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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학습이 아닌 '운동'인 이유

On January 04, 2018 0

천문학적인 비용을 영어 사교육에 투자하고 있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외국인을 만나면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절절맵니다. 그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제발 내 아이만큼은 영어로 고통받지 않길 바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영어 동요를 불러주고 좋다는 영어전집을 들입니다. 입소문난 영어 커뮤니티의 학습법도 따라해보고, 성공한 엄마표 영어 멘토들의 강의도 찾아 듣지요. 그런데 뭔가 조금 아쉽지 않던가요. ‘왜 이런 교수법이 좋은지’, ‘왜 그렇게 따라하는 게 옳은 건지’ 궁금하지 않던가요? <박순의 영어두뇌 만들기>에서는 ‘외국어로서’ 영어를 학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영어에 접근해야 하는지 신경학적 관점에서 분석했습니다. 그 첫 번째 편은 ‘영어는 운동’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PROFILE
박순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밌고 효과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영어교육자.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학습하는데 있어 ‘뇌과학’이 제공한 중요한 단서를 바탕으로, 신경학적 관점에서 ‘영어두뇌’에 대해 연구 중이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교육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에서 ‘신경언어학과 영어교육’을 강의하고 있다.

<아이의 영어두뇌>, <뇌과학으로 알아보는 혁신적 영어 학습법>의 저자이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중학사이버영문법>과 EBSLang <EBS 대표 영문법>등의 교재를 개발했다. KBS <스페셜다큐>, EBS <다큐프라임>의 자문위원.

 


작년 겨울, 온 가족이 뉴질랜드로 몇 주일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대학 시절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며 스스로에게 했던 오래된 약속이었지만, 불과 일주일을 남겨놓고 여행 출발을 결정했기에 항공권 구입부터 숙소와 렌터카 예약, 아이들 여권 발급까지 후다닥 해치우느라 마음이 여간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세계의 주요 언어 7개(한국어·영국식 영어·미국식 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중국어)의 음향음성학적 특성 분석을 주제로 한 파일럿 연구를 완성하고자 몇 주 내내 연구실에 틀어박혀 대전에 있는 가족과 떨어진 채 홀로 서울에서 지낸 미안함을 풀고 싶기도 했고,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 없는 두 아이에게 영어권 언어와 문화를 체험시켜주고 싶은 바람도 있었습니다. 아껴뒀던 예금 통장을 해약해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첫째 아이는 어릴 적에 영어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습니다. 영어를 전공으로 학위를 받고, 책도 쓰고, 라디오 방송이나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고, 심지어 공교육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아빠인 저를 참 난감하게 만들었던 주인공이랍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녀석은 제게 정반대의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심해의 물고기인 양 눈만 또록거리며 소리없이 입만 벙싯대던 아이가 차츰 영어로 인사를 하며 말문을 트더군요.

그리고 나중에는 저 혼자 길가 가게에서 피쉬앤칩스를 사오며 뿌듯한 미소를 머금기도 했습니다.


뉴질랜드 남섬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픽턴의 홀리데이파크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공동 샤워장에 아이랑 둘이 들어갔는데 “아빠, 문 옆에 있는 흰색 버튼 눌렀어요? 그래야 따뜻한 물이 5분간 나온다는데요? 그다음부터는 찬물만 나온대요” 하며 알려주더군요.

과연 아이가 말한 그대로 몇 줄에 걸쳐 작은 글씨로 영어 안내문이 쓰여 있었습니다. 들어가면서 슬쩍 읽었을 뿐인데 저보다 훨씬 빨리 정확하게 의미를 이해한 겁니다.


한글 읽기가 완성된 후,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게 하거나 문법을 가르치지 않고 하루 1~2시간씩 영어 듣기와 소리 내어 읽기 위주로 영어를 익혀온 이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  인공지능 시대에 외국어 공부가 여전히 필요할까요?
구글 번역이나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이제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배울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과 정보의 보고인 인터넷상에서 영어 사용자의 수는 2017년 6월 기준 9억8000만 명이 넘습니다.

