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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 카테고리에 넣을 법한 이번 시즌의 디자이너 슈즈들.

살 것이냐? 말 것이냐?

On April 01, 2014

21세기의 새로운 예술품으로 떠오른 아트 힐. 땅바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나 가방처럼 대대손손물려줄 수 없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워 마음이 흔들리곤 한다.

ALEXANDER MCQUEEN

보르도로 와인 투어를 간 적이 있다. 7년쯤 전이었는데, 이름난 ‘샤토’들을 둘러본다는 게 듣기엔 꽤 낭만적이지만 실상 가는 곳은 농장과 창고, 만나는 이들은 농부들과 특산물 거래업자들이니, 프랑스를 샤넬과 루이비통의 나라쯤으로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배신감이 들 법한 여행이었다. 그러다 한 와이너리에 들러 저녁을 먹게 됐는데, 마중 나온 안주인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모니카 벨루치처럼 생긴 여자가 풀 메이크업을 하고 점프슈트를 입은 채 12cm는 족히 될 법한 구두를 신고 자갈밭을 걸어 나온 것이다.

그녀를 따라 성으로 들어가면서도 석양에 물든 보르도의 와인밭이 아니라 급경사를 그리는 그 구두의 아웃솔에, 그리고 밑창에서 뻗어 나온 황금색 지지대가 자갈밭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에 눈을 빼앗겼다. 하이힐은 태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의 신발이 아니다. 더구나 런웨이가 아니라 농촌 자갈밭에서 오로지 스타일을 위해 태어난, 그런 장식적인 구두를 만난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미숙함을 여성성의 한 갈래로 인정하는 스니커즈 차림의 나는, 저녁 내내 그녀 옆에 납작하게 찌그러진 채 패션 피플의 올곧은 근성과 굳은 심지에 대해 진지한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왜 단두대로 끌려가는 순간까지 화려한 하이힐을 포기 못해 빈축을 샀는지, 왜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역의 중요도를 신발 높이로 구분했는지를. 신(God) 역을 맡는 배우는 15cm가 넘는 신발을 신고 벗기 위해 사람들의 부축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름다움이란 개념은 애초 잉여성에서 나온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패션을 바라본다면 인류가 개발한 가장 아름답고 불필요한 고문 도구인 하이힐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 높은 단계의 미학적 선택일 것이다.

CÉLINE

그러니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이 동서고금 우주만물의 형태와 패턴을 아우르게 된 오늘날, 여자들의 구두 굽이 새삼 설치 예술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예컨대, 이번 시즌 셀린느는 평범하고 고전적인 블랙 부티에 당장 베어내서 귀고리로 써도 될 것 같은 커트아웃 메탈이나 디스코 볼 모양의 힐을 달았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떼어다 붙인 것 같은 돌체앤가바나의 샌들은 또 어떤가. 백화점 바이어가 아니라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관심을 가질 영역처럼 보인다.

그에 비하면 알록달록한 스터드가 촘촘히 박힌 크리스찬 루부탱의 스틸레토, 소라 알맹이를 파낼 때 이쑤시개 대신 써도 좋을 것 같은 쥬세페 자노티의 뾰족한 하이힐은 오히려 실용적인 수준으로 느껴진다. 물론 천송이가 이웃집 남자 꼬드기러 갈 때나 잠깐 신을 법한 그 신발들은 일단 가격에서부터 전혀 실용적이 아니다.
오랫동안 대중의 생각은 이랬다. 가방은 수십 년 쓰다 딸한테 물려줄 수 있고, 여차하면 빈티지로 팔 수도 있다. 하지만 땅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구두는 다르다. 몇 해 전 모 잡지사 FGI(Focused Group Interview)에서 접한 우리나라 커리어 우먼들의 얘기다.

프라다의 무난한 블랙 펌프스나 지미추의 기본 스틸레토 정도면 괜찮다. 하지만 그야말로 한 시즌 신고 말 트렌디한 구두라면 꼭 디자이너 브랜드여야 하는가라는 망설임이 든다.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또 얘기가 달라졌다. 디자이너 백은 더 이상 그것 하나만으로 개성을 완성할 수 있을 만큼 희소하지 않다. 취향은 중심에서 시작해 말단으로 퍼져 나가는 것. 언젠가 집안 현관부터 2층까지 벽과 계단마다 신발을 늘어놓고 사는 패션 수집가 친구가 해준 말이다. “지름신엔 발전 단계가 있어. 옷-가방-구두-주얼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계에 떼돈을 쓰게 되지.” 이를 사회에 적용하자면, 요즘 우리나라 여성의 소비 취향 발전 단계가 구두에까지 이른 듯하다.

  • DOLCE & GABBANA
  • JOHN RICHMOND

연예인 ‘완판녀’들의 위력이 명품관의 하이엔드 슈즈 브랜드에까지 미친 데서 그 징후를 본다. 이제 시중 은행들이 ‘잇 슈즈 적금’을 내놓을 때가 된 걸까? 만기는 4개월. 봄, 여름, 겨울 새 신발을 살 수 있도록. 누군가는 그런 생각도 들 것이다. 먹으면 없어지는 저녁 한 끼도 몇 만 원인데, 한 시즌이나마 나를 루이 14세처럼 만들어줄 구두 한 켤레에 백만원을 못 쓰겠는가.

MAIYET

패션에 있어 중도는 없다. 통기성 좋고 부드러운 이탈리아 소가죽에 길들여지면 ‘~ st.’가 붙은 인터넷 구두 100켤레를 한꺼번에 가진대도 만족할 수 없다. 그나마 소재가 좋은 로컬 브랜드들은 수십 년째 트렌드와 무관한 보수적인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건축적이고 디테일이 많은 이번 시즌 디자이너 슈즈들에 대해서라면 다른 대안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다시 말해 가격은 협상의 조건이 아니다. 후세들이 21세기 유물을 정리할 때 복식이 아니라 예술품의 카테고리에 넣을 법한 이 구두들을 앞에 두고,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건 오직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뿐이다.

아름다움은 곧 잉여성에서 비롯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가? 고도의 아름다움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근성과 심지가 있는가? 두 질문에 모두 ‘Yes’라 답했다면, 당신의 결정을 방해하는 실용성이니 수명이니 하는 소소한 근심거리들은 잊어버리자.

샤스 스플린. ‘슬픔이여 안녕’이란 뜻의 이 말은 모니카 벨루치를 닮은 그녀가 만든 와인의 이름이다. 그날 이후 내겐 패션의 정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WORDS : 이숙명
EDITOR : 전선영
PHOTO : Imaxtree

발행 : 2014년 27호

21세기의 새로운 예술품으로 떠오른 아트 힐. 땅바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나 가방처럼 대대손손물려줄 수 없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워 마음이 흔들리곤 한다.

Credit Info

2014년 04월 01호

2014년 04월 01호(총권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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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이숙명
EDITOR
전선영
PHOTO
Imax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