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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만 있던 일요일

느지막히 일어난 오후, 창밖은 흐리고 게으른 TV는 재방송만 돌려댄다. 담배 하나 챙겨 들고 나가자, 어디든. 감성적인 서울의 네 곳.

UpdatedOn March 02, 2012



<중경삼림> 속 경찰 양조위가 사는 집 같다. 하얀 입구 앞에서 기다리면 마른 몸으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우렁각시 페이를 만날 것도 같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볕이 쏟아지는 옥상이다. 볕은 그대로 유리를 투과해 옥상상점을 비춘다. 문을 열었다. 기타를 치던 주인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기타 연주에 몰두한다. 하얀 바닥, 나무 진열장으로 꾸며진 옥상상점은 단출한 잡화점이다. 슥 돌아보면 독립 잡지도 팔고 빈티지 옷도 팔고 인디 아티스트의 작업물도 판다. 그리고 가능성을 판다. 구매자가 그림을 사고 지불한 돈으로 판매자는 사고 싶었던 것을 사는 ‘순환 프로젝트’도, ‘꿈꾸었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주는’ 일도 옥상상점에서는 가능하다. 잊기 싫은 꿈이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꿈을 그려서라도 남겨 주려는 마음에 기껍게 공간을 제공한다.
상점엔 배경음악 대신 주인의 기타 소리가 퍼진다. 사실 배경음악 대신도 아닌 것이, 그는 그저 기타 연습을 할 뿐이다. 퉁기는 기타 줄에 먼지가 튄다. 나무 선반 위에 진열된 LP를 집어 드니 눈썹이 진한 1980년대 아가씨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작은 문으로 연결된 카페 ‘녹색광선’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멋없게 달린 민무늬 커튼 사이로 좁은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을 봤다. 인디 아티스트 임진아의 작품이 자꾸 맘에 밟힌다. “지난날의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때만큼이나 괴로웠던 적이 없어요. 인생 처음 살아봐서 더딘 게 참 많네요.”
위치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57-2 문의 02-325-5478, www.oksangsangjum.com
판매품 독립 출판물, CD, 빈티지 의류·그릇, 모노 클래식·소진과 레나 등 매달 새로 입주하는
신진 아티스트  작업물




사직공원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와야 한다. 매동초등학교 앞, 얼핏 쓰러질 듯한 오두막 두 채가 나란히 있다. 그중 하나가 사직동 커피한잔이다. 커피한잔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다. 지붕에 잔뜩 올려놓은 잡동사니가 밤이 되면 이리저리 움직여 팔이 되고 다리가 될 것 같다. 옆으로 문을 밀면 테이블이 3개, 구석에는 벽난로 같은 로스팅 기계가 장난감 같은 이 집의 무게를 잡아준다. “일본에서 들여온 로스팅 기계인데 숯불이 지나가는 레일은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요.” 이곳과 꼭 어울리는 복장을 한 주인이 말한다. 그러니까 커피한잔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숯불 로스팅 기계가 있다. 숯에 불을 넣고 커피를 볶기 시작하면 몇 평 남짓한 공간에 커피 향이 취할 듯이 퍼진다.
이렇게 작고 독특한 곳에서 숯불로 로스팅한 커피를 팔려면 모른 척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자꾸 모르는 척하다 보니 작은 소리로 다투는 연인도, 혼자 와서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여자도 주인은 본체만체, 레코드판을 바꾸고 여기저기 뜯어고친다.
청승일까. 덜 녹은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담요를 덮고 나무 의자에 앉아 있기에는 난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든다. 때가 거뭇한 흰 눈에 낯익은 얼굴이 비친다. 지나간 이를 자꾸 생각하기에도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든다. 시선을 안으로 거뒀다. 덩그마니 놓여 있는 늙은 호박 둘. 쭈글쭈글하다. “지난번엔 라테 드셨는데, 이번엔 드립 커피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눈이 맑은 여주인이 내려준 엘살바도르가 부드럽게 목을 지난다. 좋다, 여기. 
위치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1-6번지 문의 02-764-6621
메뉴 핸드드립 커피 5천원, 원두 100g 8천원




