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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대 유감

2020년, 세상은 변하는데 드라마는 거꾸로 간다. 방영 중인 드라마의 요지경 풍속도.

UpdatedOn June 02, 2020

<슬기로운 의사 생활> TVN

소탈한 옆집 오빠, 인간적인 동네 형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판타지에 가까운 게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 사단의 드라마다. 서민적이고 소박한 그들의 실체는 최연소 판사, 수석을 놓쳐본 적 없는 의사, 천재 바둑 프로 기사, 대통령 후보….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잘 노는 의사 5인방의 우정을 보여준다. 번듯한 엘리트도 사실 시시한 것에 웃고 떠들고 지지고 볶는 인간적인 사람들이라는 데 포인트가 있지만, 이런 방식의 동경은 오히려 신화를 강화한다. 이 세계의 계급 선망은 김은숙의 왕자님 스토리보다 교묘한 만큼 강력하다. 그렇기에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우화 같다. 먼치킨 캐릭터들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어항 같은 세계엔 풍파가 없기 때문이다. 만화 캐릭터처럼 인물을 조형하다 보니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방식도 둔할 수밖에 없는데, ‘곰과 여우의 대결’ 에피소드는 구시대적인 프레이밍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산부인과 전공의 동기인 두 의사를 대비해 일을 떠맡는 쪽을 곰에, 일을 피해가는 쪽을 여우에 비유한 이 에피소드는 둔한 여자를 곰에, 얄미운 여자를 여우에 비유하는 게으르고 지루한 메타포를 반복한다. 웅녀가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지가 언제인데 곰 여우 타령인가? 사십 줄 애 딸린 이혼남이 주인공인 마당에 여전히 첫사랑 타령에 이성 친구 속옷으로 성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면 등, 신원호, 이우정 사단이 반복해온 청춘의 클리셰에 집착하는 것 또한 퇴행적이다. 누구도 자라지 않는 세계에서는 첫사랑만이 유효하다. 그 세계는 안전하지만 닫혀 있다. ‘슬기로운 응답 시리즈’가 매번 비슷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부부의 세계> JTBC

속칭 ‘매운맛’이라 불리는 재미있는 드라마다. 시청률 또한 파죽지세다. 그런데 이 재미는 무엇에 빚지고 있는가? 이 드라마의 관심사는 오직 지선우의 고생길이다. 지선우가 모진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과정. 가부장제라는 덫에 갇혀 매질당하는 여자의 수난사는 고릿적부터 반복되어온 이야기다. 2020년, <부부의 세계>는 능력 있고 품위 있는 지선우가 결혼 한 번 잘못해 파멸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불륜 발각에 이혼까지 초고속으로 진도를 빼 해방인가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더 처절한 지옥도가 펼쳐진다. 고산이라는 지역 사회가 그 자체로 가부장 촌락이기 때문이다. 조악한 VR 연출로 지선우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는 장면은 시청자를 가해자 시점으로 데려오는 실로 끔찍한 시도이자 폭력의 전시였다. 무엇보다 보기 힘든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며 폭력의 굴레로 들어가는 지선우다. 매운맛에 더 매운맛으로 응수하는 김희애의 연기는 매 회 놀랍고, 드라마틱한 사건과 널을 뛰는 감정의 파고에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리지 못한다. 물론 현실에도 이런 일은 있을 테고, 드라마를 보며 반면교사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가 된다는 주장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단순히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과 그걸 엔터테인먼트화한다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왜 우리는 덫에 걸린 여자 이야기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부부간의 일이란 결국 일방적 가해자도 완전무결한 피해자도 성립할 수 없는 게 아닐까”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엔딩은 누굴 위한 것인가.

<화양연화: 삶이 꽃이 되는 순간> TVN

듣기 좋은 꽃 노래도 1절까지다. 꽃다웠던 ‘화양연화’도, 첫사랑도, 운동권 시절 로맨스도, 그 시절 풋풋했던 이야기도 말이다. 청순 가련한 첫사랑 여주인공이 비련의 애수를 품은 중년이 되어 나타나, 성공했지만 때 묻은 남주인공 마음속 순수를 일깨워주는 얘기는 숱하게 많았다. <화양연화>에서는 법대 남학생과 음대 여학생의 첫사랑 이야기와 중년이 되어 만난 그들의 애틋한 사연이 펼쳐진다. 어릴 적엔 정의를 추구하는 운동권이었지만 현재는 속물이 되어 부를 얻은 남자가 여전히 순수한,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궁핍한 처지의 여자를 만나 마음을 쏟지만 여자는 꼿꼿함을 잃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가난한 중년 여자는 늘 성공한 첫사랑과 재회하고, 왜 타락한 중년 남자는 첫사랑으로 순수성을 회복하려 할까? 왜 중년의 그들은 언제나 영화 <박하사탕>의 ‘나 돌아갈래’ 정서를 품고 있나? 이런 얘기는 이미 신성일과 엄앵란이 활약하던 시대에 볼 장 다 본 것 아닌가? 남녀 성 역할을 법대생과 음대생처럼 자로 잰 듯 나누는 구도도 아쉽다. 또 하나. 왜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의 아내는 늘 화려한 허영 덩어리며 배우자의 불륜을 감당해도 될 만한 윤리적 결함이 있는 걸까? 이 드라마는 슬로를 걸어 천천히 휘날리는 여주인공의 머리칼처럼 낡았다. 과거 순수했던 첫사랑에 지금의 우리가 찾는 답은 없다. 화양연화는 그 시절 화양연화로 남겨두자.

<더 킹: 영원의 군주> SBS

황제가 백마를 어루만지며 “왜 그래, 맥시무스”라고 한 순간 깨달았다. “애기야 가자!”를 외치던 김은숙 월드의 백마 탄 왕자가 진짜 왕자가 되어 나타났음을. 배우 이민호가 조선 시대 왕이 입던 곤룡포를 입고 신라 시대 왕이 쓰던 왕관을 쓰고 등장했을 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냥 왕자가 아닌 한반도의 왕 중 왕임을. 시대를 과감히 엮은 건 그렇다 쳐도, 손오공에게 씌운 머리띠마냥 꽉 껴서 두통이 오는 것 같은 저 모습은 뭘까. 방송으로 나가기 전까지 아무도 그 모습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긴 이르다. 자신이 16세기 프랑스 왕정에서 태어났다고 착각하는지 “참수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이거 참 첫맛은 풍부하고 끝 맛은 깔끔하군”이라는 <트루먼 쇼> 같은 PPL 대사를 로봇처럼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황제는 아무래도 한동안 놀림거리일 듯하다. 입헌군주제를 부활시켜 제국주의의 망령을 불러내 진짜 황제를 만들어냈을 때는 좀 더 계획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나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청률은 김은숙 작가의 모든 통속성을 눈 감고 봐주던 시청자들이 더 이상 눈 감고도 보지 못하겠다는 뜻이리라. 세상이 바뀌는데 드라마가 바뀌지 않는다면 누가 그 드라마를 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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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ILLUSTRATION 김이재

202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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