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FEATURE MORE+

성탄절에 잃었네

축복이거나 아니거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크리스마스라고 다를 것 없다. 에디터들이 축복의 밤에 잃은 것과 얻은 것을 고백한다. 담담한 어조로 솔직하게.

UpdatedOn December 22, 2020

/upload/arena/article/202012/thumb/46826-437407-sample.jpg

에어 조던 1 미드 트랙 레드 나이키 제품.

내 잘못은 아니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 신발을 훔쳤다. 세상에 신발을 훔치는 놈이 어딨겠냐 싶지만 은근히 많다. 내가 당했고 그래서 나도 훔쳤다. 신발 뺏긴 자들이 다른 사람의 신발을 뺏는다면, 이 도둑질의 순환고리를 완성한다면 언젠가는 잃어버린 내 신발이 돌아오지 않을까? 억지인 건 알지만 세상의 모든 도둑질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는 법이다. 성탄절이었다.

대학 자취촌은 어둡다. 늘 그래 왔다. 2003년에도 그랬고, 17년이 지난 지금도 축축하다. 크리스마스 온기란 북한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 같은 것. 보이지만 속할 수 없고, 알고 있지만 알 필요는 없었던 것. 우리와는 다른 얘기라고, 모임을 주도한 형이 말했다. 그 형은 매일 책을 읽는다. 나는 가끔 읽어서 형보다 아는 게 적고, 그래서 주로 얻어먹었다. 이곳에서 모르는 게 상책이라는 말은 배곯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나보다 지혜로운 형은 우리를 불렀고, 스무 살 순수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멋 좀 부렸다. 누구는 몇 번 안 입은 스웨터를 걸치고, 스웨터 안에는 흰색 셔츠도 껴입었다. 얇은 캐멀 코트를 입고 온 친구도 있었다. 나는 반년 전에 사서 고이 모셔둔 농구화를 신었다. 나이키 조던 1은 다른 농구화와는 차별된다. 신으라고 만든 신발이 아니다. 손과 뺨으로 촉감을 느끼고, 가죽과 본드의 향기를 음미하는 관상품이다. 신발이 아니고, 농구화도 아니고 조던 1 이다. 신으면 안 되는데, 특별한 날이었고 스무 살이라 멋내고 싶었다.

무리보다 뒤처져서 살금살금 걸었다. 지하 PC방에 내려갈 때도, 당구장 계단을 오를 때도 조던 1이 꺾이지 않게 조심해서 걸었다. 그리고 여느 성탄 모임이 그렇듯 우리도 술을 마셨다. 지혜로운 형의 자취방에 둘러앉아 족발을 먹으며 <스타크래프트> 중계방송을 봤고,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주제로 떠들었다. 네가 잘못했다. 아니다 네가 잘못했다는 대화가 이어졌고, 알코올에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큰 소리를 냈다. 몇 잔 더 마셨다. 화가 난 건 아니다. 스무 살이나 됐는데, 이제는 어른인데, 내년에는 군대에 가야 하는데, 이 지저분한 골목의 좁은 자취방에서 왜 큰소리 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몇 잔을 더 마시니 대충 살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낭비한 인생이 나를 징벌하고 있었다. 여기는 감옥이고, 우리는 인생을 낭비한 죄수들이며, 지혜로운 형은 방장이다. 슬프고 웃겼다. 찬바람을 쐬어야 했다. 골목길에선 크리스마스 전구가 보이지 않는다. 유흥가의 네온사인조차 비켜가는 골목, 낡은 학원 간판 아래 앉았다. 술 때문인지 바닥의 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기대자 학원 선생님들의 조악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떠올랐다. 그때 먹은 떡볶이와 김밥도 생각나고, 노트와 연필을 선물받고 학원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러다가 눈을 뜨니 발이 시렸다. 맨발로 밖에 나올 리가 없다. 그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괜찮다고 멀쩡하다고 말해도 친구들은 나를 부축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조던, 조던을 중얼거렸지만 내 겨드랑이를 붙든 동기들은 교도관이라도 된 듯 불친절했다. 그들은 나를 침대로 던졌고, 형은 아직도 <스타크래프트> 중계방송을 보았으며, 다른 애들은 맥주로 채워진 종이컵을 들고 웃었다. 다들 자기만의 방법으로 청춘을 낭비하고 있었다. 스무 살의 성탄절 중 가장 노곤했던 순간이다. 잠들면 인생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기 전 내 나이키 조던 1이 사라졌음을 깨달았고, 식은땀이 났다. 잃어버려선 안 되는 물건을 빼앗겼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신발 중 하나지만, 남들이 갖는다고 해서 나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야만 했다. 교도관의 신발을 꺾어 신고 뛰쳐나갔다. 밖에 나서자 정황이 뚜렷이 보였다. 골목은 ‘T’자 형태다. 내가 잠들었던 학원은 ‘T’ 자의 중앙 오른쪽에 위치하고, 형의 자취방은 ‘T’의 바닥 끝 넓은 길과 접하는 면에 있다. 큰길에선 내가 누워 있는 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범인은 큰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라 골목에 진입한 사람이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막힌 길에 진입했다는 것은 이곳에 적을 두었다는 뜻이며, 술 취한 성인 남성의 신발을 벗길 정도로 비위가 강한 놈임을 의미한다. 맨 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놈도 취해서 다른 취객의 신발을 벗기는 무례한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조던 1을 빼앗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놈의 방은 불이 켜져 있으리라.