부동의 1위인 거죠. 무엇보다도 새로운 최첨단 연구 성과 대부분이 영어로 된 학술지나 매체에 발표되고 있습니다. 영어는 단순히 미국이나 영국의 언어가 아니라 ‘국제 공용어’입니다.


단순한 회화 위주의 기초적 영어 능력이라면 조만간 기계 통번역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지만 특정 영역에서 전문적인 지위를 선점하고자 한다면 그 범용성과 양과 질 차원에서 볼 때 영어 실력은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에게 ‘여전히’ 필수적이고 ‘유용한’ 도구가 될 겁니다.


외국어는 저와 제 아이들을 포함해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공부가 쉬웠어요’라는 사람은 봤어도 ‘영어가 쉬웠다’는 한국인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는 누구에게든 심각한 도전이 될 정도로, 매우 미세한 밀리초(1/1000초) 단위의 운동 조절 능력, 고차원적인 사고력과 광범위한 기억, 장기간의 연습 및 사회문화적 체험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영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측면에서 수많은 위기 상황에 맞닥뜨려 동기를 잃게 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두뇌 과학에서 발견한 과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우리 아이에게 언제부터, 어떻게 영어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이번 편에서는 영어교육을 시작할 때 꼭 알아야 할 기본 원칙 2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외국어보다 우리말과 우리글, 즉 모국어가 우선이라는 것, 그리고 영어야말로 극히 복잡하고 정밀한 운동 능력을 요한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말, 우리글이 우선입니다
아이는 우리말을 언제부터 익히기 시작할까요? 놀랍게도 엄마 뱃속에 착상된 지 18주 이후부터라고 합니다. 청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빨리 완성되는 기관입니다.

불과 4개월 반 정도 된 태아도 양수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와 진동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만 액체를 거쳐 전달되는 말소리인 만큼 소리의 세기가 약한 자음보다는 더 높은 소리 에너지를 가진 모음을 먼저 익힙니다.


독일 라이프치히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생후 2~5일 된 프랑스 아기 30명과 독일 아기 30명의 울음소리를 음향 분석해 발표한 자료(2009년)에 따르면 모국어 습득을 위해 필수적인 언어 멜로디를 이미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배운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신생아임에도 프랑스 아기들은 프랑스어 특유의 뒤가 올라가는 억양을 따라 ‘아 앙~’ 하며 울고, 독일 아기들은 뒤가 내려가는 독일어 억양을 따라 ‘아 앙~’ 하고 울더랍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스티븐 핑커도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엄마가 사용하는 말의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고 언급했죠. 생후 평균 33시간 된 아기 80명에게 외국어 모음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안정감을 찾고자 정신없이 젖을 빨더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즉, 모국어 습득은 이미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므로 낯선 외국어에 공포감을 느끼거나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외국어 교육을 일찍 시켜도 모국어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이 급해도 일단 모국어가 우선입니다.


외국어인 영어는 ‘낯설고 무서운 소음’으로 느껴질 수 있기에 언어교육을 할 때는 아이의 현재 심리와 인지적 상황에 따른 균형 잡힌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탄탄한 모국어 실력이야말로 외국어를 배우기 위한 든든한 발판이 됩니다.

또한 모국어에는 ‘결정적 시기’가 존재하지만 외국어는 꼭 그렇지 않으니 혹시 늦더라도 염려하지 마세요. 아무리 영어가 유용한 도구여도 국어두뇌가 우선입니다.




 ->  영어는 ‘운동’입니다
10조원이 넘는 비용을 영어교육에 투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간단한 영어 대화조차 힘들어합니다. 영어를 몸으로 익히지 않고 머리로만 공부해서는 평균 0.5초 간격으로 주고받는 대화의 탁구공이 자연스레 오갈 수 없겠죠.

몇 년 전 방영된 KBS <스페셜 다큐-당신이 영어를 못하는 진짜 이유>에서 언급했듯 교실에 앉아 수영을 책으로만 익힌 아이를 물속에 내던지면 과연 수영을 할까요?

