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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가 나고 자란 곳

당신을 키워낸 땅은 어디인가? 당신이 있기로 택한 곳은 어디인가? 이민 2세대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를 보며 두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한 인간에겐 그마다 발 딛고 자란 곳의 풍경이 깃들어 있다. 미나리 풋내가 뒤섞인 아칸소의 고요한 초지에 대한 이 이야기는 점점 더 빠르게 문화와 인종이 뒤섞이고 경계가 희미해져가는 세계에 도착한, 보편적인 동시에 새로운 설화다. (이 글엔 <미나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UpdatedOn March 27, 2021


사람은 자신을 키워낸 땅의 기질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 인터뷰로 만난 염혜란은 여수의 일렁이던 은빛 항구를, 그룹 몬스타엑스의 아이엠은 이스라엘 정원의 올리브 한 그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연기와 음악에는 그 일렁임과 수런거림, 바람과 냄새가 배어 있다. 나는 서울 안에서 이사만 대여섯 번 다닌 밋밋한 역사를 지닌 사람이지만,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꿈속에 등장하는 집은 늘 유년 시절 살던 북한산 밑 작은 마당이 있던 집이다. 정읍의 만석꾼 아들이었던 외할아버지는 가족 모두 빨치산에게 죽음을 당한 와중, 어린 자신을 아끼던 머슴이 볏짚 수레에 숨겨준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말년에 치매에 걸려 돌아가셨는데, 집으로 가는 길을 잃은 그는 고래등 같던 고향집을 찾고 또 찾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이 사무쳐 아직도 잠을 설친다는 엄마는 은퇴 후 종종 글을 쓰신다. 그리고 어디 한 번 보아라, 하시는데 그 문장들엔 정읍의 볕과 쌀알 익는 냄새 등이 배어 있어 웃는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할 때, 인터뷰이에게 종종 묻는다. 당신은 어디서 나고 자랐나요?

영화 <미나리>에는 미국 남부 아칸소에 터를 잡고 한국 채소를 재배해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야심을 지닌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과 거친 땅에서 가족을 지키지 못할까 근심하는 아내 모니카(한예리), 영어가 더 편한 이민 2세대 자녀들, 그리고 한국에서 고춧가루며 미나리 씨앗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있다. 이민 2세대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앨런 김이 연기한 소년 데이빗은 그를 투영한 배역이라 한다. 정이삭 감독이 그려낸 아칸소는 전원 풍경이 주는 목가적인 고요와 아름다움, 전원 생활의 첨예한 불안과 불편, 그리고 야생의 잔혹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너른 초지 너머 개울가는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 풋내가 뒤섞인 공간이기도 하다. 미국 땅에서 APRIL뿌리내려 무럭무럭 자라는 미나리밭의 정경. 그것이 정이삭 감독의 유년이자 삶을 관통해온 심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유년의 정경이 담긴 이야기를 언젠가 꼭 해야만 했으리라.

아칸소 허허벌판에 한국 고추며 배추를 심어 키워내려는 제이콥의 행위는 지극히 미국적인 동시에, 농경 사회이자 가부장제 사회였던 당대 한국 특유의 땅에 대한 애착이 뒤섞여 있다. 그런 복합성이 이민자들의 땅, 미국의 서사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땅이고 기회의 땅이었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움켜쥐려는 이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나라다. 고추와 미나리가 자라는 아칸소처럼, 이민자들이 뿌리내리고 정착한 낯선 땅. 그곳이 정이삭 감독 같은 2세대, 수많은 ‘데이빗’들의 고향이다. 문화가 뒤섞이고 인종이 뒤섞인 땅은 새로운 삶의 정경을 만들어냈고, 그곳의 이야기들은 이제 동시대에 새로이 읽힐 설화가 될 것이다.