불 켜진 방은 삼삼오오 모여 술 마시느라 시끄러웠다. 당시 대학가는 타과생이 합석해도 경계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 골목 끝 건물부터 가기로 했다. 끝에서부터 하나씩 훑어볼 생각이었다. 문이 닫혀 있으면 어쩔 수 없다. 지나가야지. 문을 두드리고 신발 훔쳐갔냐고 물어보는 게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나? 수상한 걸음으로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필로티 구조의 건물로 1층은 주차장이고, 2층부터 4층까지는 원룸이었다. 3층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올라갔고,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 섰다. TV 소리가 들렸다. 노크를 해야 할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두드려도 될까? 이러다 죽어버리면 어쩌지? 매너를 갖추기 위해 문에 귀를 갖다 댔다. TV 소리 너머로 여자의 얕은 교성이 들렸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고. 이렇게 낭만적인 분들이 크리스마스에 취객의 신발을 훔칠 리가 없다.

옆 건물의 2층에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왁자지껄했다. 운동 동아리 사람들이라도 모였는지 시끄러웠다. 크리스마스라서가 아니다. 여기는 시험 기간에도 고성방가가 용인되는 곳이다. 건물 입구는 허술했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웃음소리가 계단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2층에 오르자 그 방은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담배 연기와 소음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때 건장한 남학생 둘이 방을 나왔다. 그들을 보자 무심하게 3층 계단으로 향했다. 3층 주민인 것처럼 행동했다. 계단 끝까지 올랐고, 한참 뒤에 살금살금 내려왔다. 2층 방의 열린 문틈을 통해 현관 앞에 널부러진 조던 1이 보였다. 나의 조던 1 이었다. 그 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고, 떠들었고, 소리 질렀다. 클럽이 이런 분위기일까? 나는 일행인 것처럼 현관에 들어섰다 뒤돌아서서 앉았다 일어나며 조던 1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 걸어 나왔다. 품안에 조던 1을 숨기고.

내가 내 신발을 되찾았는데, 잘 못한 게 없는데 두려웠다. 쫓아올까봐.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쳐다볼까봐 또 쫓아올까봐. 재빨리 형의 자취방 건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었을 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의 조던 1. 내 것보다 더 해졌다. 그놈이 신고 뛰어다녀서 그런가. 살펴보고 냄새도 맡았지만 그건 내 조던이 아니었다. 아니 내 조던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온 누리에 축복이 내릴 수도 있고 안 내릴 수도 있었던 성탄 밤. 내 잘못은 아니었다.
EDITOR 조진혁

<에스엠라운지>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조진혁

2020년 12월호

MOST POPULAR

  • 1
    UDT 포트레이트
  • 2
    여름맞이 보디 케어
  • 3
    스트레이 키즈의 두 소년
  • 4
    JAY B는 자유롭고
  • 5
    바로 말고 차선우

RELATED STORIES

  • FEATURE

    해저 더 깊이' 마틴 자판타

    오로지 내 힘으로, 바다에 뛰어든다. 산소통도 없이 폐에 산소를 가득 담고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프리다이빙이다. 프리다이버들은 말한다. 잠수는 자유고,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는 행위라고.

  • FEATURE

    해저 더 깊이' 애덤 스턴

    오로지 내 힘으로, 바다에 뛰어든다. 산소통도 없이 폐에 산소를 가득 담고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프리다이빙이다. 프리다이버들은 말한다. 잠수는 자유고,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는 행위라고.

  • FEATURE

    왕가위의 남자들

    빛이 바래고 꾸깃꾸깃 주름진 사진 같은 그 시절의 홍콩에는 왕가위 감독이 있었다. 그에게는 네 명의 남자가 있었고. ‘왕가위 신드롬’이 다시 시작된 2021년, 네 남자의 멋스러운 청춘도 다시 그려본다.

  • FEATURE

    지금 전기차가 넘어야 할 턱들

    전 세계 반도체 수급난으로 차량 생산이 지연되고 있다. 천재지변 외에 전기차 생산량이 급증한 것도 이유로 꼽힌다. 전기차가 넘어야 할 턱은 이것만이 아니다. 미국 내 전기차 구매자의 18%가 내연기관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국내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부족한 충전 인프라가 전기차 구매의 발목을 잡는다. 지금 전기차가 넘어야 할 턱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작은 실마리를 건져본다.

  • FEATURE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세 권

    일 잘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세 권.

MORE FROM ARENA

  • FILM

    Longines X 정우성

  • FASHION

    TRAVEL MATE

    이것저것 몽땅 채워서 떠나고 싶은 듬직한 여행 가방 4.

  • CAR

    조금 특별한 에디션

    최고로 호화롭거나, 최고로 안전하거나, 최고로 감각적인 한정판 자동차들.

  • INTERVIEW

    찬혁이 하고 싶어서

    독립을 앞둔 찬혁은 자신만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이라고 했다. 갖고 싶은 것보단 쓸모 있는 물건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손수 만들었고 브랜 드 ‘세 이 투 셰’를 론칭했다.

  • FASHION

    찬열의 봄은 블루

    시트러스 향을 한가득 머금은 푸른빛 햇살이 찬연하게 일렁이는 봄의 하늘, 그 안에 눈부신 찬열의 청춘.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