올리브 오일이었다. 펠앤콜에서 처음 맛본 아이스크림 이름. 수제 아이스크림이라는데, 그럼 젤라토인가? 사장이 직접 만든다는 아이스크림은 분명히 쫀쫀한 젤라토는 아니다. 한입 맛을 봤다. 연한 올리브 향 끝에 오일리한 느낌이 입안을 꽉 채웠다. 뭔가, 뭔가 묘하다. 며칠 후 또 펠앤콜이 생각났다. 이번엔 솔티 캐러멜로 골랐다. 무척 진한 캐러멜 맛이 혀에 척 감겼다.
기네스 밀크 초콜릿, 딸기 레드 와인+사천성 후추… 기괴한 만남은 생각보다 유쾌하다. 신선하다. 다음엔 뭘로 할까. 중독의 시작이다.
몹시 추운 날, 여느 때처럼 퇴근은 늦었고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젊은 얼굴들은 하나같이 늙었다. 채워야 할 건 텅 빈 위가 아니었다. 생각나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검게 출렁이는 강을 건너고 2개의 다리를 넘었다. 오늘은 지루한 바닐라. 아니, 미친 너트가 나을까? 고민하며 노란 간판 아래로 들어섰을 때 처음 보는 이름에 맘이 끌린다. ‘초콜릿 피넛버터’. 샌프란시스코 아이스크림 장수처럼 쾌활한 사장이 시식을 권한다. 초콜릿은 진하되 끈적이지 않는다. 피넛버터가 재빨리 혀 뒤로 들러붙었다. 미세한 그래엄 쿠키는 식감을 더했다. 난 뜨거운 게 싫다. 매울 때 뜨거운 걸 먹으면 짜증이 난다. 남발하는 솔 푸드,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날의 초콜릿 피넛버터는 영혼을 달랬다. 날씨보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맘이 녹았다. 행복은 이렇게나 시시하다.
위치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08-1 문의 070-4411-1434    
메뉴 매일 바뀌는 수제 아이스크림 메뉴는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된다. 1딥 4천2백원,
1파인트(네 가지 맛) 1만2천5백원


늦은 밤, “동굴에서 봐요.” 그럼 우린 퍼브 트라이브로 모인다. 나무 계단에 한 발씩 발을 내디딜수록 푸욱푸욱 몸은 지하로 꺼진다. 두꺼운 나무 문은 방패 같다. 문은 크고 단단해서 시간도 들이지 않는다.
동굴은 전부 나무와 가죽으로 돼 있다. 경박한 조명은 하나도 없다.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스탠드, 그마저도 낡은 신문지로 감쌌다. 바닥에 중구난방으로 놓인 난로를 더듬더듬 피해 푹신한 털 소파에 비스듬히 누우면, 그제야 안도의 숨을 푹 내쉰다. 앉은 자리로 사장이 말없이 난로를 가져다 둔다. 언제나처럼 조금 단 술을 시켜놓고 회사 얘기, 남자 얘기, 여자 얘기…. 아무 말도 하기 싫을 때면 바 위의 모니터에서 1999년의 젊은 줄리아 로버츠가 입을 뻥끗댄다.
가게 한구석은 사장의 작업실이다. 가죽 공예를 한다는 사장의 책상 위에는 자르다 만 가죽 더미, 재단 도구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 사장은 바를 사이에 두고 항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어쩔 땐 인생을, 어쩔 땐 아이돌을 얘기한다. 뒷모습뿐인 남자들은 같아 보이지만 늘 다르다. 최민수 아저씨도 이따금 유령처럼 다녀간다.
사람이 별로 없어 걱정이다. 없어지진 않겠지? 슬그머니 올라앉는 뚱뚱한 고양이 달자를 무심히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이대로 아무도 안 오면 좋겠다고.
위치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410-15 지하 문의 010-9948-8440
메뉴 생맥주 2천5백원, 말리부 피나콜라다 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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