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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이 화려한 책은 가격이 비싸고 소박한 책은 가격이 낮고, 그래서 수익 폭이 좁으니 많이 팔려야만 그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소형 페이퍼백 문고판이 자취를 감춘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br><Br> [2007년 4월호]

UpdatedOn March 19, 2007

지금 와 생각하면 잘 한 일이다. 보통 한 직장을 7년 이상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하는 내가 돌연 사표를 낸 일을 말함이다. 기자 생활 만 10년을 꾹꾹 눌러 채운 직후였다. 겨울을 털어낸 햇살의 뚜렸한 기운 때문이기도 했다. 뭐, 이렇게 말하니까 <이방인>의 뫼르소라도 된 양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이다. 그때, 10년 동안의 야근을 체력장 치르듯 성실함 하나로 달려온 내겐 세 가지 보물이 있었다. 6천만원이 든 통장과 잡지에 대한 소박한 청사진과 매체를 스스로 고르겠다는 배짱. 그래서 일단 짐을 챙겼다. 4월호 마감을 한 직후이니 딱 지금의 날씨였겠다. 문득 정신이 들어 창을 열면 적당한 온기와 또 적당한 한기가 온몸에 기분 좋게 스며드는 즈음. 짐이라고 해봤자 점퍼 두 장에 음반 몇 장 정도. 여행의 경로는 하염없는 전국 일주라고 하는 게 옳겠다. 새봄의 흙은 꿈틀대고 부풀어 여행자의 발을 어지럽힌다. 내딛는 걸음이 사뿐거리다가도 묘한 흥에 겨워 어지럼증이 이는 그런 길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한 노선을 기억하긴 무리지만 충청도의 깊숙한 내륙을 돌아 진해, 목포, 해남을 거쳐 해동, 영덕을 돌아 강원도의 낙산까지 올랐었지 싶다.
서정주 선생의 시를 곱씹으며 선운사의 동백꽃에 눈시울 붉히다 노을을 품고 자전거로 인근을 내달리고, 안동 하회마을 서원의 대나무를 베어 죽통 소주잔을 만들고, 진해의 벚꽃에 취해 막걸리로 밤을 새우고, 부슬비 맡고 선 불영사 처마 밑에서 비구니들과 불공을 드리고, 땅끝마을 아줌씨들과 미역을 따고, 목포 바닷가의 야시장 바닥에 앉아 나무 젓가락에 감긴 세발낙지를  참기름과 함께 목구멍에 쑥 밀어넣고 전장의 승리자라도 된 양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속 굵은 어부들과 세상사를 논하고, 재래시장에 들러 사지도 않을 산나물 가격을 흥정하다 무심히 돌아나오고, 바다 위에 떠 있는 해동 용궁사에서 뜻 모를 기원을 하기도 했다. 기록 없는 여백의 여행이 되길 원하였으므로 그 흔한 메모지 한 장, 카메라 한 대 들고 나서지 않은 길이었다. 밤이 되면 배낭여행자의 낯빛을 하고 소소하게 여관비를 흥정하던 그런 소박한 길이었다.
이 여행에 부적이 되어준 건 낡은 삼중당 문고 한 권이었다. 짐을 챙겨 집을 나올 때 벼락같이 발견한 것이다. 좋은 징조라 여겼다. 여행 중에 이 책은 읽지도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그 가벼움을 즐기거나 가끔 만지작거리며 오래된 종이 질감을 즐기는 걸로 족했다.
