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 네이버 포스트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오늘의 이슈

게임이 된 '헬조선'

On March 15, 2016

불법적으로 돈을 벌고, 정직원이 되기 위해 상사에게 아부했다. 양심 고백이냐고? 아니, 게임 얘기다.

3 / 10
/upload/grazia/article/201603/thumb/27869-111190-sample.jpg

거지 키우기

거지 키우기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더니 1초에 5천원씩 적립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게임을 실행시켜 놓는 것만으로도 차곡차곡 쌓이는 돈의 액수를 보니 배가 불러왔다. 현재 나의 ‘캐릭’은 거지지만 상관없다. ‘이런 식이라면 구걸해서 만수르 되는 건 시간문제겠는데?’ 실제로 1시간도 안 돼 거지에서 거리의 악사, 자해 공갈, 민속촌 알바, 임상 실험 알바를 거쳤고 지금 내 캐릭터는 ‘가짜 휘발유’를 팔며 초당 60만원 정도를 벌고 있다. 시간과 휴대폰 배터리만 충분하다면 누구나 만수르가 될 수 있는 ‘만수르 게임’은 불법과 합법의 직업을 오가며 오직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다. 게임을 하면서 불법 직업이 등장할 때마다 ‘어, 이건 아닌데’ 싶다가도, 쌓여가는 돈을 보면 ‘빨리 돈 벌어서 이 짓 그만둬야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 진짜 돈이 아닌 줄은 알지만 숫자가 빠르게 커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현실이 사르르 잊힌달까.

‘만수르 게임’은 처음 출시된 이래 구글 플레이에서 90만 번 이상 다운로드됐다. 비슷한 게임으로는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돈이 벌리는 ‘거지 키우기’가 있다. 구걸로 돈을 모아서 함께 구걸할 ‘알바’를 고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화가·피아니스트·축구 선수 그리고 의사와 판사까지 동원해서 구걸(!)을 한다(이런 재능 낭비는 처음이다). ‘거지’이자 ‘사장’이 되는 이 독특한 게임은 작년 여름에 출시된 후 300만 다운로드가 넘었고, 인기에 힘입어 ‘거지 키우기 크리스마스 에디션’까지 출시됐을 정도다. 많은 사람이 게임 속 ‘사이버 머니’를 불리면서 현실도피를 하고 있다는 말일까? 장근영 심리학 박사는 “현실도피일 수도 있죠. 게임은 상상이나 소망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요”라고 말한다. “원시인들이 살던 시절에도 게임은 존재했어요.

한 번도 사냥해 본 적이 없는 매머드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을지 자기들끼리 상상을 하면서 역할을 배분하고, 계획을 세우는 시뮬레이션 과정 자체가 게임이었다고 할 수 있죠.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어떻게 구현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대부분의 게임이 가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거지 키우기’나 ‘만수르’ 같은 게임을 통해 ‘만약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가상현실의 체험을 하는 거죠.” 그런데 게임이라는 건 원래 ‘판타지’라는 요소가 더 강력하지 않았나? 가상 세계로 들어가서 레벨을 올리고, 끝판왕(그것이 불을 뿜는 용이든, 잔혹한 악당이든 간에)과 싸워 공주를 구하거나 절대 반지를 되찾거나 하는 수준 말이다.
 

내 꿈은 정규직

내 꿈은 정규직

내 꿈은 정규직

만수르 게임

만수르 게임

만수르 게임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

‘만수르만큼의 부자가 되는 일’ 역시 판타지이긴 하지만 보험사기를 치고, ‘짝퉁’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은 판타지라고 부르기엔 꽤나 현실적이다. ‘만수르 게임’을 포함해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은 대부분 현실이 반영됐다. ‘내 꿈은 정규직’, ‘내 꿈은 멘탈 갑’, 그리고 ‘한국에서 아기 키우기’ 등은 제목만 들어도 현실감이 팍팍 느껴지지 않나? 실제로 ‘내 꿈은 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는 건 정말 힘들다. 개인적으로는 인턴 면접만 7번 떨어졌으며 인턴이 되고도 일을 못한다고, 상사의 대화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혹은 근무 중에 뜯은 과자 봉지 속 질소에 날아갈(!) 만큼 체력이 약하다고 권고사직 당한다.

계약직이 되고도 쫓겨나기는 마찬가지. 23번째 회사에서 겨우 정규직이 됐다. 게임의 최종 단계는 사장이 되는 거지만, 하다 보니 사장은커녕 그냥 잘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적인 일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캐릭터의 엄마는 ‘친구는 아들이 명품 백을 사줬다던데…’ 하며 압박하고, 은행에서는 ‘학자금 대출 이자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라는 전화가 온다. ‘사원들이 건강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이번 주말에 다 같이 등산을 가기로 했다네. ^0^’라는 상무님의 말에 실제로 분노를 느끼면서도 ‘오이는 제가 싸오겠습니다!’라는 답을 선택하며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었다.

이런 게임을 누가 할까 싶겠지만 ‘내 꿈은 정규직’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돼 (아주 잘) 팔리고 있다. 앱 스토어의 리뷰에도 ‘63번째 회사를 인턴으로 다니고 있어요’ ‘그래도 현실이 게임보다 더 잔혹합니다, 여러분’ 등 불평 섞인 리뷰를 적어놓고는 별을 다섯 개 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현실도피는커녕 현실을 리마인드시켜 주는 이런 게임을 하는 심리는 뭘까? 장근영 박사는 “둔감화가 목적인 것 같아요”라고 의견을 전했다.

“실생활에서는 정규직이 되는 과정 중 겪을 수 있는 모든 난관과 좌절을 전부 다 경험하는 사람은 없죠. 한두 개만 경험해도 가슴이 탁 막혀올 거예요. 게임을 통해서 실제로 못 겪는 상황까지 미리 겪어보며 일종의 마음의 준비도 하고, 스스로 단련도 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는 “이런 게임은 꿈꾸는 미래를 가상현실에서 충족시켜 준다는 대리만족의 효과, 회사에서 겪을 수많은 잔소리와 오지랖에 대한 예행 연습을 통한 둔감화,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나 역시 게임의 캐릭터가 버는 돈이 많아질수록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인턴에서 계약직이 됐을 때는 내가 승진한 것처럼 기특했다.

‘좀만 힘내!’라며 마음으로 캐릭터를 응원했고, 정직원이 되었을 때는 쑥스럽지만 조금 감동했다(심지어 옆 동료 에디터에게 축하까지 받았다). 어차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야근은 줄지 않는다. 월급이 오를 날은 멀었고, 가기 싫은 산행도 윗사람이 가자면 가야 한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주말만 되면 술 마시러 뛰쳐나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헬조선’보다 더 ‘헬’인 게임으로 리프레시하는 것도 방법일지 모르겠다. 이런….

불법적으로 돈을 벌고, 정직원이 되기 위해 상사에게 아부했다. 양심 고백이냐고? 아니, 게임 얘기다.

Credit Info

2016년 03월 01호

2016년 03월 01호(총권 72호)

이달의 목차
EDITOR
백지영
PHOTO
Dollar Photo Club, 모나바바, 퀵터틀, Voolean, Fire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