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MORE+

망할 놈의 패션 계급론

망할 놈의 패션 계급론

UpdatedOn January 31, 2012



노스페이스 계급도에 대한 기사를 ‘또’ 읽게 된 날.
모니터 한쪽엔 벤츠 여검사 보석 석방 기사가 펼쳐져 있었다. 벤츠와 샤넬이라는 타이틀로 일약 비리의 대명사가 된 여검사(30억 뇌물 수수 정치인보다 유명할걸?)와 빨강 파랑으로 나뉘어 패션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낸 노스페이스 기사 사이에서 톨스타인 베블런의 이론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유한계급론>을 통해 패션을 이렇게 정의했다. 현대사회는 신분제도가 없다. 그래서 패션은 존재한다. ‘남보다 우월함’을 증빙하기 위한 신분 표식, 그게 패션이다. 1백13년 전에 발표한 이론이다. 그중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유한계급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유한계급, the leisured classes, 요즘 말로 상위 1%. 그러니까 생산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클래스, 그럼에도 무섭게 소비할 수 있는 계층, 골수까지 돈으로 꽉 찬 태생적 부자들. 그가 어렵게 한 말들을 풀어보자면, 유한계급 언니 오빠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단다. ‘더 비싸게, 더 어렵게, 더 화려하게! 하층민(?)은 따라올 수 없도록 입어주리라. 그러므로 패션의 룰은 더욱 복잡해지고 격식은 더 엄격해지리라. 왜? 나는 특별하니까. 당신과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니까.’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유한계급의 소비 패턴을 동경하고 그 계급에 속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다. 그래서 유한계급 추종자들의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거다.

나는 백 년 묵은 이 이론이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인간은 욕망의 화신이다, 라는 생물학적 이론에 근거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그 이론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건 패션을 욕망에 근거한 ‘경제활동’으로만 봤다는 거다. 패션을 ‘소비경제’ 측면에서만 본다면, 여기에 인간 본질 중 하나인 탐욕을 더한다면 베블런의 이론은 설득력 100%다. 하지만 패션이 과연 그런가? 패션이 너와 나를 구분짓기 위해 노력하는 건 맞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너와 나를 구분짓는 건 상하 개념이 아닐 수도 있잖은가. 평행선 안에 수많은 교집합들을 만들어 서로 간의 취향을 구분짓는 행위는 아니던가? 그렇다면 패션이 경제활동으로만 대변될 수 있는 건가? 패션은 감성 소비이며, 감성 행동 아니던가. 베블런 박사의 이론을 보면 나카무라 우사기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나에게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고지를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에서 얻은 경품이다.’ 아, 이 얼마나 지치는 이론인가. 이 얼마나 불행한 사회인가. 하지만 집단의 퇴보가 집단의 진보보다 빠르다는 건 불변의 진리인 듯싶다. 내가 아무리 패션은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고, 패션은 동등한 취향 나누기라고 주장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지금 10대들이 패딩 점퍼로 상하를 구분짓는다는데 말이다. 내 어린 시절에도 프로스펙스를, 게스를 염원하는 무리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게 되풀이되며 그 위세를 더하는 건 공포다. 집단 퇴보다.

퇴보의 증거는 널렸다. 엊그제 본 기사엔 공지영의 샤넬 백 해프닝이 화려했다. 값나가는 패션 제품을 소유한다는 걸 유한계급론적으로만 해석했다는 증거다. 왼쪽이라면서 샤넬 백을 들어? 말이 돼? 난 말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공지영의 백이 샤넬이 아니었다는 우스운 해프닝으로 사건이 일단락됐지만, 찝찝하다.
‘패션 제품 = 유한계급의 허영’이라는 잣대는 중세시대 이후로 왜 무너지지 않는가. 물론 패션 마케팅의 속성이 소비자 지갑을 터는 데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일부 브랜드 제품에 가격 거품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겠다. 그리고 허영에 돈을 말아먹는 상위 1%가 패션 소비자군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도 인정하겠다. 하지만 어느 산업은 그렇지 않은가? 자선 산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게 자본주의 아닌가.
패션은 개인을 차별화하는 수단이라는 명제가 패션은 계급을 나누는 잣대라는 명제로 치환되는 순간, 시대는 1백13년 전으로 퇴보한다. 한 달에 한 번 헌혈을 하기 위해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파텍 필립 마니아 K, 자신의 땅을 기부해서 공공도서관을 짓고 있는 질 샌더 마니아 M이 2012년에 나와 함께 산다. 이건 진보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디지털 매거진

MOST POPULAR

  • 1
    인스타그램 매거진 시대
  • 2
    클래식의 정수, 미니멀한 디자인의 수동 면도기 4
  • 3
    이 자리를 빌어 '싱어게인' 작가님들께 사과드립니다
  • 4
    새로 오픈했습니다
  • 5
    크기별로 알아보는 골프 에센셜 백 4

RELATED STORIES

  • LIFE

    HAND IN HAND

    새카만 밤, 그의 곁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물건 둘.

  • INTERVIEW

    스튜디오 픽트는 호기심을 만든다

    스튜디오 픽트에겐 호기심이 주된 재료다. 할머니댁에서 보던 자개장, 이미 현대 생활과 멀어진 바로 그 ‘자개’를 해체해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공예를 탐구하고 실험적인 과정을 거쳐 현대적인 오브제를 만들고자 하는 두 작가의 호기심이 그 시작이었다.

  • INTERVIEW

    윤라희는 경계를 넘는다

    색색의 아크릴로 만든, 용도를 알지 못할 물건들. 윤라희는 조각도 설치도 도자도 그 무엇도 아닌 것들을 공예의 범주 밖에 있는 산업적인 재료로 완성한다.

  • FASHION

    EARLY SPRING

    어쩌다 하루는 벌써 봄 같기도 해서, 조금 이르게 봄옷을 꺼냈다.

  • INTERVIEW

    윤상혁은 충돌을 빚는다

    투박한 듯하지만 섬세하고, 무심한 듯하지만 정교하다. 손이 가는 대로 흙을 빚는 것 같지만 어디서 멈춰야 할지 세심하게 고민한 결과물이다. 상반된 두 가지 심성이 충돌해 윤상혁의 작품이 된다.

MORE FROM ARENA

  • FASHION

    대조와 조합

    도저히 같이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단어가 지방시의 2019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 ARTICLE

    다른 병원

    나의 일상을 달래줄, 가장 일상에 가까운 병원들을 찾았다.

  • ISSUE

    프라다 X 이종석 Chapter 1

  • REPORTS

    이상한 서울

    여섯 명의 포토그래퍼가 서울의 랜드마크를 낯선 시선으로 포착했다.

  • LIFE

    사죄하는 문화

    유튜버들의 사죄 영상이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검은 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애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유튜버들의 모습은 다른 문화권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영미권 유튜버들은 논란이 생겨도 볼 거면 보고 말 거면 말라는 태도를 취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유튜버가 사과하고, 시청자가 사과받는 문화가 정립되어 있다. 시청자는 안 보면 그만인 걸 왜 사과받길 원할까? 유튜버는 왜 사죄해야만 할까? 사죄하는 문화의 기원과 심리적 요인을 찾는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