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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남자들

빛이 바래고 꾸깃꾸깃 주름진 사진 같은 그 시절의 홍콩에는 왕가위 감독이 있었다. 그에게는 네 명의 남자가 있었고. ‘왕가위 신드롬’이 다시 시작된 2021년, 네 남자의 멋스러운 청춘도 다시 그려본다.

UpdatedOn June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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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호 본능 자극하는 눈빛

왕가위가 택한 남자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마성의 인물, 어딘가 비열하고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진득한 열기가 감도는 침사추이 ‘청킹 맨션’을 담은 영화 <중경삼림> 속 양조위. 중국으로 반환되기 이전 1990년대 홍콩은 혼란스럽고 불완전하기만 한데 양조위의 눈빛은 우연히 꿈에서 마주친 듯 비현실적으로 달콤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오른쪽 가슴팍엔 무전기를 달고 경찰모를 천천히 벗으며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 ‘페이’에게 은근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다시 달아오른 왕가위 트렌드에 맞춰 ‘마성의 영상’으로 커뮤니티를 휩쓰는 중이다. 보호 본능 자극하는 눈빛은 ‘페이’의 행동을 통해 증명됐다. 떠나버린 전 애인이 그리워 슬픔에 잠긴 채 남모르게 퇴폐적인 삶을 살던 양조위 앞에 나타난 페이는 슬픔을 지워주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집에 몰래 잠입한다. 어루만져주고 싶은 양조위의 위태로움을 대변하는 비행기 모형, 커다란 곰인형, 닳고 해진 걸레짝, 어항 속 금붕어는 남김없이 처분하고 빈자리는 페이의 물건들로 채워 넣는다. 왠지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은 남자가 사랑받는 방식이 이런 걸까. 섹시한 제복을 벗어던진 양조위의 모습은 또 어떻고. 땀에 흠뻑 젖은 새파란 체크무늬 셔츠 소매는 돌돌 말아 접어 올리고 한쪽 귀엔 무심한 듯 담배 한 개비를 꽂는다. 목과 겨드랑이 부분이 축 늘어진 흰 민소매도 결코 촌스럽지 않다. 북적대는 시장통을 헤집고 다니는 페이의 무거운 과일 바구니를 시크하게 들어 옮기는 왕조위의 팔뚝은 그 어떤 남자보다 섹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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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쓰디쓴 청춘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의 유덕화는 여전히 전설적인 터프가이로 남아 있다. 터프가이지만 순수한 사랑을 쫓아 더욱 갖고 싶게 만드는 남자, 유덕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스타일리시한 패션을 선보이지만, 유덕화의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소위 ‘꾸안꾸’ 패션을 이길 자는 없다. 과감히 시도한 핫팬츠, 빛바랜 빈티지 가죽 재킷, 땀으로 흥건한 카키색 티셔츠에 청바지(티셔츠의 배꼽 부분만 청바지에 푹 찔러 넣은 게 포인트다). 거기다 캐멀 색상 벨트까지 야무지게 매줘야 하는 법. 버스 뒷자리에 앉아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문 채 장만옥을 바라보며 유유히 떠나는 장면은 감히 레전드급이라 칭하고 싶다. 장학우가 경찰이 쏜 총에 맞는 걸 지켜본 유덕화는 장학우를 대신해 조직원을 암살하지만 결국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 신마저 완벽하다. 터프가이는 죽을 때도 쿨하고 터프하다. 장학우와의 의리를 위해 자신을 사랑하게 된 장만옥을 멀리하는 면모 또한 가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사랑보다 의리를 챙기는 남자는 신비롭고 매력적이니까. 유덕화는 유죄다. 쓰디쓴 암흑 세계를 기꺼이 짊어지며 거칠고 뜨거운 청춘에 불을 지폈고, 장만옥과의 열렬한 키스신을 선보여 많은 남성들을 외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남성들이 그를 반드시 워너비로 삼아야 하는 유덕화는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터프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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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앓고 싶은 중2병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하는 <아비정전> 속 아비 ‘장국영.’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주옥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자유로운 새처럼 사랑을 찾아 날아다니지만 결국 허무하게 끝나는 게 아비의 인생이다. 러닝타임 내내 장국영이 표현하는 아비의 불안한 심리와 고통의 감정은 여러 사람 중2병 도지게 했다.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었고 나르시시즘을 앓게 만들었다. 나 지금 외롭다고, 고독하다고 온갖 표정과 몸짓으로 외쳐대는 아비를 그려내기 위해 장국영이 만들어낸 공기는 마치 환영처럼 신비롭고 두 주먹을 말아 쥐고 걸어가는 장국영의 냉정한 등에선 상처, 고독, 사랑이 엿보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옴므 파탈 바람둥이 같은 면모는 결코 배우면 안 되지만 장국영의 쓸쓸한 뒷모습을 본다면 배우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방황하는 청춘은 쿨해 보이고 거기다 사랑을 갈구한다면 더더욱 멋져 보이는 법이기에. <아비정전>을 봤다면 다들 한 번쯤은 홀로 거울 앞에서 ‘맘보춤’을 춰봤을 터다. 시들어버린 꽃같이 아련한 장국영의 발끝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다. 상대를 유혹하는 스킬은 얼마나 탁월한지, 고뇌하는 중2병 환자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대사가 있다.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여기 같이 있고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하겠군요. 이제부터 우린 친구예요. 이건 당신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까.’ 초점 없이 흔들리는 동공과 고독한 오라, 후덥지근한 홍콩 같은 뜨거운 열정, 마지막으로 로맨틱한 멘트를 장착한다면 비로소 당신도 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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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90년대 퇴폐미

