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AGENDA MORE+

한번쯤, 포기해도 괜찮아

영화를 홍보하는 측에선 대담하게도 ‘청춘 판타지’라고 소개했다.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도리어 ‘안티-판타지’에 가깝다.

UpdatedOn April 05, 2018

3 / 10
/upload/arena/article/201803/thumb/38080-289571-sample.jpg

이 시대 청춘의 표상들.

이 시대 청춘의 표상들.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 역의 이솜.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 역의 이솜.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 역의 이솜.

담뱃값이 오른 것에 분노하는 미소.

담뱃값이 오른 것에 분노하는 미소.

담뱃값이 오른 것에 분노하는 미소.

이렇게 확언하는 이유를 지금부터 차분히 증명해 보이겠다. 우선 제작진과 동맹한 (부풀려 말하기 좋아하는) 홍보사가 <소공녀>를 판타지라 규정한 근거는 명백해 보인다. 주인공 ‘미소(이솜)’의 캐릭터가 현실성이 결여됐거나 부족하다는 점. 이 편리한 아이데이션에는 예를 들면 이런 요소가 작용했을 테다. 아끼는 담뱃값이 하루아침에 2천5백원씩이나 올랐다. 좋아하는 위스키 한 잔은 1만원이 훌쩍 넘는다. 술과 담배를 포기할 수 없는 미소는 일당 4만5천원을 받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가사도우미다. 3년째 그렇게 사는 데 별다른 걱정 하나 없어 보인다. 결정적으로 월세가 올랐다. 고작(?) 5만원! 여하튼 이 상황에서 미소는 ‘집’을 포기해버린다. 짐을 싸들고 친구 집을 전전한다. 비현실적인 건 맞다. 하지만 인물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해서 장르가 판타지여야 할 이유는 없다. 너그럽게 보더라도, 극영화가 창조하는 캐릭터가 100% 현실(적)이라면, 그것이 도리어 진정한 의미의 판타지가 아니겠나 싶다. 게다가 특히 <소공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관객을 상대로 헛된 망상을 유포하거나 가짜 도취에 빠져들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자발적 홈리스’ 미소는 그녀 외 모든 요소의 현실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영리하게 정의된 ‘안티-판타지’ 캐릭터다.


이러한 판단 근거가 썩 잘 드러나게 <소공녀>는 30대 여성의 시선과 감정, 언어와 행동을 무심하게 좇으며 대한민국의—판타지의 대척점으로서—리얼리티를 부담스럽지 않게 터치한다. 그 방식 또한 제법이어서, <써니>가 ‘나미(유호정)’를 통해 과거의 절친 ‘7공주’들을 재규합하도록 지시해 깊은 인상을 남긴 선례를 효율적으로 모방한다. 거처를 떠나 하루살이를 시작한 미소는 학창 시절 밴드 멤버들을 차례로 방문하는데, 거기서 우리네 보통 삶이 차례차례 그리고 적나라하게 클로즈업된다. 자주, 아주 웃기기까지 하면서. 베이시스트 ‘문영(강진아)’은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더 큰 욕망을 향해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직장인 친구다. 키보디스트 ‘현정(김국희)’은 음식 타박에 남편 구박에 시부모 눈치까지 지긋지긋한 주부 친구다. 드러머 ‘대용(이성욱)’은 결혼 8개월 만에 이혼한 데다 간신히 마련한 아파트 대출금을 20년 동안 갚아야 해서 서러운 후배다. 보컬 ‘록이(최덕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겠다는 일념의 노총각 선배다. 웹툰 작가 지망생인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역시 미소처럼 빈털터리다. 학자금 대출금도 아직 못 갚은 그는 꿈과 희망을 버리고 오직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생명수당 합치면 월급이 세 배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자원해 떠난다. 목표는 오직 하나. 2년간 5천만원 모아 대출 갚고 집을 구하겠다는 것. 우리 주변에서, 어디서 한번쯤은, 누군가에게 들었더라도 낯설지 않은 현실의 인물들. 그래서 <소공녀>는 판타지가 아니라 오히려 리얼리티, 즉 안티-판타지에 훨씬 근접했다는 얘기다.


