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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영화를 읽다

무심한 듯 잔인하게

 


언젠가 남편은 시어머니에 대해 사람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서 말하는 데 선수라고 했다. 그러나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게도 잔인한 면모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가끔 시어머니와 자식들 간의 대화를 들어보면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걸 느낀다.

질긴 가족애 이면에 긴장과 사소한 말의 복수가 오가는 것이다. ‘애증’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시댁 식구들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는, 어떻게 보면 가장 객관적인 관찰자다. 그래서 이건 나만이 감지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건 남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이 든 부모님을 그렇게까지 이기고 싶으냐”고 타박을 놓으면, 남편은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장인어른께 좀 살갑게 대하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건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풀기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막장 드라마의 상투적 소재를 품위 있게 이야기하는 데 타고난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는 누군가의 죽음, 불륜, 버림받은 아이들, 특히 번번이 어긋나는 부모와 자식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감독의 영화는 웬만해선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데, 그중 <걸어도 걸어도>는 단연 걸작으로 꼽힌다. 영화는 어느 여름날,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가족들이 한데 모이면서 시작한다.

어머니를 주축으로 음식을 만들고 산소에 다녀오는 등 가족들은 축제처럼 왁자지껄한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요시오라는 청년도 준페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불편한 방문을 한다.

이쯤에서 비밀스런 사연이 소개된다. 10여 년 전 준페이는 물에 빠진 소년 요시오를 구하고 바다에 빠져 죽었던 것.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요시오를 놓아주자고 하지만,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아직 증오의 대상이 필요하다.




<걸어도 걸어도>는 1박2일간 펼쳐지는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가족극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상처받고 어긋난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충돌한다. 의사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이제 힘없는 노인이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이 불륜 상대에게 불러줬던 엔카를 애창곡으로 부른다. 딸은 여전히 철이 없는 것 같고, 고장난 욕실을 고쳐주겠다는 사위는 말뿐이다. 실업자가 된 아들은 아버지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다.

게다가 애 딸린 과부와 재혼했으니, 아들의 부모는 새 며느리가 영 못마땅하다. 영화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모였지만, 관계에 서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미워하고, 또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한편으론 초라한 상대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 말미에 이르러 아버지는 자식들을 배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설에나 보겠군.” 그러나 버스에 올라탄 료타는 “이번 설에는 오지 않아도 되겠어.

1년에 한 번이면 됐지”라고 말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부모님을, 그리고 먼 훗날 자식들을 떠나보낼 내 뒷모습을 떠올려봤다. 내가 살가운 딸이 아니고 남편이 그리 따뜻한 아들이 아니듯, 내 아이들도 부모의 기대와는 다르게 자랄지도 모른다.

원초적이고 순수하던 관계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격렬해지고 잔인해질 것을 안다. 그걸 알면서도 삶의 타이밍을 맞추기란 대단히 어렵다. 영화 속 인물들이 누군가를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듯 인간은 늘 후회하면서도 또 어떻게든 살아간다.

<걸어도 걸어도>는 “있을 때 잘하자”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가족이 완전히 화합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가족이란 불가항력의 그 무엇, ‘걸어도 걸어도’ 도달하기 힘들고 ‘떠나도 떠나도’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는지.

 

 >  신민경 씨는요…
여섯 살, 네 살배기 두 아들을 키우는 만년 초보 엄마이자 생계형 프리랜서 라이터. <스크린>, <무비위크> 등 영화잡지 기자로 일했고 지금도 틈틈이 보고 읽고 쓴다. 엄마가 행복해져야 아이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다.

Credit Info

기획
한보미 기자
신민경
일러스트
게티이미지뱅크(www.gettyimageba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