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FEATURE MORE+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베이비부머 리무버’라 불리는 재난 속에서도 노인들은 살아간다. 코로나19로 고요해진 극장가에 찾아온 노인 이야기 6편.

UpdatedOn April 30, 2020

  • 1 <모리의 정원>

    화가 모리는 울창한 정원이 있는 집에 산다. 매일 아침이면 출근하듯 정원에 나가 해가 지도록 개미 떼와 송사리, 수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작은 생태계는 해가 뜨고 지듯 부지런히 돌아가고, 30년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기인의 세계는 작지만 넓다. 어느 날 밤, 모리카즈는 아내 히데코에게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으면 어떨지 묻는다. 싫다며 손사래 치는 히데코에게 모리카즈는 말한다. “나는 지금도 더 살고 싶은걸. 사는 게 좋아.” 노인은 죽음에 가까운 존재일까, 삶에 가까운 존재일까? 많은 작품에서 노인을 죽음에 가까운 초연한 존재로 그리지만 노인은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 삶에 가깝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도 살아가는 건 여전히 아름답고, 그의 몸과 마음은 느리지만 소란히 움직인다. 노인은 사는 게 좋다. 기키 기린의 유작이다.

  • 2 <프리저베이션홀 재즈밴드>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에 50년 이상 자리한 프리저베이션 홀에는 그 세월 동안 연주해온 연주자들이 있다. 색소폰 연주자 찰리 가브리엘도 그중 한 명이다. 노인의 거친 손엔 악기 자국이, 연주한 시간이 깊게 남았다. 밴드는 재즈의 뿌리를 찾아 쿠바로 떠나고, 아바나와 산티아고에서 공연하며 재즈의 기원에 접근한다. 이 음악 다큐멘터리가 노인에 관한 이야기인 까닭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과거 푸티지 영상과 현재 라이브 영상을 교차한다. ‘프리저베이션 홀’이라는 제목처럼 음악은 기록이고 보존이자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길이고, 어른 세대엔 후세대에 음악을 전달할 책임, 그리고 계속 배워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것, 더 신선한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한 장르의 기원에 대해 탐구하고 어른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 고집스럽고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다.

  • 3 <레저 시커>

    아무리 찬란했던 생이라도 죽음은 찾아온다. 끔찍이 사랑했고 행복한 가정을 이뤘지만, 나이가 들어 치매를 앓는 남편과 시한부 질환을 앓는 아내가 자식들 몰래 캠핑카를 타고 키웨스트로 여행을 떠난다. 멀쩡하게 대화하다가도 금세 자신의 이름마저 잊고 속옷에 실례를 하는 남편이지만, 그가 한때 멀끔한 신사이자 지성을 갖춘 교수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잃지 않는 아내. 그녀는 정신이 희미해져가는 남편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그를 돌려내라고 하지만, 남편은 자신도 그를 빼앗겼다 말한다. 누가 남편에게서 그를 빼앗아간 걸까? 시한폭탄 같은 여행이지만 부부는 즐겁다. 어차피 삶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 죽음과 품위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순간을 산뜻하게 그려낸 영화다. 헬렌 미렌과 도널드 서덜랜드의 연기가 사랑스럽다.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 4 <미스터 스마일>

    원제는 <The Old Man and the Gun>으로 노인과 총이다. 수트를 갖춰 입고 중절모를 쓴 채 단정한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품에서 총을 살며시 꺼낸다. “자, 현금으로 이 가방을 채워주세요.” 점잖은 노년의 은행털이범, 포레스트 터커는 즐거워서 이 일을 한다. 총은 장전된 적도 없다. 잡힐 때마다 도망가고, 수감될 때마다 탈옥하지만 체포될 때도 웃고 있는 비범한 노인은 “이건 생계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 말한다. 일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는가? 남에게 정중하고 예의를 지키는가? 행복한가? 업종에 대한 문제만 떠나면, 일단 포레스트 터커는 단정하게 원칙을 지켜왔다. 캐릭터 무비로 일종의 제스처 같은 영화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더 선댄스 키드’로 시작해 <미스터 스마일> 미소로 고별 인사를 보낸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 5 <선생님과 길고양이>

    은퇴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교장선생이라 불리는 노인이 있다. 꼬장꼬장하고 괴팍한 성격에 고립된 노인을 누군가는 비웃고 누군가는 안쓰러워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후배가 소일거리나 하라며 준 문학 번역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문학적 견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지만 후배의 전화는 끊겨버리기 일쑤. 죽은 아내가 사랑했던 길고양이가 사라지자, 노인은 고양이를 찾아다니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가까워지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초고령화에 접어든 일본 사회의 단면을 포착한 영화로, 실제 주변에서 한두 명은 봤을 법한 강팍한 노인 캐릭터를 온기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다. 귀여운 고양이로 얼버무리려는 ‘소품’에 그치는 작품일거라 생각했다면 오해다. 상실한 것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애가 묻어 있는 일본 사회의 현주소 같은 영화다.

