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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itique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

서구화, 근대화,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타의적으로 만들어진 시대의 빗장을 열어젖혀야 한다는 것을 <미스터 션샤인>이 알려줬다.

UpdatedOn November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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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날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은 그토록 심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게 마지막 운을 떼었다. 어쩌면 이 끝맺음은 김은숙 작가가 결국 하고 싶었던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신의 연도가 1948년이 아닌 1919년인 것도 꽤나 큰 울림을 남겼다. 김은숙 작가는 이 어려운 걸 또 해냈다.

몇몇 고증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듯이 한반도를 배경으로 구한말에서 해방기까지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게다가 이 시대에 일어난 사건과 결말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다채롭게 생산된 우화나 풍속 따위도 없다. 오롯이 슬픔. 그래서 충무로조차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대해서 오랫동안 비관적이었다. 이 서사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저 뻔한 애국주의에 그치고 만다는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우리 한 가족의 이야기일 수도 있기에 이 상자를 열기엔 매우 큰 담력이 필요하다. 도무지 ‘행복’이라는 시퀀스를 이루어낼 수 없는 이 어두운 상자를 김은숙 작가는 담덕히 열어젖혔다. 그리고 고애신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며 ‘S’가 ‘Sad ending’만 있는 것이 아니라 ‘Sunshine’과 ‘Star’도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서구 열강의 서세동점으로 시작된 19세기 이래, 서양의 근대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으로 시작된 시간 편향은 갖가지 조급증과 강박관념을 낳았다. 우리를 불행한 자기 부정의 늪으로 밀어 넣으며 자위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개인사를 하나하나 양파 껍질 벗기듯이 찾아 들어가다 보면 결국 기억의 한편에 고이 숨어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처럼, 김은숙 작가의 이번 시도는 날이 좋든, 날이 좋지 않든, 날이 적당하든, 모든 날에는 사랑과 낭만이 있다고 보여준 눈부신 마당극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1900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그린 드라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이전 이야기다. 그러니까 <동주> <해어화> <밀정> <덕혜옹주> <암살>과 같은 시대의 맥락이라는 통념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는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제강점기’의 시선보다는,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사회로 변화하는 ‘개화기’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조금 덜 불편할 뿐만 아니라 시의성 면에서도 더욱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대한제국의 근대화 수준은 세계 열강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미스터 션샤인>은 근대의 흐름과 최대한 발걸음을 맞추고자 하였다.

