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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제왕들에게 고함

한국 드라마는 이제 따분해 미치겠다. 매번 그놈이 그놈인 양 흔해빠진 클리셰 덩어리로 시청자를 유혹한다. 이젠 뻔히 보이는 속내에 속아 넘어가는 것도 지겹다. 분명 한국 드라마는 변화가 필요하다. 시청자 입장에서 한국 드라마의 제왕들에게 고한다.

UpdatedOn December 29, 2012




겨울인지라 밤이 길어진 탓에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늘었다. 최근에는 영국 드라마 한 편에 푹 빠졌다. 한 달여 만에 10년의 시간을 따라잡느라 진땀을 뺐다. <스푹스>라는 영국 BBC3의 시리즈다. 2012년 전 세계를 사로잡은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가 영국 정보부 MI6 소속의 ‘간지’ 나는 스파이라면, <스푹스>는 MI5라는, 그러니까 미국의 CIA보다는 FBI에 가까운 스파이들을 다룬다. 이 작품은 2002년부터 2011년의 시즌 10까지 장수한 시리즈다. 이 긴 세월을 단박에 따라잡는 흥분의 시간을 뒤로하며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이러저러한 단상들을 떠올렸다. 특히 브라운관으로 돌아온 김명민이 드라마 제작에 목숨을 거는 <드라마의 제왕>을 동시에 시청하다 보니 이에 대한 생각들이 점차 깊어졌다. 장항준 감독이 극본을 맡은 <드라마의 제왕>은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에 대한 꽤 세밀한 고찰이 돋보이나 싶었다. 정말 초반부를 보면서 그랬다. 하지만 역시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 패착을 드러냈다. 이제 드라마는 드라마 제작보다는 오묘한 로맨스를 또 다른 큰 축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제작 초기의 포커스가 흐려지는 이유는 <드라마의 제왕>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청률에 따라 시시각각 궤를 달리하는 대본. 그러다 보니 한국 드라마들은 언제나 시작과 다르게 삼천포라는 샛길로 빠져버린다. 비단 이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이야기 속에서 종종 알려주듯 한국 드라마 대부분이 겪는 자가당착이다.


한국, 영국, 일본, 미국의 드라마들을 두루 섭렵하다 보니 각 나라의 드라마 제작 특성이 눈에 띄었다. 보시다시피 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생방송 진행’이란 점인데, 이에 대해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물론 이 ‘쪽’대본 현실을 개선하지 않고선 모든 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결론이 도출되긴 한다. 이 같은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드라마 제작자는 시간을 맞추고, 시청률을 높이고, 협찬 광고를 노출하기 위해 피땀을 쏟으니까 말이다. 해외 드라마들에 대한 접근이 점차 용이해지면서, 한국 드라마는 위협을 받고 있다. 너무도 비교되는 작품의 안정적 구조와 튼튼한 형식 때문이다. 언젠가 영화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는 ‘드라마는 영화의 미래’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가 제작을 맡은 시리즈가 전 세계를 휘어잡을 때쯤 한 발언이 아닌가 싶다. 그 후 미국 드라마는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하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시리즈들을 쏟아냈다. 할리우드의 명망 있는 감독 J.J. 에이브람스를 위시한 많은 감독들이 드라마 제작에 열을 올리면서 미국 드라마는 황금알을 낳는 산업으로 완전히 부각되었다. 심지어 마틴 스코세이지와 같은 위대한 감독조차 <보드워크 엠파이어>라는 시리즈에 손을 댔고, 명성 높은 마이클 만 감독도 더스틴 호프먼을 데리고 <럭>이란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국내에서도 상종가를 치는 <워킹데드>로 단박에 드라마의 제왕으로 떠올랐다.


익히 알다시피 미국 드라마의 편당 제작비는 한국 영화 한 편의 제작비를 훨씬 웃돈다. 그렇다고 ‘자본이 넘치니 그렇게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한국 드라마도 시장 구조에 비해 넘치게 많은 제작비를 들인다. 물론 그 돈이 작품 자체에 투입되기보다는 작가료와 개런티에 더 많이 쓰인다는 게 문제겠지만 말이다. 동시에 이건 영화산업에서도 항상 거듭되는 말인데, 충분한 사전 준비 기간이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제왕>을 보면 불과 2회분의 대본으로도 편성을 따낼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던가. 물론 현실이 그리 치졸하진 않을 것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다양한 소재의 부재이다. 어느 드라마를 보더라도, 현대극이든 사극이든 간에 내러티브를 끌고 나가는 중심에는 언제나 로맨스가 있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의 제왕>도 그렇고, <마의>도 그렇고, <대풍수>도 그렇다. <보고싶다>도 마찬가지며, <청담동 앨리스>도 그러하다. 이들을 분류하면 전혀 다른 장르지만, 알맹이는 다 똑같다. 시청자가 그걸 원한다고 하지만, 나처럼 원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로맨스는 분명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는 필수 요소로 존재해야 하지만, 애초 기획에서 방향을 잡은 진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 드라마를 비롯한 모든 드라마가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 비중의 경계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소재의 부각성은 전혀 달라진다.


