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 네이버 포스트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오늘의 패션

패션계를 떠도는 44 사이즈의 망령

On May 07, 2016

영국의 광고표준위원회가 구찌 광고를 금지했다. 모델이 너무 말랐다는 게 이유. 명품 브랜드의 마른 몸 사랑은 왜 식을 줄 모르는 걸까?

깡마른 모델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생로랑 컬렉션

깡마른 모델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생로랑 컬렉션

깡마른 모델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생로랑 컬렉션

구찌의 2016 봄/여름 컬렉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모델이 광고에서 논란이 되었던 메디슨 스터빙틴.

구찌의 2016 봄/여름 컬렉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모델이 광고에서 논란이 되었던 메디슨 스터빙틴.

구찌의 2016 봄/여름 컬렉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모델이 광고에서 논란이 되었던 메디슨 스터빙틴.

마른 몸매의 모델이 사회적 이슈가 된 건 10년 전부터다.
키라 나이틀리와 케이트 보스워스 같은 할리우드 패셔니스타들이 거식증 의심을 받던 2006년부터 스페인·밀라노·런던 등지의 패션쇼에서 마른 모델 퇴출 선언이 이어졌다. 지나치게 마른 모델이 여성들에게 그릇된 미의식을 심어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해 말 브라질 모델 아나 카롤리나가 거식증으로 숨지고, 이듬해 한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가 거식증 환자 이사벨 카로의 해골 같은 몸을 공익 캠페인에 등장시키면서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일부 패션계 인사들은 ‘그래도 말라야 옷태가 산다’며 마른 모델을 포기하지 않았고, 모델들 역시 ‘우리는 말랐을 뿐이지 병든 게 아니다’라며 역차별에 반대했다. 하지만 대세는 점차 사회적 규제 쪽으로 기울어갔다.

스페인은 2007년 BMI(키에 비례한 체질량 지수) 18.5 이하의 모델을 퇴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는 모델들의 건강 증명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2013년에는 이스라엘이 BMI 18.5 이하 모델들의 광고 출연을 금지시켰다. 세상 어느 곳보다 하이패션 브랜드의 입김이 센 프랑스 역시 2015년 12월, 오랜 진통 끝에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모델들이 건강 증명서를 제출해야 패션 업계에서 일할 수 있고, 잡지 화보에 포토샵 수정 여부를 명기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6개월 징역 또는 최대 7만5천 유로(약 9600만원)의 벌금을 물린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각국의 관련 입법 사례는 오히려 스스로 변화를 거부하는 패션계의 고집을 반증하는 것인지 모른다.

최근 영국 광고표준위원회(이하 ASA)는 2016 구찌 크루즈 광고 캠페인을 금지했다. 문제가 된 것은 모델 매디슨 스터빙턴과 에이버리 블랜처드다. ASA 측은 “상체를 살짝 숙인 자세 때문에 모델의 허리가 지나치게 가늘어 보인다. 또 어두침침한 눈 화장으로 마치 아픈 것처럼 침울하고 수척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구찌는 “이 광고는 성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건강하지 않아 보일 정도로 말랐다는 기준은 주관적이다”라고 반박했다. ASA는 지난해 6월에도 앙상한 모델이 등장하는 생로랑의 잡지 광고를 중지시켰다. 그들은 “종아리와 허벅지 굵기가 똑같은 저체중 모델을 이용한 광고는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메이저 패션쇼에서도 여전히 기아 상태의 모델들을 목격할 수 있다. “베르사체의 2016 F/W 쇼를 보라. 몇 년 전만 해도 칼리 크로스가 굉장히 마른 모델로 꼽혔는데, 심지어 그녀마저 통통해 보일 정도로 기이하게 마른 모델들이 등장했다. 요즘 런웨이는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조차 육덕 져 보이게 한다.” 한 패션 관계자의 증언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톱 모델 에린 헤더튼의 고백이 화제다.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더 살을 빼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도저히 건강을 유지할 수 없어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을 그만뒀다는 내용이다. 그녀의 비키니 사진을 샅샅이 훑어봐도 군살이라곤 한 점 없던데, 도대체 얼마나 말라야 브랜드를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서는 피트니스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의 미녀들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뷰티 채널들은 유승옥, 이하늬, 최여진 같은 건강미 넘치는 여자들을 MC로 내세워 애플 히프부터 가슴 라인까지 구석구석 몸을 조각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건 그것대로 애초에 H라인을 타고난 대다수 동양 여자들에게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운동 강박은 무작정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에 비하면 지극히 건강하다. 올 1월 프랑스에서 출간된 빅투아르 마송 도세르의 책을 보면 패션계가 어떻게 멀쩡한 여자들을 거식증으로 몰아가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18세에 모델 에이전시 ‘엘리트’에 발탁됐지만 첫 패션위크를 앞두고 “모든 옷이 XS 사이즈다. 옷이 잘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도세르는 하루에 사과 세 개와 탄산수만 먹으며 두 달 동안 10kg을 감량했다.

177cm에 46kg의 몸을 갖게 된 그녀는 알렉산더 맥퀸, 미우미우 등의 쇼에 출연하며 인기 모델 순위 20위까지 들었다. 하지만 곧 거식증이 찾아왔다. 맥박이 약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데다, 골다공증이 생겼으며, 생리마저 멎었다. 어린 모델들은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기자들 앞에서 많이 먹는 척하다가 카메라가 사라지면 토하기도 했다. 결국 우울증과 폭식증까지 얻게 된 도세르는 8개월 만에 모델 일을 그만두었고, 5년이 흐른 올해 『끝없이 말라야 한다 : 슈퍼모델의 일기』라는 책을 펴냈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칼 라거펠트는 ‘샤넬 옷은 가슴 있는 여자들에게는 맞지 않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자는 원래 가슴이 있지 않은가. 왜 일반 여성들의 몸에 맞는 옷을 만들지 않는가?” 그러게 말이다. 패션 산업은 환상과 동경을 먹고 산다. 하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환상은 그것을 선망하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디자이너들은 옷의 라인이 흐트러지는 게 싫어 수수깡 같은 모델을 원한다지만 결국 옷을 입는 것은 사람이다.
 

영국의 광고표준위원회가 구찌 광고를 금지했다. 모델이 너무 말랐다는 게 이유. 명품 브랜드의 마른 몸 사랑은 왜 식을 줄 모르는 걸까?

Credit Info

2016년 05월 01호

2016년 05월 01호(총권 76호)

이달의 목차
WORDS
이숙명(칼럼니스트)
PHOTO
Getty Images, IMAX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