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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단편 <유리의 도시>가 이번에는 그래픽 노블로 선보인다. 소설의 느낌은 시각적 이미지로 정확하게 번역된다.

UpdatedOn April 24, 2006

 폴오스터의 소설은 종종 인물이 각자의 내면으로 서서히 침잠하는 과정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조금쯤은 무심하고, 그래서 조금쯤은 편리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은, 문득 우연처럼 세상 사이에 난 틈을 발견한다. 일단 홀린 것처럼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육체는 상황이 이끄는 대로 좀비처럼 움직이지만, 인물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히 운동하여 수많은 질문과 그만큼 다양한 대답을 곱씹게 된다. 소설은 마음의 풍경이 되고, 오스터의 문장도 점점 사색적이고 추상적인 그 무엇이 된다.

폴 오스터의 단편집인 <뉴욕삼부작>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인 <유리의 도시> 같은 경우, 그 막막하고 암담한 전개와 무거운 독백에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도중 질식해버릴 지경이다. 주위와의 관계에서보다 주인공 퀸의 내면에서 더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소설이다. 문자를 떠나 다른 수단으로 번역될 가능성을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쉽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이미 <쥐>라는 걸작 만화를 탄생시킨 바 있는 아트 스피겔만이다. 진지한 작가들과의 공동 작업으로 그래픽 노블의 수준을 진화시키고 싶었던 그는 결국 폴 오스터의 동의를 이끌었고, <배트맨 : 원년>과 <데어데블> 삽화를 담당했던 데이비드 마추켈리, 그리고 또 한 명의 재능 있는 만화가 폴 카라식의 협조까지 얻어냈다. 2명의 예술가가 고민 끝에 얻어낸 결과물은 창의적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일은 잘못 걸려 온 전화로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걸음을 떼는 도입부. 이들은 엄격할 만큼 줄을 맞추어 늘어선 프레임들로 쓸쓸하지만 덤덤하게 평화로운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고 퀸이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그림칸의 배열은 극적으로 혼란스러워진다.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선이 굵은 그림체는 오스터의 원작 역시 기대고 있던 1950~60년대 느와르의 기운을 상기시킨다. 추상적인 문장들은 시적이며 비유적인 이미지로 정확하게 치환된다. 텍스트와 그림은 서로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만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최대치까지 시험하고 있다. 폴 오스터의 원작을 알고 있는 사람, 혹은 모르는 독자들에게도 <유리의 도시>는 충분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출간 후 저명한 만화 잡지 <코믹스 저널>에 의해 ‘세기의 만화 100선’ 중 한 편으로 선정되기도 한 작품이다. 아직까지 그래픽 노블이라는 개념이 생소한 독자들에게도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Wish List
잔인한 세상, 기이한 도시

1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1만3천원

아마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아카데미 수상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트루먼 카포티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 콜드 블러드>는 1950년대 말, 미국 캔사스 주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끈질긴 취재를 통해 얻어낸 진실을 유려하면서도 냉정한 문장에 담아낸 이 작품은, 생생한 논픽션인 동시에 위대한 문학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고통스럽게 흔들리는 인물의 심리까지 잔인할 만큼 포착해내는 카포티의 시선은, <인 콜드 블러드>를 전혀 다른 경지의 걸작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2 무라카미 하루키 <도쿄 기담집>
문학사상사, 9천5백원

하루키의 소설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는, 그가 종종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현실에 대한 감각을 놓아버리는 순간이다. 차곡차곡 쌓이는 문장 사이에서 평범하던 일상은 순식간에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된다. 5년 만에 발표하는 신작 단편집에서, 하루키는 도쿄라는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도시를 3.5차원의 어디 쯤에 툭하니 던져놓고, 예의 그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또박또박 단어를 잇는다. 언제나처럼 쉽게 읽히고, 또 언제나처럼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이다.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인지 제목부터 ‘도쿄 기담집’이다. 단, 표지 디자인은 꼭 괴담집 같다.

 

 

3 요시다 슈이치 외 <비밀>
행복한 책읽기, 8천원

<비밀>은 글쓰기를 매개로 한 게임 같은 기획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1. 아쿠타가와 상, 혹은 나오키 상 등을 수상한 젊은 작가 12명을 소집할 것. 2. 이들에게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단편 둘씩을 써내도록 할 것. 작가들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 수 있는 일상에서 짧고 비밀스러운 순간들을 읽어낸다. 간편한 분량의 글들이지만 세상의 속도를 늦추어주는 특별한 찰나처럼 여운이 긴 이야기들이다. <동경만경>의 요시다 슈이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오가와 요코 등이 예의 섬세한 문장들을 빌려주고 있다.

 

 

4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중앙, 1만5천원

그림의 경우,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술 관련 서적 대부분이 지나치게 말이 많아 작품이 품고 있는 은근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을 탈색시켜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가 천경자가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직접 써내려간 이 그림 에세이는, 글이 있지만 필요 이상의 말은 없고, 읽는 이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이해를 끌어낸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개성이 선명한 화가의 작품과, 그녀의 찬찬한 문장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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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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