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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의 힘

영화 <집의 시간들>로 첫 장편 다큐멘터리를 선보인 라야의 세계는 가만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UpdatedOn December 2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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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시간들>은 서울 강동구의 오래된 아파트, 둔촌주공아파트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러닝 타임은 72분.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파트 거주민 열세 명의 목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음, 아파트 키만큼 자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등이 흐를 뿐이다. 그동안 카메라 앵글은 고요히 움직인다. 가족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거실과 부엌, 손때 묻은 가구, 공들여 붙인 욕실의 타일 등을 차례로 비추다 야외로 나아간다. 단지의 산책로, 숨은 오솔길,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널따란 녹지, 놀이터와 주차장까지. <집의 시간들>의 주연은 집이다. 누군가의 집이고, 일상이었던 둔촌주공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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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주공아파트는 1980년대에 준공된, 무려 1백43개 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단지다. 1999년부터 이미 재개발 논의가 시작된 이 아파트는 현재, 주민 이주가 마무리되고 철거 중이다. <아레나>는 지난 2018년 1월호 지면에 곧 사라질 둔촌주공아파트의 이야기를 기록한 독립 출판물이자 프로젝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이하 <안녕, 둔촌)를 다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가 펴낸 책이다. 라야의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은 <안녕, 둔촌>에 뿌리를 둔다. “2015년부터 <가정방문>이라는 영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누군가의 가정을 방문하여 찍었습니다. 집 구경하길 좋아하거든요. 재미있잖아요. 사람마다 참 다른 모습으로 살거든요. 그러다 당시 진행되던 <안녕, 둔촌> 프로젝트를 보고 이인규의 집인 둔촌주공아파트를 촬영하고 싶어져서 그에게 연락했어요.”

 

<집의 시간들>은 라야의 ‘가정 방문 요청’을 이인규가 받아들여 라야에게 둔촌주공아파트의 <가정방문> 시리즈 작업을 권하면서 시작됐다. “2016년 4월에 영화를 위한 인터뷰이들을 모집했습니다. 5월에는 인터뷰만 했고요. 각 가정의 내부를 담는 촬영은 마지막으로 진행했습니다. 꼭 영화로 만들어 개봉하고 싶었어요. 바람은 그랬죠. 2016년 8월부터 텀블벅을 통해 후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라질 집에 대한 기록 <안녕, 둔촌×가정방문>’이라는 제목으로요.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이렇게 개봉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텀블벅으로 후원받아 제작된 <집의 시간들>은 이후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되었고, 상상마당이 배급사로 나서면서 정식으로 극장에 걸렸다. <집의 시간들>은 서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여느 다큐멘터리처럼 인과를 좇는 방식도 아니다. 

“일반 다큐멘터리와 같이 1980년대 준공된 한국 아파트의 뿌리부터 다룰 생각도 해봤습니다. 둔촌주공아파트가 가진 의미를 자세히 살피자면 그런 방식이 필요하니까요. 욕심나긴 했어요. 그런데 결국 단출한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만 담기로 한 거죠. 그게 이 공간이 지닌 ‘집으로서의 이야기’였습니다.” 

 

<집의 시간들>에서 라야의 카메라는 아파트가 들려주는 말들을 가만히 좇는다. 오래도록 붙박인 사람이, 거리를 약간 두고 관조하는 시선으로. 이곳에 묻은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이. “잠시 머무르며 관찰할 기회가 있었어요.

<안녕, 둔촌>을 기획한 이인규가 추석 연휴 동안 머무르며 촬영해도 좋다면서 집을 내어주었거든요. 그때 이곳과 많이 가까워졌어요. 외부인으로서는 알 수 없던 것들을 보고 느꼈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느 동과 동 사이에 난 길을 원경으로 훑는 신도 이때 찍었습니다. <집의 시간들>에 실린 촬영분 중 가장 먼저 담은 장면이죠.”

라야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적당한 거리감’이다. 라야는 무엇이든 적당히 떨어져서 관조하고,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잠실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빌딩, 아파트, 산책로를 담아낸 <산책론>과 뮤지션 이랑의 뮤직비디오 <신의 놀이> 그리고 <가정방문>을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완성했다. 

“저에겐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방식이에요. 오래전부터 원경을 좋아했고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거리를 두고,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멀리서 보는 걸 좋아합니다. 사람을 담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담아내기를 선택해요.”

<집의 시간들>은 마냥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게 순진하지만은 않다. 우리에게 집은 터전이고 기억이며 삶이지만 곧 자본이라는 것, 원주민 사이에 스며들지 못한 이주민의 말들도 담겼다. ‘집’을 주연으로 삼겠다는 것 이외의 의도나 이슈에 관한 시선으로부터도 한 걸음 떨어져 있다. <집의 시간들>의 주연이, 그곳의 이야기를 들려준 주민들도,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라는 이슈도 아닌, 온전히 ‘집’일 수 있었던 건 라야의 가만하고 고요한 시선 때문이다. 말하고 표현하기 바쁜 세상에서 감독 라야가 택한 관조의 힘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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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두윤종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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