  • 6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

    괴짜 노인 아버지와 현실적인 아들의 불화는 늘 반복되어온 서사다. 아버지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아들은 지긋지긋이 여긴다. 이 영화에서 과거는 오래전 실종된 큰 아들의 존재다. 테일러 숍을 운영하고 스크래블 게임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이상한 유머 감각과 아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말쑥하고 태연한 얼굴 뒤엔 잃어버린 자식의 부재가 커다란 구멍처럼 뚫려 있다. 무엇을 찾고 있냐는 아들의 질문에 그는 답한다. “그 긴 세월 동안 뭘 찾고 있냐고? 난 긴 코트를 입고 걷고 걷고 걸었다. 내가 제일 두려운 게 뭔지 아니? 이걸 이해하지 못한 채로 죽는 거야.” 죽음보다 가까이에 상실과 알 수 없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래서 노인은 두렵다. 영화는 스크래블 게임의 형식을 차용하며 팬시하게 신을 조립한다. 덕택에 무겁지 않다. 아버지를 연기한 빌 나이의 시치미 떼는 연기가 매력적이다.

<에스엠라운지>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예지

2020년 05월호

MOST POPULAR

  • 1
    구글 셧다운에서 살아남기
  • 2
    어제의 이연희는 잊어
  • 3
    레드벨벳 예리 'PSYCHE' 미리보기
  • 4
    THE DANCER
  • 5
    '염혜란의 시대' 미리보기

RELATED STORIES

  • FEATURE

    재발견 말고 또 발견, 유희열

    JTBC <싱어게인>은 보석 같은 무명 가수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심사위원석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유희열이 유독 돋보였다. 그는 어떤 안목을 가졌길래, 어떻게 선택하길래 보석들을 캐내는 걸까 하고. 감각적이고 지적인 사람인 건 워낙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싱어게인>을 보면서 진작 재발견된 유희열을 또 발견하게 됐다. 그가 궁금해졌다.

  • FEATURE

    클럽하우스와 탈중앙화

    클럽하우스 접속하면 날밤 샌다고들 한다. 다른 소셜 미디어나 커뮤니티와는 달라서 그렇다. 음성 대화 방식이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그보다는 선명하게 다른 구조에서 차이가 읽힌다. 클럽하우스는 기존 소셜 미디어와 커뮤니티보다 블록체인과 더 유사하다. 중앙 시스템 대신 사용자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블록체인 구조에 목소리를 담으면 클럽하우스가 된다. 신선한 소셜 미디어의 등장을 깊이 들여다봤다.

  • FEATURE

    도시 기억하는 법

    도시의 이면을 보았다. 앞으로 더블린은 등 굽은 노인들의 뒷모습으로, 요하네스버그는 슬럼가 주민들의 표정으로, 뉴욕은 그라비티가 새겨진 지하철의 갱단들로 기억될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뉴욕, 런던, 키예프, 더블린, 도쿄 등 세계 주요 도시를 독특한 시선으로 기록한 사진가들의 책을 들췄다. 도시 사진집 7선이다.

  • FEATURE

    로봇 취업 추천서

    현대자동차는 세계 최고의 로봇 제조사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하며, 로봇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최근 몇 년 사이 로봇 공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을 돌아다니는 로봇이나 가파른 산을 타는 로봇, 조깅하는 로봇, 상품을 정리하는 로봇, 건설 현장에서 자재 운반하는 로봇 등 로봇은 산업 현장과 재해 현장, 일상에서 활동할 준비를 마쳤다. 한국 사회에 진출할 로봇들을 위해 그들의 이력서를 만들었다. 적성에 맞길 기대하며.

  • FEATURE

    재난에서 살아남기

    디지털 세계의 위협은 계속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지진, 조난, 침수, 화재 등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위협들로부터 생존할 수 있는 팁을 전한다.

MORE FROM ARENA

  • CAR

    달려야 산다

    제네시스의 디자인 정체성이 반영된 더 뉴 G70의 장점은 균형이다. 디자인과 편의성, 안락함과 역동성 모두 균형 있게 진화했다.

  • INTERVIEW

    머쉬베놈과 만났다

    오전 10시,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머쉬베놈 곁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택시 타고 왔단다. 여느 아티스트와는 다른 등장이 신선했다.

  • INTERVIEW

    몬스타엑스 아이엠 'I.M. WHAT I AM' 화보 미리보기

    몬스타엑스 아이엠, 고딕 컨셉의 화보와 진솔한 인터뷰 공개 “그룹과 어우러지면서도 나만의 색을 간직하는 것, 그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다."

  • FEATURE

    축복이거나 아니거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크리스마스라고 다를 것 없다. 에디터들이 축복의 밤에 잃은 것과 얻은 것을 고백한다. 담담한 어조로 솔직하게.

  • VIDEO

    2020 A-Awards #디스트릭트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