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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itique

완벽한 여름 수트를 찾기 위한 여정

On October 02, 2018

여름을 위한 수트가 따로 존재한다. 매년 여름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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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시사철 수트를 입을 필요는 없는 직업을 갖고 있다. 나에게 수트란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상부에 보고를 하는 날에 입는 옷이다. 그럼에도 나는 수트가 남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안다. 수트는 몸과 마음을 다지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갑옷이다. 몸에 딱 맞는 수트를 입고 타이를 매는 순간 느껴지는 어떤 기묘한 황홀경 같은 것이 있다. <아레나> 독자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 믿는다. 

애석하게도 완벽한 여름 수트 따위는 없다. 땀을 잘 흡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여름 수트. 이런 설명을 들으면 당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뒤흔들 것이다. 왜냐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미안하지만 한국의 여름은 이탈리아의 여름이 아니다.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는 이탈리아 남자를 위한 신의 선물이다. 한국? 기온이 40℃에 가깝게 치솟던 어느 날 내가 잘 아는 패션 관계자는 강남 거리에서 스리피스 풀 착장을 하고 걸어 다니는 패셔니스타들을 보며 질식할 것 같았다는 글을 썼다. 맙소사. 그 글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목까지 찰 지경이다. 

대신 우리에게는 여름을 위한 수트가 따로 존재한다. 바로 화이트 티셔츠다. 몇 년 전에 구입한 메종 마르지엘라의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This is my suit.’ 탁월한 문구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쳤다. 질 좋고 핏 좋은 화이트 티셔츠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여름용 블레이저 안에 입을 수도 있고, 슬랙스와 매치하면 캐주얼 프라이데이를 위한 근사한 착장이 된다. 하지만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는 건 완벽한 애인을 찾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이다. 무늬나 문구가 전혀 없는 화이트 티셔츠는 오히려 찾기 힘들다. 차라리 당신의 아버님이 입는 ‘BYC 난닝구’를 찾는 게 더 쉬울 지경이다.

매년 여름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재작년과 작년은 매우 만족스럽게 여정을 마쳤다. 가고시마로 여행을 간 나는 그 작은 항구 도시의 모든 숍을 돌기 시작했다. 일본은 나처럼 몸이 작은 남자에게 완벽한 쇼핑 국가다. 그 동네는 대부분 브랜드가 ‘아시안 핏’이라는 이름으로 티셔츠를 판매한다. 명품 브랜드도 중저가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도 여정은 그리 수월치 않았다. 나는 가고시마역 앞의 거대한 쇼핑몰로 갔다. 제일 위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층까지 모든 숍을 샅샅이 뒤졌다. 영어를 좀 하는 점원이 물었다. “뭐 찾고 있어?” “화이트 티셔츠를 찾고 있어.” 그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걸 찾으려면 빔스에 가봐. 거기에 가면 뭐든 다 있어.” 빔스는 일본의 꽤 잘 알려진 편집매장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거기도 갈 예정이지만 너희 가게에는 없니?” 그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는 나의 여정이 얼마나 힘든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빔스에서 나는 완벽한 티셔츠를 찾았다. 헤인스(Hanes)와 빔스가 협업해 내놓은 그 티셔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빈 캔버스였다. 어떠한 몸매든 과감하게 포용하겠노라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은 캔버스 말이다. 나는 모두 10장의 화이트 티셔츠를 샀다. 수트 케이스에 둘둘 말아서 넣으니 마치 떡집 나무 틀에 딱 맞춰 쪄낸 시루떡처럼 아름다웠다. 

화이트 티셔츠의 생명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한 철 입고 나면 목은 늘어지고 색은 바랜다. 그러면서 여름 수트는 순식간에 ‘난닝구’로서 생명을 다한다. 장롱에서 꺼낸 빔스의 화이트 티셔츠들이 생을 다한 슬픈 모습으로 축 늘어지자 나는 결심했다. 서울에서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아내겠노라고 말이다. 나는 청담동과 명동과 가로수길을 모조리 뒤지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하루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하루 만에 기어코 해내야 한다는 욕구가 대뇌와 소뇌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과한 욕심이었다. 때로 우리는 과한 욕심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어디에도 없었다. 한 편집매장에서 나는 제임스 퍼스의 기십만원짜리 티셔츠를 살까 망설였다. 하지만 티셔츠 대여섯 장에 기백만원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나는 아니다. 여름 수트는 저렴해야 한다. 게다가 라벨에 ‘드라이클리닝 전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편집매장의 티셔츠는 피해야 한다. 화이트 티셔츠라는 건 라면 국물이 튀고 목에 때가 타면 훌훌 벗어서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린 다음 둘둘 말아서 옷장에 멋대로 처박아둘 수 있어야 하는 옷이다. 드라이클리닝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청담동 사거리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기분을 느끼며 명동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한 SPA 브랜드의 매장에서 완벽한, 아니, 적어도 나에게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아냈다. 제법 도톰한 면 소재로 된 그 티셔츠는 부들부들하게 몸에 감기는 호화스러움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십만원짜리 티셔츠를 십수 장이나 사서 돌려 입을 만큼 완결한 재정의 소유자는 아니다. 게다가 그 티셔츠는 마른 내 몸매를 어느 정도 보완할 만한 넉넉함이 있었다. 어깨는 살짝 내려오고 가슴은 딱 맞았다. 거울을 봤다. 거기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말런 브랜도가 있었다. 혹은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 있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화이트 셔츠 다섯 장을 손에 쥐고 의기양양하게 판매대에 섰다. 점원이 내 눈을 쳐다봤다. 나는 말런 브랜도처럼 웃었다. 점원은 전혀 웃지 않고 말했다. “한 장에 2만9천원, 총 5점 하셔서 14만5천원입니다.” 나는 제임스 딘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은 이유가 있는 승자의 미소였다.

여름을 위한 수트가 따로 존재한다. 매년 여름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완벽한 화이트 티셔츠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Credit Info

EDITOR
서동현
WORDS
김도훈(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ILLUSTRATOR
HeyHo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