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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에베가 공예전을 연 사건

On June 29, 2018 0

이렇게 근사한 패션과 공예의 만남. ‘현시대의 럭셔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렇듯 명쾌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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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에베 공예상 2018 

지난 5월 3일부터 6월 17일까지,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제2회 로에베 공예상의 수상작을 포함한 30점의 파이널리스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쓰러질 듯 우뚝 선 도자 하나. 빛깔은 전대의 유물처럼 창백하다. 마크 로스코나 잭슨 폴록의 추상화인 듯 표면에는 흙점이 흩뿌려져 있다. 호주와 인도, 이집트와 일본 시가라키까지. 작가가 발을 디딘 모든 땅에서 채집한 흙은 고스란히 작업의 연료가 된다. 이처럼 출처가 다양한 흙에 다시 철, 아연, 은, 동과 같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산화되는 물질을 섞고 나면 비로소 도자를 빚기 위한 밑그림이 완성된다. 다음은 물레는 저만치 치우고, 코일링 기법으로 외피를 한 층씩 빚어 올리는 단계. 정직한 손의 노동으로 완성된 도자는 기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흙, 미생물, 산화물로 이루어진 하나의 압축된 대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여기까지가 도예가 제니퍼 리의 2017년 작품 ‘Pale, Shadowed Speckled Traces, Fading Ellipse, Bronze Specks, Tilted Shelf’에 대한 얘기다. 제니퍼 리는 버나드 리치, 루시 리, 한스 쿠퍼의 뒤를 이어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보란 듯이 허무는 현대 도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영국 프리미어 공예 아트 페어인 콜렉트에 다수 참여했으며, 이세이 미야케가 그의 열렬한 수집가임을 자처하고, 전 세계 40개 뮤지엄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제니퍼 리를 수식하는 가장 최신의, 또 가장 ‘쿨’한 정보는 2018년 로에베 공예상 수상자라는 사실이다.

로에베 공예상을 본격적으로 입에 담기 위해선, 결국 조너선 앤더슨이 1백70년 역사의 스페인 패션 하우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호명된 2013년을 이야기해야 한다. 조너선 앤더슨은 당시 존재감을 잃어가던 로에베에 합류하자마자 그간 하우스에 견고하게 쌓여온 시간의 더께를 빠르게 털어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M/M 파리와 함께 서체, 로고를 새로 세우며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재정비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사 로에베’라 새롭게 명명한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를 경매장에서 막 건져온 회화와 조각, 공예품으로 잔뜩 채우고, 머트 앤 마커스 대신 제이미 혹스워스, 스티븐 마이젤에게 카메라를 쥐어주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캠페인을 찍어냈다.

이 시절 로에베가 ‘공예’와 그린 교집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2015년 도예가 루시 리에게 영감을 받아 출시한 레더 볼 시리즈, 19세기 후반 미술공예운동의 주도자였던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에게 바치는 헌정과 다름없었던 2017년 윌리엄 모리스 캡슐 컬렉션, 바로 지난 4월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섬유 공예 장인들과 협엽해 선보인 담요, 태피스트리, 토트백까지. 이렇듯 조너선 앤더슨이 공예라는 우주에서 자전, 또 공전하고 있을 때 고샤 루브친스키는 ‘소비에트 키즈’를 앞세워 안티 패션을 제시하고,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수장인 뎀나 바잘리아는 무국적이고 당최 가늠할 수 없는 옷들로 패션 산업을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조너선 앤더슨은 2013년 처음 하우스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결코 ‘트렌드’라는 시대의 신기루 같은 징후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전과는 다른, 더 깊은 공예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은 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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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ifer Lee ‘Pale, Shadowed Speckled Traces, Fading Ellipse, Bronze Specks, Titled Shelf’

Jennifer Lee ‘Pale, Shadowed Speckled Traces, Fading Ellipse, Bronze Specks, Titled Shelf’

  • Jennifer Lee ‘Pale, Shadowed Speckled Traces, Fading Ellipse, Bronze Specks, Titled Shelf’Jennifer Lee ‘Pale, Shadowed Speckled Traces, Fading Ellipse, Bronze Specks, Titled Shelf’
  • Chen Min ‘Hangzhou Stool’Chen Min ‘Hangzhou Stool’
  • Julian Watts ‘Bench’Julian Watts ‘Bench’
  • Sam Tho Duong ‘Frozen/Se[e/a]/Look’Sam Tho Duong ‘Frozen/Se[e/a]/Look’
  • Simone Pheulpin, ‘Croissance XL(XL Growth)’Simone Pheulpin, ‘Croissance XL(XL Growth)’
  • Takuro Kuwata ‘Tea Bowl’Takuro Kuwata ‘Tea Bowl’
  • Paul Adie ‘Searching for solid ground’Paul Adie ‘Searching for solid ground’
  • Hae Cho Chung ‘Five color vessels 0831’Hae Cho Chung ‘Five color vessels 0831’
  • Joonyoung Kim ‘Tears in the Sunset’Joonyoung Kim ‘Tears in the Sunset’
  • Yeonsoon Chang ‘Matrix Ⅲ Time, Space, Human - 1, 2, 3’Yeonsoon Chang ‘Matrix Ⅲ Time, Space, Human - 1, 2, 3’


