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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연의 삶에 존재하는 것들

On May 10, 2019

베를린, 연기, 요가. 세 단어로 자신을 설명하는 배우 진서연은 명료하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시어서커 소재 수트는 모이아, 검은색 꼬임 슬리퍼는 르비에르, 조형적인 이어링은 1064스튜디오 제품.

 

영화 <독전>이 개봉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왜 빨리 다음을 보여주지 않느냐는 말에 배우 진서연은 굳건했다. 다음을 기다리느라 우울함에 빠지는 과거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는 것보다 좋은 작품을 만날 때까지 천천히 내공을 쌓는 것이 그녀가 택한 방식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녀와 연기보다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난생처음으로 해외에서 사는 데다 아이가 생기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마주하고 있지만,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녀의 일상은 빠르게 흘러갈 것도 없고, 화려하게 드러내 보일 것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베를린에 산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2년 됐어요.

영화 <독전>을 찍을 때부터 살았네요?
그렇죠. 남편이 베를린에서 회사를 다녀서 영화 찍을 때도 집이 베를린에 있었어요.

누구나 낯선 환경에서 살아야 할 때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는데요, 베를린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어떤 감정이었나요?
저는 예전부터 뭔가를 처음 시도할 때 두려움이 없었어요. 이번에도 기대나 설렘이 컸죠. 너무 신난다? 하하. 사실 어릴 때부터 한국과 안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요구하는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서요. 그런 점에서 베를린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살아보니 어때요?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요.
좋아요. 한국에서는 밖을 나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데, 그곳은 불편한 게 없어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남한테 관심이 없어요. 슬리퍼 신고 나가도 아무도 안 쳐다봐서 편해요.

단순히 해외가 아니라 베를린이라서 더 좋은 점이 있어요?
우리는 환경을 생각하자고 애써 떠드는데, 베를린 사람들은 몸소 실천해요. 마트에 장바구니를 가져가고, 커피를 살 때 텀블러를 사용하고, 테이크아웃 음식도 담아갈 도시락 통을 준비해요. 심지어 마트에 가서 비닐봉지 하나 산다고 하면 ‘왜 장바구니 안 가져왔어?’라는 시선으로 쳐다봐요. 그런 게 좋아요. 그리고 멋 부릴 필요가 없는 것도 좋아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점이 있어요. 베를린이 패션의 도시고, 힙하고, 아티스트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 패션과 전혀 상관없는 도시예요. 아무도 옷에 신경을 안 써요. 꾸며봤자 쳐다보지 않거든요. 화려하고 좋은 숍에 가서 큰돈을 쓰는 대신, 좋아하는 맥주 하나씩 사 들고 공원에 가서 사람들과 만나거나 쉬거나 책 보거나 하는 게 이곳의 삶이에요.

서울에서도 그러한 삶을 추구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래서 더 쉽고 편하게 적응하고 있어요. 그래도 처음 갈 때는 나름 멋있는 수트랑 구두를 모두 챙겼는데, 딱 한 번 입었어요. 안 그래도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삶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더 제대로 실천하고 있어요.

사는 곳이 바뀐 것 외에도 얼마 전에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었어요. 부모가 되었어요. 어떤 점에서 가장 많이 달라졌나요?
원래는 집이 갤러리 같았어요. 물건이나 가구도 많지 않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가족이 한 명 늘면서 피치 못하게 꼭 있어야 하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런 것들은 최대한 빌려서 쓰고 있는데, 어쨌든 짐이 많이 늘었어요.

 

베이지 리넨 소재의 세트업 스커트 수트는 르917, 골드 후프 이어링은 헤이 제품.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 저를 소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적으로도 변화가 있나요?
아기를 낳기 전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에요. ‘웃기고 있네’라는 거죠. 지금 맞닥뜨린 현실이 진짜 전장 같아요. 1분 1초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영화 촬영 3~4개월 하면 너무 힘들어서 살도 빠지고 한 달은 쉬어야 회복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이라면 1백 번도 하겠어요. 그동안 삶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서 산 것 같아요. 진짜 어렵고 힘든 건 지금부터인데 말이죠. 한 생명을 돌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어떤 부모가 되고 싶나요?
저는 자기애가 강하거든요. 남편도 그렇고요. 그래서 애도 완벽하게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려고요. 하나의 완벽한 존재인데 제가 관여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러지 마, 저러지 마’라는 식의 명령은 절대 안 해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주겠지만 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하는 거죠.