사건의 발단이 점등식 거리에서 시작된 것도 좋았다. 1900년 4월 10일이 되던 때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리는 곳이라는 의미의 종로 운종가(雲從街)에 가로등 3개를 세우면서 시작된 점등식은 아직도 우리에게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어디쯤에만 존재했던 고종이 안간힘을 써가며 밝힌 불꽃이었다. 1899년 한성에 개통된 전차는 당시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첨단 문명의 상징이었다. 한성에 머무르던 세계 각국의 주한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전차는 큰 화제가 될 정도였다. 아버지와 달리 수명이 다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시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 국가를 꿈꿨다. 그래서 고종이 나라를 지칭할 때 ‘국가’ 대신 ‘민국’을 사용한 이유도 근대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가가 아닌 ‘백성’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국호 ‘대한민국’은 고종이 직접 지은 이름 ‘대한제국’과 그가 사용한 ‘민국’을 합해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국내 설문조사에서조차 한국사 중 ‘가야’보다도 아래로 인식되는 국가다. 우리가 누리는 근대 유산의 뿌리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도 말이다. 이만큼 한국 근현대사는 중간 교두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역사가들은 근대의 시작을 ‘개항’으로 삼는다. 이 중심에 보통 ‘흥선대원군’을 화두로 내세우지만 김은숙은 로맨틱하게 미국인 유진 초이를 내세워 그의 논리와 감정, 그리고 사랑으로 전근대와 근대를 이어주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이야기는 이때 발생되는 모순과 혼선, 그리고 새롭게 형성되는 문화의 하모니를 변주한다. 그래서 을미사변과 같은 역사적 비중이 큰 사건은 단 몇 마디로 무심하게 넘겨버리고 오히려 화려한 점등식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시끌벅적 모여든 거리, 종로의 전차, 불란서 제과의 무지개 카스테라와 눈깔사탕, 호텔 글로리의 가베,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기차, 신식 학당에 다니며 ‘LOVE’를 소망하는 소녀, 개화기 의복과 쌀가마니의 이해관계에 더 눈길을 보내게끔 묘사한다. 그리고 사진기, 전화기와 같은 과학 기술의 산물은 특별한 순간에 본질적인 기능으로서 쓰임을 다한다. 이런 선택적인 묘사 방식으로 갑론을박이 불처럼 오갔지만, 일흔의 나이가 되어서도 아직까지 어린아이처럼 월남전에서 처음 먹어본 ‘쵸코레트’를 이야기하는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자면, 당시 백성 입장에서는 오랜 난세 속에서 이런 것들이 오히려 행복과 희망의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고종 역시 가베뿐만 아니라, 용포를 갖추고 선글라스를 쓰고 백성 앞에 나타날 정도로 개화 문물을 즐겼다. 어쩌면 김은숙 작가는 이런 호기심 가득하고 순진무구한 한 편의 낭만을 더 어둡고 무거운 터널로 치닫기 전에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여기에 김은숙 작가는 이후 식민지 시대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모던 보이’들을 각색하여 투입한다. 구동매는 양복을 차려입진 않았지만, 그의 사랑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첫 구절을 자꾸만 생각나게 한다. 그러면서도 백석이 그토록 사랑한 여인이 이화고녀 학생인 난(박경련)과 기생 자야(김영한)를 함께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구동매 역시 두 여인 고애신과 쿠도 히나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또한 신사 김희성은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라며 이상의 <날개>와 같은 아방가르드적 꽃 내음을 날리며 자신을 ‘룸펜’으로 이야기하나, 이 품격은 ‘아나키스트’ 성격을 가진 의열단과 다름이 없다. 실제 의열단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멋쟁이로 살았다. 사상과 맵시가 하나 된 이상적 ‘신사의 품격’이다.

우리는 항상 이 시대를 잃어버린 30년이라 한다. 그럼 잃어버린 것은 뭘까. 단지 국권과 인권일 뿐일까. 기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우리에게 남은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행복해야 하는 일상적 소명도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시절의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 소명의 유산 또한 찾기 위한 열쇠다. 오늘의 우리는 서구화, 근대화,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타의적으로 변태되어 만들어진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혀야 한다. 한 국가의 문화는 결코 타인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 한 명의 인격체로 의식하고 자기중심적 형상으로 가공될 필요가 있다.

‘형(形)’은 세계적인 것을 받아들여 그 입맛에 맞게끔 현대적으로 탈바꿈된 형식으로 연마하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상(相)’은 우리 기억 속의 심상처럼 우리의 옛 정신을 되돌릴 수 있는 구심점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은 일상과 취향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예술과 문화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한 판의 반전으로 전개될 것이다. 김은숙 작가는 이 검은 상자에서 몇 개의 씁쓸한 채소와, 몇 개의 신맛 나는 열매에, 또 몇 개의 할라페뇨 같은 양념을 꺼내놓곤 꽤나 단맛이 나는 요리를 선보였다. 이제 생산자들은 이 상자의 재료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각양각색의 요리를 선보이려 할 것이다. 현대적 차원의 ‘개화기’에 놓인 우리가 이 맛들을 보다 보면 쓰라린 ‘기억상실증’에서 서서히 ‘힐링(Healing)’되지 않을까. 그리고 ‘헬씌(Healthy)’한 심성으로 그저 조선, 아니면 해묵은 민족성, 전통이라는 편협한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포스트 코리아니티로 빛나기를 ‘호프(Hope)’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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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서동현
WORDS 김한규(르시뜨피존 대표)
ILLUSTRATOR HeyHoney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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