<미나리>는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라는 많은 평에 공감한다. 동시에 <미나리>를 미국적인 영화라 명명하고 치켜세우는 이면에선 미국이란 국가에 대한 은밀한 자부심을 읽는다. 인종차별 없이 오로지 광활한 자연과만 맞서 싸우는 가족의 이야기는 개척 시대에 유럽에서 넘어온 백인의 보편적인 이주 서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트럼프식 우경화 국가에 진절머리 난 미국인들이 민주당 대통령을 뽑은 이 시점, 인종적 다양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이민자들의 국가인 미국의 기원 한 갈래를 살피는 <미나리>를 미국의 고유한 서사로 읽는 것도, 오스카 레이스에서 선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변이 있었다. 할리우드 제작사 플랜B에서 만들고 A24에서 배급한 엄연한 미국 영화인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영어가 대사의 30%에 불과하지만 작품상에 후보로 올랐고, 영어가 대사의 반도 되지 않지만 작품상을 수상했던 <바벨>을 떠올리면 이치에 맞지 않는 처사다. 한국계 미국인 배우 대니얼 대 김은 “미국 사람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격”이라고, 영화 <페어웰>의 룰루 왕 감독은 “<미나리>는 더 없이 미국적인 이야기”라며 반발했다. 이후 영국아카데미영화상(BAFTA)에서 감독상, 여우조연상, 외국어영화상 등 주요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오스카에 청신호가 켜졌지만, 어찌 됐든 미국 영화에도 여전히 외국어영화상을 주는 아이러니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렇게 묻고 싶다. 이 영화를 이민 2세대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만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으로 떠나온 제이콥과 모니카, 그리고 순자의 새로운 기원이기도 하다. 한 인간을 키워낸 땅이란 그가 물리적으로 태어난 땅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보다 강력한 의미를 지니는 건, 그가 그 자신으로 있기로 선택한 곳이다. 그러니 <미나리>는 한국 영화 <기생충>보다 아일랜드인이 브루클린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존 크로울리의 <브루클린>이나, 뉴욕에 정착하려는 폴란드 이민자의 질곡 어린 삶을 그린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에 훨씬 더 가까운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브루클린에 남기로 결심한 시얼샤 로넌의 투명하도록 단호한 얼굴과 아칸소 밭에 물을 대는 제이콥의 고집스러운 얼굴에서 같은 선택을 봤다. 영화 <미나리>가 나고 자란 곳이 미국 아칸소이듯, “서로를 구원하자”며 미국행을 택한 데이빗과 모니카, 딸 가족을 위해 멀고 먼 아칸소까지 온 순자, 그들 모두가 미국에서의 생존과 실존에 목숨을 건 이들이며, 그곳에서 땅과 삶을 개척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사실 이민 2세대가 만든 자전적 영화라는 맥락을 제거한 <미나리>는 좀 서툴고 밋밋한 영화다. 수작이라거나 연출적으로 뛰어난 영화라고 평하기엔 어렵다. 다만 클라이맥스에서는 울림이 있었다. 제이콥이 씻을 물도 밭에 대며 가까스로 수확한 채소가 담긴 창고가 불타 스러져갈 때, 농작을 반대하며 갈라서자는 결심까지 품었던 모니카는 몸을 던져 채소 상자들을 끄집어낸다. 일을 도우려다 불을 낸 순자는 넋 나간 얼굴로 터덜터덜 걷는데, 한국에서 온 할머니를 그토록 골탕 먹였던 데이빗은 울면서 순자에게 매달리며 집으로 가자 이끈다. 아칸소 허허벌판, 토네이도가 오면 날아갈까 짐부터 챙겨야 하는, 바퀴 달린 컨테이너 집으로. 창고를 태운 불과 내면에서 타오른 불에 한바탕 그을려 벌게진 얼굴로, 모든 식구가 거실에 나란히 누워 숨을 고른다.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사라졌지만 그들이 아칸소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그 장면 하나로 나는 이 영화의 모든 미숙함을 끌어 안을 수 있었다.

자신을 키운 땅,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는 진솔한 자기 고백에서 나오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미국뿐 아닌 모두가 정면에서 응시해야 할 화두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을 떠났던 한국인들처럼,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으로 온 이들을 우리는 과연 환대하고 있는가? 소원을 이뤄준다는 풍등을 초등학교에서 주워 날리다 고양 저유소 화재를 일으키고 만 이주 노동자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다지 춥지 않았던 지난겨울, 난방이 안 되는 포천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얼어 죽은 이주 노동자를 떠올린다. 결혼하러 한국에 온 지 3개월 만에 남편에게 맞아 죽은 이주 여성을, 이 순간에도 남편의 폭력에 신음하는 다문화 가정의 어린 아내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겐 한국이 꿈을 이루고 싶었던 땅이었을 것이다.

나를 키워낸 땅은 어디인가? 내가 있기로 선택한 곳은 어디인가? 나 자신을 알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질문이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또 다른 질문이 찾아온다.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 환대받았는가? 나는 이방인을 환대하는가? 한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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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예지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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