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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파먹어 봤습니다

On April 08, 2016

새로 장을 보기보단 냉장고 속 재료들로 식단을 꾸리는, 이른바 '냉장고 파먹기'가 유행이다. '육시 육끼' 하는 30대 싱글 여성의 '냉파' 체험기.

한국에서, 아니 서울에서 유독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 얼마 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의 경제 분석 기관인 EIU의 발표를 보고 뜨겁게 위로받았다. 서울 물가가 뉴욕 다음으로 비싼 세계 8위(LA와 공동 8위)에 올랐는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일상 식료품비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란 점이다. 내 살림의 엥겔계수가 높은 이유가 ‘삼시 세끼’가 아닌 ‘육시 육끼’를 고집하는 내 염치없는 혀와 위장 탓인 줄로만 알았다.

특히나 약속 장소가 도산공원 사거리나 한남동 등지에 몰려 있으면 집을 나서는 마음이 묵직해진다. 가끔은 하굣길에 친구와 분식집에서 튀김이나 떡볶이 따위를 먹으며 만족해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은 아주 친한 친구라면 몰라도 지인들과 오랜만에 만나 분식집에서 식사하자는 말을 할 순 없으니 말이다. 아아, 얄궂은 이놈의 소셜 포지션.그래서 시작한 것이 ‘냉장고 파먹기’다.

이걸 뉴스에서는 ‘짠테크’라 명한다. 순전히 내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일인데, 얼결에 트렌드 중심에 선 기분이다. 그런데 전혀 기쁘지 않다. 남들은 메이크업이나 셀프 인테리어로 트렌드를 이끌 때, 나는 냉장고나 뒤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누가 내게 ‘남들 보는 데서 궁상떨래, 아니면 혼자 궁상떨래’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다. <냉장고를 부탁해>의 탄생 배경도 ‘짠테크’가 아니던가. 구질구질해 보일지는 몰라도 경제 사정엔 꽤 도움이 된다.

마트에서 한 번 장보기를 하면 아무리 1인 가구라 해도 금세 5만원 넘기기 일쑤. 장보기 횟수 자체를 줄이는 게 답이다. 일단 우리 집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뒤지다 보면 의외의 수확에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싹이 자란 감자 더미 사이에서 덜 무른 당근이나 양파를, 혹은 김치통 뒤에 살포시 숨어 있던 스트링 치즈나 햄을 찾아내면 유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기분. 여기서 잠깐, 이렇게 냉장고를 파먹을지라도 한 가지 원칙은 있다. 바로 ‘덜 궁상맞을 것’. 자투리 재료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한 끼를 창출해야만 기껏 차린 밥상 엎고 집 앞 식당으로 뛰어가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해?’라는 생각은 금물. ‘냉장고 파먹기’의 주적이다. 지금 잠깐 참으면 내일 출근 택시비도, 주말 결혼식 축의금도 낼 수 있다. 덤으로 두뇌 회전도 빨라진다. 부족한 재료로 요리하다 보면 창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제 저녁 나는 며칠 전 냉동실 귀퉁이에서 발굴한 얇게 썬 쇠고기 등심 자투리를 꺼냈다. 굽자니 젓가락질 세 번에 끝날 양. 규동을 만들기로 했다. 정석대로 만들려면 생강, 맛술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밥 백 선생’이 말씀하셨다. “없으면 넣지 마유~.” 백 선생님 덕분에 나는 요리책 볼 때마다 영원히 날 괴롭힐 것만 같던 ‘생강’과 ‘맛술’로부터 해방되었다. 명심하라. 완벽한 레시피에 집착하면 절대 냉장고를 파먹을 수 없다.

나는 먹다 남은 자몽 소주, 스타벅스에서 챙겨온(훔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가방에 있었다) 황설탕, 양조간장을 1 : 1 : 4로 섞어 팬에 투척했다. 그래도 단맛이 약간 부족한 듯해서 식탁에 굴러다니던 밀크 캐러멜을 까서 두 개 넣었다. 맛에는 큰 변화가 없었는데, 뭔가 대단한 차선책을 생각해 낸 것 같아 괜히 우쭐해졌다. 육수를 낼 때는 ‘너구리’의 다시마와 엄마가 추울 때 마시라고 말려서 보내준 우엉 세 조각을 활용했다. 냉동실에 얼려둔 현미밥 한 덩이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소스에 자작자작하게 끓여낸 쇠고기를 얹었다. ‘냉장고를 파먹으려 해도 도통 뭐가 있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대파’와 ‘마늘’만 냉동고에 쟁여두라고 권한다.

대파는 송송 썰고, 마늘은 갈아서 소분해 두면 아주 ‘기본적인’ 요리는 뚝딱 할 수 있다. “된장찌개 끓이고 싶은데 두부는? 애호박은?” 이럴 거면 당신은 냉장고를 파먹을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때마다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더 큰 화를 자초하겠지. 지금 일본에서는 ‘공유 식탁’이 인기다. 누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요리할 것인지 인터넷에 모여 정한 뒤, 퇴근하면 함께 모여 밥을 먹는 방식. 한국에서도 작년에 유행했는데, 그때는 ‘혼밥’을 피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면 일본의 공유 식탁은 적은 지출로 풍성한 식단을 즐기는 게 목적인 듯. 그런데 나는 모르는 사람과 밥 먹기 싫다. 오늘도 냉장고를 열심히 파먹고 주말에 친구들과 근사한 저녁을 즐길 거다. 요즘 꼬막과 더덕이 제철이니까.

새로 장을 보기보단 냉장고 속 재료들로 식단을 꾸리는, 이른바 '냉장고 파먹기'가 유행이다. '육시 육끼' 하는 30대 싱글 여성의 '냉파' 체험기.

Credit Info

2016년 04월 01호

2016년 04월 01호(총권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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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손안나
WORDS
김현민(프리랜서)
PHOTO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