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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의 여자들

On December 03, 2018 0

매년 10월 초, 런던 그리고 전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벤트인 프리즈 아트 페어. 이번 프리즈 위크는 ‘여자’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10월에 런던을 찾는다면 리젠트 파크를 가야 한다. 매년 10월 영국의 현대미술 매거진 <프리즈(Frieze)>의 발행인 매튜 슬로토버와 어맨더 샤프가 2000년 창설한 프리즈 아트 페어가 열리기 때문이다. 프리즈 위크가 되면 공원 양쪽으로 컨템퍼러리 아트를 중심으로 프리즈 런던과 21세기 이전의 고대 미술부터 현대미술을 폭넓게 아우르는 프리즈 마스터스 텐트가 동시에 들어서고 공원은 예술 애호가들로 가득 들어찬다. 만약 40파운드에 육박하는 티켓을 구입하고 싶지 않다면, 여느 평범한 날처럼 리젠트 파크를 산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런던의 크고 작은 공원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공원으로 꼽히는 리젠트 파크 곳곳에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조각품들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품들을 둘러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아트 페어를 찾은 사람들을 살피는 일이다. 어느 아트 페어를 가나 대개 비슷하다. 방금 런웨이에서 뛰어 내려온 것 같은 패션 피플, 오프 화이트로 무장한 힙스터, 한 손에는 샴페인을 든 채 유유자적 박람회장을 거니는 컬렉터, 예술을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는 학생들. 하지만 이번 프리즈는 공원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영국 매거진 <가디언>의 분석처럼 브렉시트를 6개월 앞둔 시점이라는 시기적 특성 때문인지 다른 아트 페어에 비해 친근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10세 이하 아이들이 우르스 피셔와 리우 웨이의 설치 작품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소 활기찬 장면과 방금 러닝을 마친 게 분명한 운동복 차림의 커플 등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작품보다도 더 휘황찬란한 옷차림의 사람들 없이도 이번 프리즈 아트 페어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맨 레이의 조각과 사진, 윌리엄 틸리어의 몽환적인 페인팅, 폴 매카시의 재기 발랄(변태적인) 조각, 리지아 파페의 흑백 판화, 이우환과 박서보의 단색화, 양혜규의 블라인드 설치 작품 등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하루에 둘러볼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다. 그만큼 다채롭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즐비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인 것은 젠더 이슈였다.

프리즈 마스터스 텐트 안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 역시 아네그레트 졸타우의 ‘sutured and sewn’이었다. 여성과 남성, 늙은 여성과 젊은 여성의 사진을 섞어내는 방식의 ‘사진 깁기’ 연작으로 잘 알려진 작가의 자화상은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 강렬한 힘이 있었다. 아네그레트 졸타우가 온화하게 화두를 던진다면, 세라 루커스는 방법론만큼은 그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가장 핫한 작가 중 한 명답게 동그란 다이제스티브 쿠키 두 개와 우유병으로 만든 페니스를 단 남자의 누드 사진, 두 남녀가 엉켜 있는 듯 물컹한 살덩이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작품 앞엔 아이폰을 치켜든 사람들이 북적였다.

예술에서 여성의 몸에 부여된 역할에 의문을 품은 작가이자 세라 루커스의 영적 대모라고 불리는 헬렌 채드윅의 작품들 역시 프리즈 아트 페어 한편에 자리했다. 헬렌 채드윅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었지만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것은 역시 대표작 ‘Piss Flower’였다. 작품명 그대로 실제 남성과 여성이 각각 눈밭에서 소변을 보고 그 때문에 생긴 구멍을 그대로 캐스팅하여 만든 기이한 형상의 조각 시리즈 말이다. 남자의 소변을 꽃잎, 여성의 소변을 꽃술로 두어 성적 상징의 역전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실제로 마주하면 (과정과는 달리) 고풍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그런가 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티스트 베르니 시얼의 작품은 사진에 별로 흥미가 없는 나조차도 한참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작가가 무릎을 꿇은 채 천천히 몸에 하얀 가루를 끼얹는 순간을 포착한 모습은 마치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밖에도 두 여성이 서로 팔다리를 찌르는 다소 잔인하면서도 서글픔이 느껴지는 페인팅을 선보인 페니 고링의 ‘Amelia Paintings’, 여성의 성기를 슬롯 코인 머신과 결합한 이라크 출신의 화가 히비 캐러만의 작품 ‘Pussy Donation Box’ 등 페어 곳곳에서 지금 예술계를 비롯한 사회에서 제기되는 성적 담론,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압도적인 경험을 선사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시기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리스키의 페인팅이었다. 여류 화가에게는 정물화나 초상화만 허락되던 시대에 강인한 여성을 주제로 다소 폭력적인 장면을 그려냈던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인 그녀는 실제 작품을 주문한 고객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생각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프리즈 아트 페어는 그녀의 편지와 꼭 닮아 있었다.

매년 10월 초, 런던 그리고 전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벤트인 프리즈 아트 페어. 이번 프리즈 위크는 ‘여자’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Credit Info

EDITOR
서동현
WORDS
권민지(프리랜스 에디터)
PHOTOGRAPHY
Linda Nylind(Courtesy of Linda Nylind/Frieze), Mark Blower(Courtesy of Mark Blower/Frieze)

2018년 11월호

이달의 목차
EDITOR
서동현
WORDS
권민지(프리랜스 에디터)
PHOTOGRAPHY
Linda Nylind(Courtesy of Linda Nylind/Frieze), Mark Blower(Courtesy of Mark Blower/Fri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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