼마나 더 소중한지! 아직 가방에 봉인되지 않은 그 싱싱한 마음들을 떠올려보는 2월이다.

역시는 역시지!

역시는 역시지!

_ 옥상달빛 박세진
새삼 고백하자면 나는 할리우드 키즈다.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꼭 챙겨 보는, 이 장르의 소위 ‘찐팬’이다. 주말 저녁이 되면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를 챙겨 보는 것이 유년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사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세상의 모든 무덤에 사연이 있듯, 내게도 <주말의 명화>를 놓칠 수 없는 운명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7년. 세기말의 정서가 슬금슬금 피어오르던 시기였다. 요즘은 IPTV가 있어서 영화가 극장과 안방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세상이지만, 당시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플랫폼이자 공유 경제의 시초인 비디오 가게가 내 아지트였다. 쉼 없이 드나들던 그곳을 통해 수많은 영화를 접했던 초등학교 생활 6년.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많은 영화를 봤지만 그 어떤 영화도 이 한 편을 이길 수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 유명한 올리비아 핫세 버전 말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버전. 아, 당연한 이야기인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분한 로미오를 본 이후, 이제 막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된 나와 친구들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된 것처럼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들었다. 우리 모두는 완전히 취해버렸고, 유치하지만 그의 이름을 줄여서 ‘레오’라고 부르며 마치 내가 줄리엣이라도 된 것처럼 어이없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주는 거 없이 마음에 안 드는 줄리엣 역의 클레어 데인즈를 미워해보기도 하면서 처음으로 질투라는 것을 배웠다. 사랑과 질투를 여러 번 오가는 동안 내 감정은 담금질하듯 더욱 단단하고 강렬해졌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 화보를 사느라 좋아하는 떡볶이의 유혹도 이겨냈으며, 그의 사진으로 방을 가득 채워 나가기에 바빴다. 덕분에 사춘기에 한 번은 거쳐야 한다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나 역시 겪으며 자랐다. 그는 정말 내 중학교 1학년 시절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사랑은 생각보다 수명이 짧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곧 다른 아이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방 안의 브로마이드가 교체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수족관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맞추던 장면은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온연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첫 두근거림, 다시없을 순애보 캐릭터인 나만의 로미오.

마냥 아름답기만 했던 나의 첫사랑은 다행히 계속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며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명배우 반열에 올랐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의 영향력을 환경을 보호하는 데 쓰고 있다. 지금은 그 역시 나이가 들었고, 나 역시 그를 보고 설레지 않지만 첫사랑의 바람직한 행보에 괜스레 나까지 뿌듯해져서 ‘역시 내 눈은 정확했어’라며 혼자 박수 치기도 한다. 그를 추억하며 이렇게 앉아 있다 깨달은 사실 하나. 어느새 20년이 흘렀다는 점이다. 정말 다행인 건 외모는 변했을지언정 그는 여전히 자타 공인 멋진 남자라는 사실이다. 역시, 역시는 역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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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K에게

사랑했던 K에게

_이승주 작가
안녕? 건강히 지내고 있지? 꼭 한 번 안부를 묻고 싶었는데, 이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야 편지를 보내네. 이젠 너무 오래전 기억이지만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 설레고 마음이 따뜻해져. 이 고마운 감정을 안겨준 네게 오늘은 그때로 돌아가 못다 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서툰 편지지만, 한 글자 한 글자 꼭 읽어주길 바라.

너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수학 학원의 긴 줄 속에서였어. 입시에 찌든 아이들이 서로 교실에 들어가겠다고 거친 몸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마치 그 세상과 분리된 듯 유유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지. 만화책 『허니와 클로버』엔 이런 명대사가 나오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본 적 있니?” 어, 나는 알 것 같아. 그건 18세 여고생 마음이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던 거야. 그 장면은 마치 BGM 없는 슬로 모션처럼 고요히 흘렀고, 머릿속에 댕 하는 종소리를 남겼어. 그리고 감색 카디건을 입은 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며 싱긋 웃었을 때, 난 생각했던 거야. “이 아이야. 이 아이가 내겐 특별한 사람이야.” 공부만 하던 ‘쫄보 범생이’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나는 네가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지 어떤 사람인지 친구들에게 물었고, S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수재란 걸 들었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만능 수재. 이건 정말 드라마 공식 같지 않아? 평범한 여고생이 수재 남학생에게 푹 빠지게 된다? 근데 나는 그 공식에 훌쩍 뛰어들어, 쪽지를 보낸다든가 갑자기 네 뺨을 때리는 생쇼는 못하겠더라. 오히려 너와 대등해지고 싶었어. 그래 이건 좀 더 클래식 쪽에 가깝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처럼 “기다려. 좀 더 성장해서 오겠어”의 눈물 훔치는 쪽.

