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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itique

이승우에게 보내는 위로

On January 27, 2020

축구만큼 유행어가 많은 스포츠 분야가 있을까. 신박한 아이디어와 유머 감각을 갖춘 해외 축구팬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더 웃긴 댓글을 남기기 위해 혈전을 벌인다. 지속적으로 비아냥의 대상이 되는 국내 선수는 이승우다. 이승우의 연관 검색어로는 ‘돼지불백’이 있다. 이승우의 미래를 비꼬는 악플 중 하나인데, 웃겨서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이승우 팀 이름은 정확히 못 써도, 돼지불백 시나리오는 정교하게 잘 쓴다. 팬들의 애증 어린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계속되는 데뷔 불발에 비난은 한 수 접어도 되겠다. 이제는 국내 팬들의 위로가 필요한 시기다.

EDITOR 조진혁

이승우가 ‘존버’하기를

얼마 전, 중등교사 임용고시생을 인터뷰했다. 노량진 고시원에서 고군분투하는 친구였다. 제일 위로가 되는 말이 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못해도 괜찮다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가족만이 해줄 수 있는 격려랄까? 못해도 된다니. 그야말로 궁극의 응원이다. 지금 그 말을 해주고 싶은 축구선수가 있다. 이승우다. 지난여름 이적 시장에서 이승우는 “뛰기 위해서” 벨기에의 중위권 클럽 신트-트라위던을 선택했다. 팬 반응도 ‘이제 정신 차렸다’라는 식으로 꽤 따뜻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시궁창으로 변했다. ‘대장 놀이’를 할 것 같았던 팀에서 이승우는 지금까지 단 1초도 출전하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 브라이스 감독(해임)은 이승우의 훈련 태도를 꼬집었고, 클럽 내 정치의 희생양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양한 정보들 사이에서 교집합이 없어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를 보는 기분이다. 1950년 발표된 영화인데 살인 사건을 둘러싼 혐의자들(심지어 원혼까지 등장한다)이 차례로 나와 저마다 주장을 해대곤 이야기가 끝난다. 어쨌든 팩트는 하나다. 지금 이승우는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다.

하늘을 날던 스타가 땅으로 떨어졌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온라인 댓글이 몰려들었다. 먹잇감을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과거 언행을 들춰서 이래서 저래서 안 된다며 이승우를 깎아내렸다. 급기야 미래의 예능 대본들이 등장했다. ‘돼지불백’ ‘복면가왕’ 등 이승우를 비웃는 조롱이 번졌다. 지금 온라인상에서는 조롱이 또 다른 조롱으로 번지는 ‘대환장 조롱 파티’가 한창이다. 자신감이 장점이던 이승우조차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공개로 돌렸다. 국내 매니지먼트사는 법적 조치를 암시했다. 물론 조롱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온라인 마녀사냥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는 누구나 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찍어서 영혼까지 탈탈 턴다. ‘절대 레전드’ 홍명보도 한 방에 날렸다. 이승우쯤이야 아주 쉬운 대상이다.

나는 이승우를 좋아한다. 친인척 관계도 아니고 개인적 팬도 아니다. 뭐랄까,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찬찬히 구경하고 있으면 되게 재미있는 선수라서 즐겁다. 국내 축구에서 이승우는 예외적 존재다. 소속 팀의 실적이 미미하면서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FIFA 월드컵과 AFC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두 메이저 대회를 모두 경험한 축구선수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심지어 이승우는 태극 마크를 달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재주가 있다. 2014년 한일전 60m 드리블 골,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결승전의 선제골 등이다. 광고판에 킥을 날리고, 튀는 컬러로 염색하고, A대표팀 감독 뒤에서 물병을 걷어차는 행동도 좋든 싫든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스타 본능’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한국 축구라면 이런 개성파 한 명 정도 가질 여유가 있어도 괜찮다. 마구 난도질하기에는 대상이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1998년생 이승우는 올해로 21세다. 초등학생 때 바르셀로나의 선택을 받아 언론에 소개되었고, 중·고등학생 나이에 이미 인지도 하나만큼은 전국구였다. 이승우를 안 지가 오래된 탓에 우리는 ‘그런데 이승우는 아직도?’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진다. 2019년 현재 이승우는 프로 3년 차 선수다. 통상적으로 그 정도 경력자는 신인 또는 영플레이어로 분류된다.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영플레이어’ 부문도 23세 이하 선수가 대상이다. 만약 지금 이승우가 K리그에서 뛴다면, 훈련할 때 볼을 잔뜩 채운 커다란 백을 들고 다녀야 한다. 21세 선수들 대부분 그렇게 지낸다. 경력의 속도가 10대 때부터 너무 빨랐던 것이다. 이제 겨우 규정 속도 범위로 들어왔는데, 그게 마치 엔진에 불이 나서 감속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21세 선수는 여전히 배울 게 많고 앞으로 성장해야 할 단계다.

물론 조롱의 이유도 잘 안다. 프로로서 실적이 없으니 ‘King is back’이 ‘돼지불백’으로 변주되어도 반론할 구석이 마땅치 않다. 조롱의 멱살이라도 잡으려면 일단 이승우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프로 축구선수이므로 가치 입증 외에는 답이 없다. 바르셀로나 유소년 출신이라는 계급장은 과거지사에 불과하다. 지금 이승우는 벨기에 리그 중하위권 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선수다. 그게 뼈아픈 동시에 인정해야 할 팩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팩트는 이승우 본인이 분명한 재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남은 시간이 창창하다는 점이다.

사실 “못해도 괜찮아”라는 위로는 이승우에게 적합하지 않다. 축구 세상에는 ‘못하는 자’를 위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2019년 지금은 이승우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포기하기에 아직 어리고 조롱당하기에 재능이 아깝기 때문이다.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이승우가 편안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버텼으면 좋겠다. 시쳇말로 ‘존버’해주길 바란다. 지금 이승우는 그라운드 바깥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주눅 들거나 분노할 시간이 없다. 그라운드 안에서 쏟아야 할 노력이 너무 많은 시기라서 그렇다. 지금도 한국 축구는 월드컵에서 1승이 버겁다. 소위 축구 변방이다. 그런 곳에서 이승우 같은 재능이 나오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아니다. 그런 재목은 땅에 패대기쳐 두들겨 패기보다 축구선수로서 대중을 즐겁게 하는 편이 훨씬 어울린다.

현장에서 이승우를 만날 때마다 정신력이 독보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10대 때부터 항상 자신감에 넘쳤다. 2017년 FIFA U20 월드컵 16강에서 탈락한 직후, 공동취재 구역에서 선수들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갔다. 이승우는 달랐다. 팀의 에이스로서 제일 분한 표정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이승우는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고개 숙이면 사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초식인간’이 늘어나는 세상에 우리에게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나이도 필요하다. 못해도 좋으니 이승우가 주눅 들지 말았으면 한다. 당당했던 모습을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출전 소식을 알려주면 좋고, 그라운드에서 다시 활약해주면 더 행복하겠다.

WORDS 홍재민(축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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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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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민(축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