로에베와 공예의 교집합에서 빠트린 중요한 사건이 한 가지 있다. 로에베 재단이 2016년 제정한 로에베 공예상이 바로 그것이다. 로에베 공예상의 원칙은 단순하다. 성별과 국적 불문, 개인이든 단체든 만 18세 이상의 ‘공예가’라면 누구나 응모 가능하다. 출품작 공모가 완료되면 로에베가 처음 둥지를 튼 스페인 마드리드에 전문가 패널 11명이 모여 이틀간 심사한 끝에 30명 남짓의 파이널리스트를 결정한다. 추후 새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최종 수상자를 결정하고 상금 5만 유로를 수여한다. 수상자의 작품을 포함해 파이널리스트 30명의 출품작은 한 달 가까이 뮤지엄에 전시된다.


로에베 공예상, 그러니까 패션과 공예의 만남은 사실 대단한 ‘센세이션’은 아니다. 이미 1980년 이세이 미야케는 섬유 공예에 지독하게 매달린 끝에 유리섬유로 만든 빨간색 뷔스티에를 세상에 공개했고, 에르메스 또한 가죽 공예 장인들을 위해 프랑스 팡탕 지역에 7층 규모의 가죽 공방을 세웠다. 좀 더 시계를 과거로 돌려 오트 쿠튀르가 발달하던 시절로 가면, 당시엔 계절마다 디자이너를 위해 새로운 공예품을 보급하던 공예 장인 ‘파리뤼에’가 있었다. 굳이 시간을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지금 입고 있는 셔츠에 붙은 작은 단추, 가죽 가방에 달린 나무 손잡이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애초 패션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섬유, 가죽, 유리, 목공예가 우르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로에베 공예상은 ‘새로운 현상’이라 한 줄 평을 내리는 것이 전적으로 맞다. 기껏해야 공예상이라고 하지만, 공예상이야말로 대단하다. 여태까지 이 정도 파급력을 가진 국제적 규모의 공예상이 있었나? 이번 공예상을 지켜본 갤러리엘비스&크래프트 대표 이원주는 말한다. “상금 5만 유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75개 국가에서 공예가 1천9백여 명이 자신의 작품을 로에베로 보냈다. 다시 말해 로에베는 단지 5만 유로를 들여 작가 2천여 명을 불러들인 셈이다. 이건 완전히 공예계를 흔드는 일이다.”

무엇보다 로에베 공예상은 ‘현시대의 럭셔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조너선 앤더슨의 대답이다. 비싼 컬렉션 피스를 걸쳐야만 럭셔리에 편입되고, 그래서 고답적인 태도를 일관하며 철옹성을 쌓을 수 있었던 과거 럭셔리 하우스의 시대를 지나 ‘복고’ ‘촌스러움’을 키워드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 컬렉션을 통해 보여줬던 ‘안티 럭셔리’라는 대안.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재, 그 종점에 로에베 공예상이 있다. 모든 기술이 디지털로 편입되는 시대에 로에베는 유유히 디지털과 결별한 채 노동집약적인, 고고한 화이트 큐브 안에 박제되지 않고 삶의 반경 속에 자리한, 지금 이 시대가 무언가를 습득하고 소비하는 속도와는 정반대의, 무엇보다 ‘물성’에 대한 인간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공예의 길로 방향키를 돌리고 있다. “공예는 디지털 미디어 세상의 해독제다.” “당신이 이미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면, 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머지않아 도자로 만든 공예품이 필요하게 될 거다.”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조너선 앤더슨이 주문처럼 읊은 말들이다. 난공불락의 럭셔리 시장은 이미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조너선 앤더슨의 말처럼 공예는 새로운 세계의 새 규칙이다.  

 

수상자 제니퍼 리 

현존하는 최고의 도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제니퍼 리가 제2회 로에베 공예상을 수상했다.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초월한 도자 예술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작품으로 제니퍼 리는 상금 5만 유로를 거머쥐었다.

이렇게 근사한 패션과 공예의 만남. ‘현시대의 럭셔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렇듯 명쾌한 대답.

Credit Info

GUEST EDITOR
전여울
ADVICE
김홍남(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이원주(갤러리엘비스&크래프트 대표)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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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EDITOR
전여울
ADVICE
김홍남(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이원주(갤러리엘비스&크래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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