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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화천 라이프

도깨비의 아버지

 


 ->  계절이 바뀌는 때를 아이들은 너무 잘 안다. 여린 몸이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이는 방법, 일종의 가을맞이 신고식은 아이마다 작은 몸살을 앓는 것이다. 나은이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몸으로 고열과 설사를 반복한 아이는 여전히 힘과 흥이 넘쳤다.

“애들은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방방 뛰어노는 도깨비다. 아기 잘 봐줘라. 꼭 너도 그랬어.” 친정엄마 말씀처럼 나 또한 아파도 온 동네를 누비며 달리는 도깨비, 비쩍 마르고 까만 소녀였다.


아이의 컨디션만 믿고 병을 더 두고 볼 수 없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달려온 남편을 보자 아이는 더 신이 났다. 아이 아빠는 나은이에게 “우리 병원으로 캠핑 갈까?”라고 말했다. 아이는 앞장서 병실 안으로 들어섰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 깔깔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피검사 결과 염증 수치가 정상의 34배에 달했고 입원 후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그날 아이 아빠는 군복을 입은 채 보호자용 침상에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유년 시절 잘 먹지 않아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던 엄마 대신 아빠와 병원에 가곤 했다. 아빠와 병원에 다녀온 늦여름 어느 밤. 아빠는 집 앞 해변의 야시장에 나를 풀어놓았다.

남의 노래를 열창하는 짝퉁 가수의 트로트 음악을 들으며, 포차에서 흘러나오는 눅눅한 술과 안주 냄새를 맡으며 누군가 버리고 간 불빛 남은 야광봉을 흔들며 아빠와 해변의 모래를 차며 힘차게 걸었다.

해변의 중심에서 조금 멀어지면 고무 타이어 울타리 안 범퍼카 경기장이 있었다. 작은 범퍼카에 동전을 넣고 아빠는 나를 옆에 앉힌 채 진지하게 운전대를 움직였다.


“엄마, 아프니까 좋아요.” 남편이 퇴근 후 병실 면회를 오면서 파랑 수국 한 송이를 사왔다. 그 꽃은 30개월 소녀에게 아빠가 주는 첫 꽃다발이라고 했다.

“엄마! 나은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에요. 기분이 너무 좋아요.” 미소를 짓는 아이의 얼굴은 아빠와 범퍼카를 타며 환하게 웃던 나의 도깨비 시절과 닮아 있었다. 다행이야. 네게도 참 멋진 아빠가 있구나.


표현에는 인색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 손녀를 보러 와 말했다. 태어난 지 백일이 안 된 나와 엄마를 먹여 살리려고 알래스카행 배를 탔다고 했다.

“오 아버지, 외국 나가신 적 있어요? 여권도 있으세요?” “선원수첩 있었지. 육지는 밟을 수 없고 바닷길은 누벼봤지. 그런데 배를 얼마 못 탔어.” 동생과 나, 남편은 선원수첩이 너무 예스러워 깔깔 웃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마누라 얼굴은 안 보고 싶은데 네 얼굴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더라.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왔지.” 순간 우리 모두는 짧은 고백이 너무 간지럽고 감동적이어서 괜히 나은이에게 노래를 시키며 분위기를 바꿨다.


캄캄한 병실. 아이를 재우다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나를 나은이가 부른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는 언제 와요?” 나는 파란 수국을 바라보며 속으로 답했다. 그래,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은 가을이야.

 

전지민 작가는요…

◎전지민 작가는요…

3세 딸 나은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자 작가. <그린마인드 매거진> 편집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서울과 화천을 반반씩 오가며 반듯하고 아름다운 것을 담고 쓴다.

Credit Info

기획
강지수 기자
글·사진
전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