살아남을 확률이 별로 높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몸으로 수영을 많이 해본 아이가 수영을 잘합니다. ‘영어의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란 본질적으로 운동입니다. 신경학 교과서에서 언어에 대해 설명하는 장을 보면 ‘20-200-2000’ 법칙이 나옵니다. 단위는 밀리초(1/1000초)입니다. 여기에서 ‘20’은 20~80밀리초(0.02~0.08초) 만에 끝나는 자음의 지속 시간을 말합니다.

‘200’은 150~300밀리초(0.15~0.3초) 정도 지속되는 모음을 말하는데, 여기에 강세(stress)가 얹힙니다. ‘2000’은 2초 정도이니 말소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억양(intonation) 패턴의 일반적인 지속 시간입니다.
 

20-200-2000 법칙      (ms = 밀리초)
20ms(0.02~0.08초) = 자음의 지속 시간
200ms(0.15~0.3초) = 모음의 지속 시간(강세 포함)
2000ms(2초) = 억양 패턴의 일반적 지속 시간

말을 하기 위해 동원되는 근육은 자그마치 200여 개에 달합니다. 입과 혀, 목, 가슴에 있는 수많은 근육의 움직임을 정확히 조율할 수 있어야 찰나의 변화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자음으로 바뀔 수도 있는 말소리를 정확히 발성할 수 있습니다.

고로 말이란 극도로 미세한 근육 운동 조절의 결과물인 셈이죠.


아기가 두 다리로 일어서려면 오랜 기간 수천, 아니 수 만 번 넘어지며 기를 쓰고 연습해야 하는데, 훨씬 많고 섬세한 근육을 움직여야 하는 외국어를 과연 ‘운동 훈련’ 없이 잘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두뇌 말소리 처리 모델 (Hickok & Poeppel, 2007, p. 395)

문법도 운동입니다. 위 그림은 <네이처 리뷰 뉴로사이언스>에 소개된 ‘말소리 처리 두뇌’ 모형입니다. 왼쪽 그림은 사람의 두뇌를 왼편에서 바라본 것이고, 오른쪽은 오른편에서 바라본 겁니다.

왼쪽 그림에서 Ⓑ로 표시된 파란 영역은 예전에는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이 부위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적인 정보 처리입니다.

그런데 이 파란 영역의 오른쪽 구석이 바로 목(성대)과 혀와 입술의 근육에 명령을 내리는 운동 센터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오랜 기간 충분히 수련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 있듯이 ‘운동 기억으로서’ 문법을 처리하다 보면 자동적이고 자연스럽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추상적인 사고 능력이 발달하므로 얘기가 달라지지만, 영유아나 유치원생 또는 초등학생에게 명시적인 문법 교육을 강요한다면 내 몸을 움직이듯 자연스러운 영어가 아니라 뇌의 껍질(피질)로만 부자연스럽게 고민해가며 영어를 사용하게 되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이번 첫 칼럼에서는 ‘우리말과 글이 우선’이라는 것과 ‘영어는 운동’이라는 원칙 두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이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인 세부 전략에 해당하는 S.A.I.L. 학습법에 대해서 다음 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 박순의 영어두뇌 만들기 ①편 끝

 

천문학적인 비용을 영어 사교육에 투자하고 있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외국인을 만나면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절절맵니다. 그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제발 내 아이만큼은 영어로 고통받지 않길 바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영어 동요를 불러주고 좋다는 영어전집을 들입니다. 입소문난 영어 커뮤니티의 학습법도 따라해보고, 성공한 엄마표 영어 멘토들의 강의도 찾아 듣지요. 그런데 뭔가 조금 아쉽지 않던가요. ‘왜 이런 교수법이 좋은지’, ‘왜 그렇게 따라하는 게 옳은 건지’ 궁금하지 않던가요? <박순의 영어두뇌 만들기>에서는 ‘외국어로서’ 영어를 학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영어에 접근해야 하는지 신경학적 관점에서 분석했습니다. 그 첫 번째 편은 ‘영어는 운동’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Credit Info

기획
박시전 기자
박순
일러스트
이현주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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