그리고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하더라. 나는 공부에 매진했고, 1년 만에 전교 1등으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지. 그리고 수능 이후 소식을 들었어. 너도 나처럼 신촌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는 걸. 사실 그 이후의 대처를 생각하면 늘 안타까워. 나에겐 어쩔 수 없는 ‘개츠비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야. 신촌에서도 각각 다른 대학에 다닌다는 사실이, 스무 살의 내겐 ‘너와 동등해지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을 안겨주더라. 그래서 네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연락해 알아낸 (거의 CSI급이지?)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기까지 꼬박 2년의 시간이 더 흘렀어. 사실 아예 전화를 하지 말까도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정말 안 되겠더라. 솔직히 그날은 내가 마음이 너무 안 좋은 날이었어. 자취 생활의 외로움, 공부의 외로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개팅 등. 속된 말로 살짝 ‘맛이 가 있는’ 날이었지. 그래서 못 먹는 맥주 한 캔 마시고 전화를 했던 거였어. “저기요…, 저는 고등학교 때 당신을 좋아했던 사람인데요…”의 말도 안 되는 서두로 시작된 전화. 난 가끔 생각해. 그때 내가 더 솔직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살짝 놀란 듯한 너의 목소리와 버벅대는 나의 비논리적인 앞뒤 설명은, 거의 나 혼자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맡듯 다다다 이야기하는 품새였지. 그리고 막판에 기억나는 두 개의 문장. “네, 그랬어요. 근데 다 옛날 일이죠. 하하하.” 맘에도 없는 말을 남발하는 내게 너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 “아, 그러시군요. 마음 감사합니다. 저 곧 군대 가요. 가서 한 번 연락드릴게요.”

어떤 스토리의 맥락이 끊기게 되는 건, 솔직하지 못함 혹은 너무 먼 미래에 대한 상상력 때문인 거 같아. 난 인생을 살면서 이 생각을 참 많이 했고, 참 많이 느꼈어. ‘내가 이래도 될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떻게 평가받을까’ 등의 너무 많은 생각이 내 말과 행동을 와전되게 만든다는 걸 말이야. 그건 화살을 과녁으로 슝 쏘아 올리기도 전에, 그 화살이 내 발 밑으로 툭 떨어지는 참담함 같은 거였어. 그래, 그런 거였어. 나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전에 스스로 접었고, 그걸 넌 내가 부끄럽지 않게 받아줬던 거야. 그리고 나중에 네가 군대에서 진짜 내게 연락을 해왔을 때도 난 그 기회를 스스로 또 내몰았지. “지금 내가 PD 공부를 하고 있으니 나중에 연락해야지. PD가 된다면 너를 더 떳떳하게 볼 수 있을 거야.”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반복하면서.

모든 사람의 첫사랑이 이랬을까? 현재를 향해 돌진하지 않고, 나중에 혹은 더 성장해서 같은 머뭇거림이 있었을까? 그래서 첫사랑은 정말 첫사랑으로 끝나게 되는 걸까? 한 가지 다행인 건 네가 너무 잘되어서 가끔 온라인 기사로 근황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나도 여전히 자극을 받고 있다는 점. (여전히 학습 메이트인가? ㅎㅎ) 그리고 실제 결혼을 해보니 다사다난하다 못해 Crazy한 일이 너무 많아서, 너와의 추억을 이렇게 추억으로 간직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 등등. 웃기지? 단 몇 개의 점으로 스스로 너무 많은 스토리를 만든다는 일이. 하지만 또 알잖아? 짝사랑은 대개 그러하다는 걸. 앞에서 말했듯, ‘지나친 상상력을 통해 혼자서 직진, 후진, 우회전, 좌회전을 반복’한다는 걸. 아마 네게도 누군가를 짝사랑했던 경험은 분명히 있었을 테니까.