연애, 결혼, 출산, 직장, 재산, 건강, 야망, 가족, 행복, 만족, 불편, 멸시, 포기,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는 삶과 인생. <소공녀>가 담고 있는 (그리고 전하고 있는) 이러한 가치 판단의 메시지 조각들은 대체로 묵직하고 불투명하며 왠지 모를 양가 감정을 유발하는 데 적절히 동원된다. 청춘의 현실이든 현실의 청춘이든, 청춘과 현실을 주요하게 다룬 영화들이 빈번히 교차시킨 희비 쌍곡선에서 억지 치유나 희망 고문에 숱하게 노출돼온 관객의 심정을 <소공녀>는 잘 알고 있다. 쓰고 연출한 전고운 감독은 미소에게 (적지 않은 ‘청춘 영화들’이 손쉽게 그래 왔듯이) 거창한 꿈을 안기거나 뚜렷한 목표를 주지 않음으로써, 즉 확실한 ‘청춘의 고난’을 강제함으로써 ‘위로의 당위’를 획득하려 하지 않았다. ‘현실을 잘 버텨내는 것 자체가 우리네 청춘의 꿈이자 목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미소의 직업을 가사도우미로 설정한 이유도 무척 공감된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당직이어서”라는 것이고, “없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에” 드러내고 내세우고 싶었다는 것이다.
<소공녀>는 돈에 쪼들리고 현실에 상처받으면서도 칙칙하거나 어둡거나, 자책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청춘 현실 보고서다. 품위와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고, 사사로운 데서 만족감을 얻으며, 꿋꿋한 생존만으로도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버팀의 지침서다. 그저 4천원짜리 ‘디스’에서 4천5백원짜리 ‘에쎄’로 바꾸는 정도, 2천원이 올랐어도 ‘글렌피딕’ 한 잔을 주문하는 정도. 이 정도의 호사가 인생을 망치거나 현실을 파탄내지 않음을 일깨우는 부작용 없는 처방전이다. 흔한 훈계나 공허한 동정은 배제했다. 그래서 공감한다.

 

Must See

  • 퍼시픽 림: 업라이징

    퍼시픽 림: 업라이징

    퍼시픽 림: 업라이징

    퍼시픽 림: 업라이징

    감독 스티븐 S. 드나이트 | 출연 존 보예가, 스콧 이스트우드 | 개봉 3월 21일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마련한 전편을 기틀 삼아 다시 한번 도약하려 한다. 그런데 말이다. 어쩐 일인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솟는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 출연 티모시 샬라메, 아미 해머 | 개봉 3월 22일

    올해 아카데미는 이 작품에 각색상을 건넸다. 소설과는 분명 다른 터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떠오르는 신성 티모시 샬라메의 첫사랑이 감독의 섬세함 속에 어떻게 펼쳐질까?

7년의 밤

7년의 밤

7년의 밤

7년의 밤

감독 추창민 | 출연 류승룡, 장동건, 고경표 | 개봉 3월 28일

정유정의 소설은 영화화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분명 어려울 거다. 텍스트 속에 담긴 7년의 슬픔과 신비로움이 스크린 속에 제대로 재현되었기를 바란다. 기대 반, 의심 반.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주영
WORDS 송지환(영화 칼럼니스트)

2018년 04월호

MOST POPULAR

  • 1
    예술과 기술의 경지
  • 2
    Dingle Dangle
  • 3
    <아레나> 5월호 커버를 장식한 배우 송중기
  • 4
    라도, 지창욱 2024 새로운 캠페인 영상 및 화보 공개
  • 5
    THE PREPSTER

RELATED STORIES

  • LIFE

    파네라이의 거북선

    파네라이가 시티 에디션의 일환으로 ‘서울 스페셜 에디션’을 공개했다. 한국을 모티브로 선보인 최초의 결과물이다.

  • AGENDA

    실리콘밸리, 천재형 CEO 리스크 시대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이 위기를 맞았다. 그들의 미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투자자들이 조금은 이해된다.

  • FASHION

    제냐와 서울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새로운 행보, ‘XXX(엑스엑스엑스) 컬렉션’의 시작을 알리는 성대한 론칭 행사가 얼마 전 서울, 성수동에서 진행됐다.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아티스틱 디렉터 알레산드로 사르토리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서울에서?

  • LIFE

    더 발칙해진 한식

    지금 뉴욕에선 심지어 이런 한식이 가능하다.

  • LIFE

    이토록 세련된 한식

    ‘킴미(Kimme)’가 싱가포르 한식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MORE FROM ARENA

  • FASHION

    The New Black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블랙의 면면.

  • CAR

    이탈리아와 커피와 자동차

    마세라티 그레칼레로 엿보는 이탈리아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

  • LIFE

    거장들이 넷플릭스로 간 까닭은?

  • FASHION

    전천후 슈즈

    트리플 스티치 스니커즈는 언제, 어디에서나, 어떠한 스타일에도 어울리는 제냐의 아이코닉한 아이템이다.

  • FASHION

    LAZY SATURDAY

    그저 오늘을 별거 없이 느리고 게으르게 흘려보낸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