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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PD의 엄마를 말하다

딸에게 쓰는 편지 미투운동을 바라보며

 


시어도어 젤딘의 책 <인생의 발견>에 이런 문장이 있다. ‘세상이란 우리가 각자 본 것을 말할 때, 모두가 흐릿한 횃불로 비출 때 드러나는 형체다.’ 지금의 미투운동을 이보다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자리에서 흐릿한 횃불을 든 용감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드러나고 있다. 거의 모든 분야, 거의 모든 조직에서 폭로가 이어지는 듯하다.

포털사이트 실검에 누군가의 이름이 뜨면 불안한 마음부터 든다. 이 사람도 가해자인가? 실제로 내가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던 사람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돼 섭외를 취소한 일도 있었다.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마음도, 머릿속도 터질듯이 끓어오른다. 나는, 내 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 내가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추려보았다.


첫째. 너는 성폭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00%에 수렴하는 확률로 반드시 겪을 것이다. 미투운동을 바라보며 왜 모든 분야에서 가해자가 나오는지 고민했는데 금세 답을 알게 됐다. 모든 분야에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성희롱과 성추행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 땅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언어적·신체적 성폭력을 겪지 않은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어느 학교에나 이른바 ‘변태 선생’이라 불리는 교사가 한둘은 있게 마련이었고, 대학교 MT에서, 회사 회식 자리에서, 각종 술자리에서 불쾌한 말이나 행동을 한 남성의 이야기는 흔하게 들려왔다.

내가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교육받은 내용은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 일은 일부 ‘조심하지 않은 여자들’이 겪는 일이고, 내가 조심하면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차례의 성폭력을 경험하고 나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이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지금 같은 분위기의 한국 사회를 살아간다면 어느 길목에서건 겪을 일이다. 나는 딸에게 ‘너는 성폭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피해자가 됐을 때 취할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목격자가 됐을 때는 어떤 행동이 현명한 것인지 고민해둬야 한다고 알려주고 싶다.

지진이나 화재 대피 훈련을 정기적으로 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성폭력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올 게 왔다’고 생각했으면, 내가 뭘 잘못해서, 조심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 아님을 유념했으면 한다.


둘째. 네 감각이 맞고 세상이 틀렸을 가능성이 생각보다 높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페미니스트’ 정의 중 두 번째 항목은 이렇다. ‘예전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랑’에 대한 정의 네 번째 항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 틀렸다. 페미니스트는 그런 뜻이 아니며, ‘사랑’은 남녀 간에만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이 정의를 바꿔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국어사전도 틀릴 수 있다. 교과서와 학교 선생님이 틀릴 수도 있고, 권위 있는 시인도 틀릴 수 있다. 네가 좋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남자애가 틀릴 수도 있다.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아마 ‘내가 너무 예민한가?’일 것이다.

좋은 사람인데, 훌륭한 어른인데,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남자인데 내가 착각한 걸까? 딸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네 감정, 네 감각, 네 생각에 가장 예민해야 한다고.

내 딸들이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딸아, 네가 불편함을 느낄 때 그 감각을 무시하지 말거라.

 

장수연 PD는요…

장수연 PD는요…

딸 둘의 엄마이자 페미니스트, 취미는 독서, 장래 희망은 작가인 MBC 라디오 PD. 

책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냈으며, 현재 팟캐스트 <쓰리맘쇼>를 진행하고 있다. 

Credit Info

기획
강지수 기자
장수연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 (www.gettyimagesba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