저도 원래 록 스타를 좋아했어요

저도 원래 록 스타를 좋아했어요

_『블루』의 이하윤에게
_윤성은 영화 평론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종례 시간에 얼굴도 눈도 동그랗던 담임선생님이 여자애들에게 “OO야, 너는 어떤 남자가 좋니?” 하고 물으신 적이 있다. 앞서 호명된 서너 명쯤의 아이들은 배시시 웃기만 했는데,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뿔테 안경 쓰고, 키가 크고, 공부 잘하는 애요.” 너무 당차서 그랬는지 이상형이 우스워서 그랬는지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40대가 된 지금도 종종 어떤 타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면 더 이상 패션도 키도 학벌도 보지 않는 나는 난감해진다. 이제껏 만나왔던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도 찾기 어렵고, 앞으로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꿈이나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계획을 안 하면 실패도 하지 않는다는 ‘기택’(영화 <기생충>)의 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형은 책이나 영화에나 있을 뿐 어차피 만날 수 없는 거라고, 만날 수 있다 해도 나와는 이루어질 리 없다고 치부해버리게 된 현실이 조금은 씁쓸하다. 그래서 가끔은 의식적으로 현실에 굴복하기 전 나라는 사람이 순수하게 어떤 남자를 좋아했는지 떠올려볼 때가 있다. 그러면 유머 감각이 뛰어났던 교회 오빠도 생각나고, 금성무를 닮았었던 동아리 친구도 떠오르고, 무지하게 똑똑했던 소개팅남도 궁금하다. 누군가 와인을 마시며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아마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을 골라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라치아>에는 그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 나를 사로잡았던 ‘그 사람’에 대해 묘사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몇 년 동안이나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록 스타였다. 긴 머리카락 휘날리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무대를 뜨겁게 달구던 사람. 마이크를 잡은 손가락이 희고 길었던 사람. 5m 안쪽으로만 다가가도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 듯 차가워 보이는 사람. 그러나 다정한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주변을 봄날의 오후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 나를 그토록 설레게 했던 사람은 역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 만화책 『블루』(이은혜)의 ‘이하윤’이었다. 『블루』는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했던 내게 크나큰 영향을 준 만화다. 7권까지 발행된 후, 오랜 공백기를 거쳐 모 포털 사이트에 다시 연재되면서 4년 전쯤에야 완결이 되었다. 한참 잊고 있다가도 다시 그 만화를 꺼내들면 현재 내 감성과 취향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명확해진다. 이 만화에는 시각디자인을 하는 스무 살 여대생 ‘신현빈’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마음은 두꺼운 얼음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안에는 빗물에도 쓰러져버리는 모래성이 자리 잡고 있다. 10대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신현빈과 나를 동일시하며 만화책을 읽었고, 그녀가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이하윤에게 빠져들었다. 이하윤은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상처를 안고 사는 로커다. 두 남녀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홍승표’가 훨씬 따뜻하고 감성적인 친구였지만, 나는 언제라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하윤과 신현빈이 잘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순정 만화 속의 록 스타라니! 그러니까 현실에 나오기 전의 나는 전형적인 소녀 취향의 이상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현재의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여전히 이하윤처럼 멋있고 재능 있는 남자들에게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제 그들과 로맨스를 꿈꾸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하윤은 만화책 속에 있을 때나 판타지의 대상으로서 의미가 있는 남자니까. 그는 사실상 연인으로서 만나지 말아야 할 치명적인 조건들을 몇 가지 갖고 있다. 첫째는 애정 결핍, 둘째는 우유부단함, 셋째는 절대 미모. 이런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현실의 이하윤을 차지할 수 있을진대, 지금의 나는 아마 그가 내게 고백을 해와도 거절할 것만 같다. 왜냐고? 피곤하니까! 그러나 방 한구석에 모셔둔 빛바랜 만화책을 펼치는 순간, 누런 종이가 무색하게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는 다시 충실한 첫사랑으로 돌아와 나를 몹시 설레게 한다.

하윤 오빠,
한참을 기억 저편에 두었던 오빠를 오늘 다시 만났습니다.
오빠의 빨려들 것만 같았던 눈망울도, 반짝이는 머릿결도 여전하네요.
영원히 변하지 않을 당신이 내 첫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정말 고맙습니다.
오빠처럼 완벽한 누군가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으며
소녀의 열정으로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어주셔서.

한 기자가 폴 매카트니에게 물었다. “비틀스는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가요?” 그는 이렇게 답했다. “All you need is love.” 사랑이 세상사에서 가장 중요해지는 2월, 풋사랑의 기억을 꺼낸 4명의 여성이 보낸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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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020년 2월(총권 123호)

이달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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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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