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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지옥 부에노스아이레스

On August 30, 2016

당신이 이곳에 온다면 탱고, 밀롱가, 축구, 맛있는 쇠고기 말고도 다른 면을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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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광장 곳곳에선 거리 탱고 공연이 펼쳐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광장 곳곳에선 거리 탱고 공연이 펼쳐진다.

WORDS & PHOTO 김나랑

WORDS & PHOTO 김나랑

(전 <그라치아> 피처 디렉터. 사표를 던지고 넉 달째 남미를 여행 중이다)

“당장 이 도시를 떠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인 5월 광장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라보카. 그곳에서 강도를 당한 동행이 씩씩거렸다. 라보카는 탱고의 발상지(19세기 이곳의 이민자들이 선술집과 사창가에서 추던 춤이 탱고다)이며, 아티스트들의 아름다운 벽화가 있는 곳.

단, 소매치기의 위험이 있으니 한적한 곳은 걷지 말라고 가이드북은 경고한다. 라보카에 도착하니 한국어가 들렸다. “코레아? 대마초 있어.” 대낮에 레스토랑 웨이터들이 ‘커피’와 ‘대마초’를 함께 외친다.

알록달록한 벽화는 ‘사진발’엔 최고였지만, 호객 행위에 질려 우리는 한 시간 만에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때 라보카 항구에서 청년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느낌이 안 좋아 나는 빠른 걸음으로 버스를 탔는데, 붙잡힌 동행은 얼마의 돈을 쥐여주고 풀려났다.

강도를 만나도 물리칠 자신 있다던 특전사 출신의 남자였다. “이 자식이 버스가 가까워져 오니까 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잖아. 술이 아니라 약에 취한 거 같더라고.”

그날 밤 그는 “칼에 찔리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느냐”며 걱정했지만, 예약한 탱고 공연이 있기에 밤에 다시 나와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웬만한 공연은
밤 10시부터 시작된다.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인생 공연’이라고 추천한 탱고였다.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인 콜론 극장 옆의 대로변에 자리한 큰 공연장이 기대감을 불러왔다. 디너를 함께하면 1300페소(약 11만원), 공연만 보면 420페소(약 3만5천원)다. 싸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딱 3만원짜리였다. 30여 명의 무희와 라이브 연주자들이 코앞에 있었지만, 에너지를 느낄 수 없었다. 탱고의 테크닉은 화려했으나 그뿐,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열정 없는 무대였다.

현지인들이 탱고를 즐기는 밀롱가에서 ‘진짜 탱고’를 보고 싶었으나, 동행은 ‘더 이상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원하지 않았다. 나도 그쯤 되니 이곳에서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졌다. 심지어 충전 중인 노트북이 전압 불안으로 고장 나니까 얼른 더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자 상가를 이 잡듯 뒤진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세계 3대 극장 중 하나인 콜론 극장.

세계 3대 극장 중 하나인 콜론 극장.

세계 3대 극장 중 하나인 콜론 극장.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 지구.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 지구.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 지구.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 지구.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 지구.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 지구.

한밤의 주먹다짐

호스텔로 돌아오니, 두 명의 투숙객이 치고 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투숙객이라기엔 뭣하다. 그 호스텔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노동자들이 머무는 여인숙 같았으니까. 처음엔 우리와 같은 배낭 여행자인 줄 알았다. 시내에서 ‘캄비오’(환전)를 외치는 그들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얼굴을 아는 내게 환전을 강요할까 봐 길을 돌아가야 했다. 그들의 낙이라고는 힘든 노동을 끝낸 밤에 술 한잔하고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음악이 새벽 4~5시까지 계속되어 우린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지만.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새 식구’가 온 날엔 소음이 절정을 이뤘다. 술 취한 친구들은 새 식구가 공 묘기를 보일 때마다 100페소를 줬고, 우리도 반강제로 돈을 내야 했다. 술 취한 친구가 계속 말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돈을 줘야지.” 거리에서 공연하는 본인이 행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듯했다. 그 모습이 서글펐지만, 불면에 지친 우리는 그들과 데면데면한 상태였다. 늦은 밤 마리화나를 권유받은 뒤론 솔직히 무섭기까지 했다.

