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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호 EDITOR'S LETTER

On May 19, 2015 0

“나, 패션엔 관심 없어.”

EDITOR IN CHIEF 안성현

“나, 패션엔 관심 없어.”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실은 나도 자주.
하지만 이런 문장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큰코다친다. 패션계 언저리에서 녹을 먹는 사람이 이런 문장을 구사한다면 속내는 이런 거다.
“나 이제 옷 말고도 다른 데로 관심이 막 가.” 옷 말고 다른 거? 그럼 그게 뭘까?
요즘 내 쇼핑 촉수는 소풍 갈 때 쓸 스탠리의 아이스박스와 핌리코의 테크 체어, 침대에서 책 읽을 때 커피를 올려놓을 아일린 그레이의 E1027 사이드 테이블, 깨질 염려가 전혀 없어 아들에게 딱인 팔콘의 머그잔, 손 닦을 때마다 캐머마일 정원에 파묻힌 것 같은 커먼굿의 천연 핸드 솝… 이런 것들을 향해 뻗어 있다. 게다가 내 모바일에 담긴 꿈의 여행지는 1920년대에 지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간 분리가 예술인 네덜란드의 ‘슈뢰더 하우스’, 프랑스 남부 시골의 ‘롱샹 성당’(맞다.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에 영감을 주었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 오키나와의 독특한 지역성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던 건축물 ‘나고 시청’이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오키나와에 가면 겸사겸사 선탠도 하고, 그곳의 천연 효모 빵도 먹으면 좋겠단 꿈을 꾼다. 가끔은 프랑스 남부와 네덜란드를 한꺼번에 순례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지 머리를 굴리다 더운 한숨을 쏟기도 하고. 20대의 내가 회사에 입고 나갈 옷과 가방의 조화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면 이제는 이런 욕망들로 뇌를 자극하고 있다. 30대를 지나 40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방향키를 그렇게 돌리게 됐다. 결국 이런 말이다. 패션에 관심이 없어진 게 아니라 내 패션 철학과 괘를 같이하는 전반적인 일상을 꿈꾸게 됐다는 얘기. 패션에서도 기능과 디자인의 균형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워킹 우먼으로서, 일상의 물건과 공간 역시 기능에 더해진 디자인이 중요하다. 피로 사회 지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만의 공간과 여가가 삶의 목적이 되니까.같은 맥락에서 얼마 전 서울을 들었다 놓은 샤넬 크루즈 컬렉션 얘길 해보면, 내 주위 많은 이가 타임라인을 도배한 그 한복 인스피레이션보다 라거펠트가 변주해 낸 애프터파티의 공간을 칭찬했다. 천장을 타고 쏟아진 하얀 동백 샹들리에, 파티장을 활기차게 종횡무진 누빈 유기 그릇, 과감하게 옥색을 사용한 파티 테이블 같은….
역시 어제 방문했던 에피그램 ‘얼모스트 홈’ 팝업 스토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피그램의 옷을 입는 남자라면 당연히 선택했을 것만 같은 침대, 화분, 물잔, 스탠드, 노트까지 차분히 차려놓은 공간. 옷이 이제는 그것을 입는 사람의 잠자리와 먹거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다. 다음 주에는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노앙이 아웃도어 가구 브랜드 하이브로와 협업해 만든 피크닉 제품을 구경하러 갈 예정이다. 이제 패션은 나를 더 넓고 깊고 광활한 공간으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나, 패션엔 관심 없어”라는 말은 취소한다.

PS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내 남편이 읽었으면 좋겠다.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10년째 말하는 그 남자 말이다.

EDITOR IN CHIEF : 안성현

발행 : 2015년 55호

“나, 패션엔 관심 없어.”

Credit Info

2015년 06월 01호

2015년 06월 01호(총권 55호)

이달의 목차
EDITOR IN CHIEF
안성현

2015년 06월 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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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IN CHIEF
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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