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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영화를 읽다

옛날 옛적 동독에서

On June 15, 2018 0

 


나는 투철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마지막 세대다. 1980년대 당시 ‘국민학교’에선 잊을 만하면 반공글짓기, 반공포스터, 반공웅변대회 등을 개최해 전교생이 함께 북한을 미워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 어린이는 교과서가 인정한 국민 영웅이었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라고 적힌 국민교육헌장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억지로 외워야 했다.

써놓고 보니 참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그때 어린이들은 북한을 적이자 외계인이며 무찔러야 할 원수라고 배웠다. 얼마 전 가족들과 남해 여행을 하다가 거제포로수용소에 들렀는데 영상 자료를 보던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저 아저씨들은 왜 싸우는 거야?” 그러게… 대체 왜 싸웠을까? 어찌 보면 나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인데, 앞으로 아이가 하게 될 이런 질문에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고민스럽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선언 이후 역사의 한 챕터가 뭉텅이로 지나가버린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6년에 제작한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은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타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 동독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동독에는 10만 명의 비밀경찰 슈타지와 20만 명의 스파이가 있었다. 농담과 낙서까지 검열 대상이었던 시대다.

냉혈인간 비즐러(울리히 뮤흐)는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다.

집 안 곳곳에 심어놓은 도청장치를 통해 대화는 물론 은밀한 사생활까지 모두 엿듣지만 드라이만을 체포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한다. 변하는 건 오히려 비즐러다. 비즐러는 사랑과 예술혼이 충만한 이 커플을 통해 양심적이고 따뜻한 모습으로 변화해간다.


비즐러에게 도청과 감시는 공식적인 업무다. 그러나 정작 비즐러의 사생활은 쓸쓸하고 황폐하다. 오직 정치적 신념에 따라 움직이던 그는 5년간 타인의 삶을 훔쳐보며 자기 안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걸 느낀다.

예술과 휴머니즘이 체제보다 더 위대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비즐러는 감시 대상인 드라이만과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음에도 예술을 통해 우정과 교감을 쌓아간다. 그는 브레히트의 시를 읽고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들으며 감동을 받는다.

영화 중간 레닌의 일화가 나오는 장면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레닌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인데 혁명을 완수하지 못할까 봐 이 소나타를 다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예술이 한 사람의 신념을 무너뜨릴 정도로 아름답고 강력하다는 뜻이리라. 모두가 같은 신념을 가지는 건 어려워도 예술 작품에서 비슷한 감동을 받는 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은 숨 막히는 동독 체제에서부터 독일 통일 후까지 몇 년에 걸친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마지막 장면과 대사는 깊은 울림을 준다.

블랙리스트나 감찰 등이 먼 과거 일이 아닌 우리로선 이 영화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독일이 통일 후 20년 이상 사회적 혼란을 겪었듯 우리도 물론 감내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세상만큼이나 분쟁 없이 다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도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이끌어갈 세상은 그랬으면 좋겠다. 무리하게 체제를 통합하고 신념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감동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 말이다. 판문점 선언이 있던 날 남편과 이런 얘길 나눴다.

“이번 주말에 평양에서 냉면이나 먹고 올까, 생각보다 빨리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  신민경 씨는요…
여섯 살, 네 살배기 두 아들을 키우는 만년 초보 엄마이자 생계형 프리랜서 라이터. <스크린>, <무비위크> 등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지금도 틈틈이 보고 읽고 쓴다. 엄마가 행복해져야 아이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다.

Credit Info

기획
한보미 기자
신민경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 (www.gettyimagesbank.com)

2018년 6월호

이달의 목차
기획
한보미 기자
신민경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 (www.gettyimagesba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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