1980년 대 초, 당시엔 사루비아 문고니 범우서적이니 하는 페이퍼백(papaerback) 시리즈물들이 서점을 점령하고 있었다. 떡볶이 집에 디제이가 있을 무렵이니 롤러장 정도를 제외하곤 놀거리도 마땅치 않고 그저 ‘노는 아이’가 아닌 다음에야 이 문고판 도서를 유일한 오락거리로 여길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문고판 중 삼중당 문고는 가장 역사가 깊었고 가장 가벼웠으며 세로쓰기를 고집했고 시리즈물이 하염없이 많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그립감에서 가장 우위에 선 것도 바로 삼중당 문고판이다. 책값은 세월 돌아 3백원에서 5백원으로 뛰었지만 헌책방을 뒤지면 묵은 냄새가 구수한 삼중당 문고를 운 좋으면 1백원에 살 수 있던 때였다. 장정일의 시구처럼 삼중당 문고가 집채 만해지진 않았지만 나 역시 작은 라면 상자 몇 개에 나눠 담을 만큼은 쌓여 이사 다닐 때마다 어머니의 구박을 뒤로 하고 묵은지 묵히듯 다락 안에 모셔두곤 했다. 그러던 놈이 잡지 만드느라 집안 이사에 관여할 수 없는 몇 해를 나자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어머니는 내다버렸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꽃핑크색 비닐 끈으로 묶여있던 라면 상자가 없어진 걸 안 날로부터 난 근 한 달간 어머니와 말을 섞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말을 걸어 온 놈들은 서머싯 몸의 <달과 육펜스>, 김유정의 <동백꽃>,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카프카의 <성>이었다. 그놈들이 왜 라면 상자 안에 함께 들어가지 못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죽은 자식이 살아온 듯 감화감동하였고 <동백꽃> 하나를 은장도처럼 품고 방을 돌아나왔다. 여행은 결국 오른쪽 주머니의 삼중당 문고와 함께 성공적으로 끝이 났고 이 작은 책자는 그날 이후 오늘까지 내 잡지 인생의 화두가 되고있다. 하드 커버와 코팅으로 분칠한 책자 말고 활자와 진중한 내용만이 빼곡히 담긴, 하지만 겉모습은 새털처럼 가벼운 페이퍼백 시리즈를 독자에게 전달하겠다는 의지로 남은 거다.
독자들은 말한다.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잡지를 만들어달라고 말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광고 없이 콘텐츠로만 가득찬 작은 편집본을 만드는 일은 사업주의 입장에선 시도할 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페이퍼백 형태라면 더더욱. 대량으로 출판해 대량으로 판매되어야만 수익이 나는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외양이 화려한 책은 가격이 비싸고 소박한 책은 가격이 낮고, 그래서 수익 폭이  좁으니 많이 팔려야만 그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소형 페이퍼백 문고판이 자취를 감춘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더 이상 문고판 책자가 오락기를 대신하지도 못할 뿐더러, 저가의 문고판 도서에 비할 수 없는 값(무료)으로 인터넷에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지난 파리 출장 때 월간지 <월페이퍼>에서 발행한 페이퍼백 시리즈물을 사왔다. <아레나>의 이름으로 페이퍼백 시리즈를 출판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책이 또 한 번 내 꿈을 부추긴 거다. 사온 지 한 달 째, 하도 들고 다녀서 벌써 표지가 너덜거리는 손바닥만 한 놈. 전 세계 도시별로 분권된 60권의 시리즈물인데 유럽 어느 나라의 서점에 가도 절찬리에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다.    
공지를 하나 하겠다. 어떤 내용을 담은 책자를 내면 대박이 나겠는지 좀 알려달라. 편지든 이메일이든 아니면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 해줘도 된다. 때로 데스크란 책상에 앉아 계산기 두드리는 걸 업으로 하는 자가 아닐까 한다. 판매율, 광고매출, 수익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도록 ‘on off’를 반복하는 일, 수 억원의 매출부터 몇 만원의 원고료까지 예산에 비추어 한 끝 차이도 나지 않도록 조율하는 일. 그러므로 수익(그것도 큰 수익) 없이 명분만으로 출판을 한다는 건 직무유기다. <아레나>의 이름을 걸고, 서점을 찾는 모든 이들의 손바닥에 척 올라 앉을 수 있는 그런 책이 있다면, 그 정도 확신이 들어 싼 값의 페이퍼백 시리즈를 낼만한 아이템이 있다면 참 좋겠다. 그 주제가 패션이든 여행이든 물건이든 사람 사는 이야기든 상관없다.  
오늘도 삼중당 문고를 달빛 창가에 올리고 정갈한 마음으로 물 한 잔 올린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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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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