그날의 싸움은 다행히 친구들이 뜯어말렸다. “무서운 게 아니라 서글프더라.” 같이 싸움을 말렸던 내 동행이 침울하게 말했다. 열악한 이곳에서 함께 살다 감정의 골이 깊어진 듯했다. 싸움이 끝난 뒤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싸우는 모습을 여행자에게 보여 자존심 상해하는 그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투숙한 첫날, 비닐봉지에 채소를 써는 내게 도마를 갖다 주던 콜롬비아 친구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가 내게 말을 건 지도 꽤 됐다. 내가 은근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음을 알았나 보다.

“넌 아르헨티나가 좋니?” 첫날 그 친구가 도마를 건네며 물은 말이다. “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늘 화난 표정이야.” 그러면서 웃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곳에 온 그는 환전상으로 일했다. 곧 콜롬비아를 여행할 거라는 내게 거의 되지 않는 영어로 “콜롬비아는 정말 좋아”라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렇게 환히 웃는 남자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꽤 차가운 곳일 거다.

특히 이 호스텔의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부엌 집기는 거의 없어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밥을 먹어야 했고, 냉장고는 청소한 지 백년은 돼 보였으며, 가스레인지에는 바퀴벌레가 지나갔다. 여행자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려니 했는데, 수저가 있는 서랍에서 바퀴벌레 여러 마리가 흩어지니까 구역질이 나왔다. 괜히 눈물이 났다. “대체 이 호스텔은 왜 관리를 안 해주는 거야.” 호스텔의 사장은 전화로만 지시하고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따뜻한 햇볕, 궁색하지만 깨끗하게 닦았을 집기가 있는 콜롬비아를 떠나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무는 그가 가여웠다.

베네수엘라에서 온 친구는 열악한 부엌에서 만든 거라기엔 어엿한 수프를 우리에게 갖다 줬다. ‘감동 수프’였다. 닭을 푹 고아 살을 찢고, 파스타 면을 잘게 부숴 끓인 수프는 한국의 닭죽과 비슷했다. 생각해 보면 투숙객들은 다들 요리를 잘했다. 잘게 썬 쇠고기로 볶은 스파게티, 감자를 푹 익혀 닭과 끓여낸 요리, 매일 열심히 타 먹는 코카차. 그런 부엌에서 매일의 삶을 요리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그들을 가여워하면 안 되는 거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엘 아테네오 서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엘 아테네오 서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엘 아테네오 서점.

음반 가게 어딜 가나 탱고 섹션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음반 가게 어딜 가나 탱고 섹션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음반 가게 어딜 가나 탱고 섹션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강렬한 탱고의 추억

한 번은 호스텔에서 탱고를 배웠다. 방의 히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거실 난로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던 때다. 밤 11시, 웬 남자가 들어오더니 ‘프리레슨’이라며 탱고를 추자고 했다. “지금?” “어, 지금.” 그는 몇 장의 CD를 갈더니 “그래, 이게 탱고 음악이지!”라면서 나를 잡아끌었다. 탁자를 치운 거실은 금세 탱고 홀로 변했다.

남자가 리드하는 프로페셔널한 탱고 스텝에 빠져들면서 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탱고에선 남자가 잘 춰야 돼. 넌 따라오면 그만이야.” 그러면서 몇 가지 스텝을 알려줬는데, 신기하게 난 탱고 동작을 자연스레 따라 하고 있었다.