요즘 한국의 드라마 마니아들이 영국 드라마를 최신 트렌드로 받아들이고, 푹 빠지는 이유가 있다. 영국 드라마들에서 소재의 다양성은 실로 놀랍다. 동시에 원래 이야기를 변주해내는 작가들의 솜씨가 일품이다. 일례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한 <셜록> 시리즈가 그렇다. 셜록 홈스 스토리는 진짜 뻔한 고전이다. 그런데 <셜록>은 아이폰을 비롯한 놀라운 현대 문명을 도입하며, 굉장히 모던한 셜록 홈스를 탄생시켰다. 영국 드라마 중 <화이트 채플>이란 범죄물이 있다. 이 역시 뻔해 보이는 살인 사건 수사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화이트 채플>은 ‘잭 더 리퍼’와 같은 범죄의 역사를 동시대로 회귀시키면서 전혀 다른 몰입도를 생산해낸다. 문학과의 결합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추리소설가 헤닝 만켈의 원작을 바탕으로 영국은 <왈랜더>라는 지독히도 감성적인 형사물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작품들에서도 분명 로맨스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로맨스라는 감성을 다루는 데 ‘쿨’하다. 그러니까 한국적이라 일컬을 만한 ‘신파’ 성향이 없다는 말이다. 눈물을 쏙 빼는 신파 로맨스는 분명 시청자를 몰입시키는 데는 효과적 방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작품 전체의 측면에서는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와 같은 방법론이다. <스푹스>의 경우 모든 캐릭터들에게 이러한 감정을 대입시키지만, 첩보 작전이라는 대의를 결코 거스르지 않는다.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작가는 연인을 죽음으로 내몰아버리고, 혹은 그 로맨스의 주인공 자체를 퇴출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스릴러의 큰 틀을 지켜나간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는 그 지질한 감성을 지키기 위해 대전제를 훼손시킨다. <대장금> <허준>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대의를 가진 <마의>도 그렇다. 이 드라마는 분명 비천한 신분의 주인공이 어의가 되는 대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청자의 한 명인 나는 그것에 더 집중하길 원한다. 하지만 제작진은 조승우를 중심으로 뭇 여인들을 뒤섞는다. 이건 드라마 자체의 본의를 흐리는 오류이며, 분명 내러티브 측면에서 잘못된 ‘혼음’이다. 동시에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창조해내기보다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스타성에 더 의존한다. 성공한 해외 시리즈는 무명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만 봐도 그렇다. 그는 연기력으로 셜록이란 캐릭터를 체화했고, 동시에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하지만 <마의>는 조승우가 먼저이고 마의 백광현은 두 번째다. 그러다 보니 조승우의 드라마 속 그릇된 연기는 캐릭터 자체를 망가트리고 있다. <드라마의 제왕> 김명민은 끊임없이 악을 쓰고 있지만, 드라마의 제왕 캐릭터이기보다는 유마에에 더 가깝다.


한국 드라마는 제작 및 편성 방식에서 일본 드라마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 미국과 영국이 시즌제로 드라마를 편성하는 것에 반해 일본의 경우는 분기별로 드라마를 편성한다. 한국의 경우가 이에 유사하다. 그러나 일본은 평균 11화 정도에서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에 반해 한국은 최소 16부작에서 20부작 이상으로 구성한다. 사실 확고한 기획이 아니라면 하나의 이야기를 16시간 이상 끌고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제작 방식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일본처럼 잘된 작품 혹은 이야기의 확장성이 보장되는 드라마에 한해서 일부 시즌제를 도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근래 꽤 호응을 얻었던 드라마 <골든타임>이 차기 시즌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해외의 경우는 애초부터 다음 시즌이 계획되어 있기에 배우들 또한 그 일정에 맞추어 다른 작품의 스케줄을 짠다. 배우 일정에 맞추어 드라마를 제작하는 우리네 현실에서 시즌제 드라마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국 드라마는 <드라마의 제왕>이 극명하게 보여주듯, 제작 인프라에 있어서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의 제왕들에게 고하고 싶은 건, 좀 더 새로운 드라마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방송국 편성국장쯤 되는 높으신 분들에게도 당부해야 할 말이다.


전 세계의 모든 드라마가 시청률에 목맨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시청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단호하게 방영 중인 작품에 종영을 통보한다. 제작자들에게 분명 이 방식은 위태로운 줄타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작가를 찾아나서고,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며, 새로운 배우를 물색한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시청률의 판도를 계획해나가며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언제나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매번 같은 범주 속에서 맴돈다. 그래서 시청자 입장에서는 어떤 신작이 방영되든 유사함에 의한 지루함을 맛본다. 최근 4/4분기 일본 드라마에서도 그 신선함을 맛볼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등을 연출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드라마 <고잉 마이 홈>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 드라마가 순간 시청률을 위해 매회 말도 안 되는 이벤트를 삽입하는 것에 반해, <고잉 마이 홈>은 단순한 가족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펼쳐낸다. 물론 일본에서 이 드라마는 시청률 저조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시도임이 분명해 보인다. 한 번의 실패가 있더라도 이처럼 어떤 틈새를 찾는 노력이 한국 드라마에도 있어야 한다. 스타 작가, 스타 배우에 목매지 않는 실험적인 노력 말이다. 이는 어떤 창의성에 대한 고함이다. 홍상수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보는 것, 박찬욱 감독의 음산함이 드라마에서 표출되는 것, 봉준호의 사회성이 드라마 속에 녹아드는 것. 불가능할진 몰라도 해볼 만한 시도 아니던가. 그러니까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드라마의 제왕들은 불가능한 모험의 항해를 해보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 같은 시청자가 깜짝 놀라 기절할 만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도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다려본다. 애런 소킨이 창조해낸 <뉴스룸>과 같은 극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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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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