요즘 아기와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해요?
4개월밖에 안 되어서 외계어밖에 안 해요. ‘아끄끄’ ‘아깡깡’ 이런 말만 해요. 하하. 평소에 중저음이라 도나 레 정도 톤으로 말을 했다면, 아기와 대화를 할 때는 시까지 올라가요.

인스타그램을 보니까 베를린, 액트리스(배우), 요기니(요가인)라는 단어로 자신을 설명했더라고요. 사는 곳과 직업만큼 요가가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걸까요?
너무 중요하죠. 모든 배우들이 그렇겠지만 쉬고 있으면 슬럼프가 와요. 영화 <독전>에 출연하기 전이었어요. 쉰 지 2~3년 됐는데 다음 작품은 없고, 너무 우울하고 잠도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요가를 시작했어요. 처음 하는 날 펑펑 울었어요. 내가 나를 치유하고 보살펴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요가에 빠져서 지금까지 수련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빈야사를 하다가 지금은 아슈탕가를 하거든요. 아슈탕가는 온전히 집중해서 혼자 할 수 있는 수련법이에요. 감정 조절이 안 될 때마다 요가를 하면 진정돼요. 그래서 많이 침착해지고 치유됐어요. 제 인생에서 요가는 빼놓을 수 없어요.

배우로서의 삶은 어떻게 견지하고 있나요? 영화 <독전> 이후 작품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은데요.
오랜만에 찾아온 좋은 기회고 상도 많이 받아서 마음이 급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급하지도 않아요. 빨리 다음 작품을 안 하면 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저를 안 찾으면 거기까지인 거고요. 그런데 자신감은 있어요.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 90% 남아 있다는 거요.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 들어오는 작품을 해치우듯 저를 소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진짜 좋은 작품에 제가 잘할 수 있는 캐릭터가 들어오면 그 때 연기하고 싶어요.

다음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분위기의 작품을 하고 싶어요?
로맨틱 코미디나 휴먼 드라마요. <독전>처럼 캐릭터가 강하고 센 건 만들어내면 되거든요. 그런데 일상적인 스토리로 흘러가는 작품은 내면에 축적된 것이 있어야 해요. 평소에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가 공상이고, 그래서 스스로 스토리 위주 작품에 강하다고 생각해요. 연기로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고요.

에세이나 극본도 쓰고 있는데, 주로 일상성이 강한 작품인가요?
아직 끝맺음을 못해서 작품이라고 할 수 없어요.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는데, 완성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작가나 연출자는 진짜 천재가 아니면 못할 것 같아요. 에세이는 주로 제 생각을 일기처럼 쓰는 편이고, 극본은 꿈에 나온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어요. 장르로 치면 SF나 판타지죠.

언제부터 글을 썼어요?
제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을 못했어요. 너무 심하게 내성적이어서요. 그런데 말을 못하면 다른 감각이 발달하거든요. 그때부터 제 생각이나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일기로 썼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기 검사할 때 제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는 게 너무 창피하고 싫은 거예요. 그때부터 내 이야기를 나무나 다른 물건에 대입해서 글을 썼어요. 그게 지금 쓰는 글의 시작이었어요.

작가가 아닌 배우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배우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어렸을 때 말을 못하고 글로만 쌓아둔 것을 연기하면서 많이 치유받았어요.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묵혀뒀던 감정을 다 풀어버리는 게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 같아요. 연기를 하고 나면 지치는 게 아니라 후련해요.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요.

요즘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기가 잠드는 저녁 9시가 되면 오롯이 저의 시간이 찾아와요. 그때 삶에 대해 생각해요. 여태까지 힘들다고 투정부렸던 것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삶을 대하는 자세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변했어요.

그런데 혹시 서울로 다시 돌아와 살 생각은 없나요?
집 주변으로 사방 1,000m는 돔을 설치할 수 있다는 조건이라면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공기거든요. 집에서 창문 열고 햇빛 보는 거 좋아하는데 서울에선 그걸 못하니까 너무 힘들어요. SF 영화처럼 저만의 기지를 만들 수 있다면, 서울로 돌아갈 것 같아요.

롱 베스트와 트임 스커트는 모두 3.1 필립 림, 실버 후프 이어링과 레이어드 실버 링은 모두 플로우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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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셔츠와 드롭 비대칭 이어링은 모두 지방시, 베이지 팬츠는 르917, 카키 컬러 벨벳 스틸레토 힐은 지미추 제품.

베를린, 연기, 요가. 세 단어로 자신을 설명하는 배우 진서연은 명료하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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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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