아까 싸움을 말리던 흑인 친구, 콜롬비아에서 온 환전상, 호스텔에서 청소하는 여성까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우린 동그랗게 모여 음악에 몸을 푸는 연습부터 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음악에 몸을 맡겨봐.” 흑인 친구는 꽤 췄는데,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으로 스텝을 외웠다. “우노(하나), 도스(둘), 트레스(셋)….” 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아까 싸우던 친구들에게 뭐라고 했을까.

이 호스텔의 탱고가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느꼈던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하지만 바퀴벌레만은 참을 수 없어 호스텔을 옮겼다. 배낭 여행자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숙소 예약 사이트 ‘부킹닷컴’의 상위권에 드는 호스텔이었다. 로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즐기는 열 가지 방법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보카주니어스 경기장에서 축구 보기, 탱고 레슨, 자전거 시티 투어, 당일치기 우루과이 관광, 주말을 불태우는 클러빙까지.

그중 하나인 아사도 파티에 참여해 저녁을 먹었다. 아사도는 그릴에 2~3시간 고기를 굽는 아르헨티나 식의 바비큐다. 고기 굽는 데 일가견 있는 현지인이 숯불에서 굽는 부위별 아사도는 정말이지 끝내줬다. 다른 한편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렇게 관광객을 위한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다. 

라보카의 특징인 알록달록한 건물 아래서. 가난한 이민자들이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집에 칠하면서 시작됐다.

라보카의 특징인 알록달록한 건물 아래서. 가난한 이민자들이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집에 칠하면서 시작됐다.

라보카의 특징인 알록달록한 건물 아래서. 가난한 이민자들이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집에 칠하면서 시작됐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에서 만난 체 게바라.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에서 만난 체 게바라.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에서 만난 체 게바라.

이 도시를 안아주고 싶다

하루는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에 갔다. 아르헨티나의 재벌 에두아르도 코스탄티니가 설립한 아주 현대적인 미술관. 때마침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의 패션은 <사토리얼리스트>에 나와도 될 만큼 세련됐다(동행은 사람들의 프러포션이 좋기 때문이라지만, 꾸민 듯 안 꾸민 듯 다들 센스 있게 잘 입었다). 그들은 프리다 칼로, 페르난도 보테로와 현대 영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이곳뿐 아니라 국립미술관, 모던아트뮤지엄 등 미술관이 많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게 보낼 수 있다. 전시를 본 후 고급 유모차를 끈 부부 옆에 앉았다. 작품은 지나치게 좋았고, 미술관 1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의 음식 플레이팅은 더없이 세련됐다. 하지만 호스텔의 친구들이 계속 생각났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엘 아테네오 서점, 에비타 페론의 묘지가 있는 레콜레타, 저녁이면 긴 줄을 서는 150년 전통의 카페 토르토니, 잘빠진 상점들이 있는 팔레르모 소호만 가고 끝났다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저 ‘화려한 미녀’ ‘남미의 파리’였을 거다. 내게 이곳은 남미의 가난한 자들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모여드는 도시이자,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엔 자신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 무뚝뚝할 수밖에 없는 미녀였다. 미모는 여전하지만, 슬픔이 서린. 너무 차가운 부에노스아이레스지만, 이 도시를 이해해 보고 싶다.

한 블록에 하나꼴로 있는 서점과 음반 가게는 이 도시의 문화가 얼마나 풍성한지 보여주는 예다. 거리의 사람들은 언뜻 화나 보이지만, 문화에 대한 깊은 자부심에서 비롯된 도도함이라 생각된다. 그들도 서로에게 키스할 때는 환히 웃는다. 탱고를 출 때는 더없이 즐긴다. 다음에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간다면, 미녀의 화려한 전성기를 함께하는 것처럼 신날 것 같다.  

당신이 이곳에 온다면 탱고, 밀롱가, 축구, 맛있는 쇠고기 말고도 다른 면을 보길 바란다.

Credit Info

2016년 08월 01호

2016년 08월 01호(총권 81호)

이달의 목차
WORDS
김나랑
EDITOR
손안나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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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8월 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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