청부살인을 일삼는 고독한 킬러 황지민 역 ‘여명’의 퇴폐미는 여전히 과거로 떠나보내기 힘들다. 금성무의 통조림 파인애플엔 유효기간이 있지만 왕가위 영화엔 유효기간이 없음을 여명이 대변해줬다. 오래된 필름 사진을 줄줄이 이어 붙인 듯 늘어진 미장센에 대사는 부족하지만 <타락천사>는 우릴 여명의 멋에 취해 정신이 아른거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새카만 선글라스를 코에 살짝 얹고 멀끔하게 떨어지는 검정 재킷을 걸친 채 목에는 지금 봐도 세련된 체인 네크리스를 두른 여명.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멋스럽다. 사실 그는 한없이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탓에 자의로 결정 내리는 게 두려워 타인이 시키는 일만 묵묵히 처리하니까. 다짜고짜 식당에 들이닥쳐 무자비하게 권총을 쏘아대는 여명의 강력한 액션에는 슬픔이 담겨 있다. 청부살인업자로서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연애는 금물이라는 철학도 얼마나 매력적인가. ‘사업에 감정이 개입돼선 안 된다’며 자신을 짝사랑하는 청부살인 파트너 ‘이가흔’을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관계로서 바라보는 그의 신념은 곧 죽어도 멋지다. 본디 신념이 강하고 철학이 있으며 외모는 출중한 남자는 어딜 가나 거절당하기 어려운 법이니까. 미세한 불빛이 아른거리는 복도를 걸어가며 지나치는 여성에게 날려 보내는 냉소를 띤 미소는 우린 감히 시도조차 불가능할 만큼 매력적이다. 차가운 얼음 같은 모습이지만 은근히 챙겨주는 ‘츤데레’다. ‘가끔 고의로 그녀에게 단서를 준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나타나도록.’ 저돌적으로 들이대지 않는다. 아주 우아하고 고고하게 여지를 남긴다. 잿덩어리가 기다랗게 늘어진 담배꽁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바라보는 그의 삼백안이 바로 이 시대에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퇴폐미의 전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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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EDITOR 정소진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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