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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영화를 읽다

지금도 사랑할 시간

 


몇 년 전만 해도 주말부부는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가끔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심지어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 ‘주말부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거나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란 농담까지 돈다.

꼭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으면서 에너지를 충전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래도 한때는 뜨겁고 애틋했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가사와 육아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나니 일상이 마냥 관성적으로 흘러간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같은 드라마를 보며 일시적으로 달달한 기분에 잠길 때도 있지만 그건 손예진과 정해인의 예쁜 로맨스일 뿐 완전히 감정 이입하긴 힘들다. 아이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 건조하고 재미없는 중년이라니. 감정의 처방이 필요하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3부작은 로맨스 영화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걸작으로 멜로 감정을 환기하기에 제격이다. 세 편은 모두 9년 간격으로 만들어졌다.

1편 <비포 선라이즈>가 20대의 열병 같은 사랑을, 2편 <비포 선셋>이 30대의 불안을, 3편 <비포 미드나잇>이 40대의 현실을 그리면서 마무리된다. 내가 <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봤을 때가 20대였으니 나 또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를 따라 함께 늙어간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빠져나온 듯 아름다웠던 두 배우가 세월의 직격탄을 맞은 모습은 가슴 아프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세 편 중 최고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비포 선셋>을 선택하겠다. 1편보다 성숙해지면서 3편보다 열정적인 것이 진짜 어른의 로맨스라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9년 만에 재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편에서 6개월 후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자던 약속은 불발되고 다시 만나기까지 결국 9년이나 걸렸다.

작가가 된 제시는 셀린느와의 하룻밤 추억을 책으로 쓰고 유럽 홍보 투어 차 파리에 왔다가 서점에 들른 셀린느를 만난다. 제시는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셀린느와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까 제시와 셀린느가 파리의 거리, 카페, 유람선 그리고 셀린느의 집을 오가며 데이트하는 80분이 곧 실제 러닝타임인 것이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연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조심스럽게 근황을 이야기하는 사이, 9년간 묵혀두었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추억은 엇갈리고, 현실은 불만스러우며, 미래는 두렵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둘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포 선셋>은 가벼운 키스 신 하나 없이 오직 주옥같은 대사와 떨리는 눈빛으로 사랑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그러고는 짓궂게도 감정이 가장 고조되었을 때 끝난다. 이후의 이야기는 관객들이 상상하라는 듯이.

<비포> 3부작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늘 시간에 쫓긴다. 동이 트고(비포 선라이즈), 해가 지며(비포 선셋), 자정이 넘어가면(비포 미드나잇)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날지도 모른다. 특히 <비포 선셋>에서 셀린느는 제시에게 몇 번이나 공항에 가야 할 시간을 묻는다.

사랑할 시간이 유한한 만큼 지금 같이 있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증거다. 영화는 안 그런 척하지만 내심 안달이 난 두 연인의 모습을 그린다. 그래, 그런 거였어. 사랑은 결핍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것이었어.

완벽한 해피엔딩 끝에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동화 속 문구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할 시간이 유한함을 실감한다면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고 의미를 찾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일상에 지친 지금도 여전히 사랑할 시간이다.

 

 >  신민경 씨는요…
여섯 살, 네 살배기 두 아들을 키우는 만년 초보 엄마이자 생계형 프리랜서 라이터. <스크린>, <무비위크> 등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지금도 틈틈이 보고 읽고 쓴다. 엄마가 행복해져야 아이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다.

Credit Info

기획
한보미 기자
신민경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www.gettyimageba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