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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백수에게 귀족의 삶을 허하라

어머니의 찬송가 소리가 두려워 집밖으로 나와도 갈 데 없는 10개월차 백수. 낮에는 카페에서, 저녁엔 술집에서 `귀족의 삶을 허하라`며 탄식한다.<br><br>[2007년 3월호]

UpdatedOn February 20, 2007

Words 박민수 Editor 이지영 Illustration 장재훈

회사에서 택배로 부친 라면박스 3개 분량의 짐이 집에 도착하면서, 진정한 백수 생활은 도래했다. 올 게 왔군, 콧노래를 부르며 커터 칼로 상자 위 테이프를 급히 갈랐다.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 날 택배용지를 붙이며 느꼈던 쓸쓸함은 간 데 없고 반가운 마음만 가득했다. 우선 ‘립톤’ 홍차 티백 1백 개들이 상자부터 찾았다. 회사에선 맨 아래 서랍에 넣어두고 매일 두 잔은 마셨는데, 집엔 굴러다니는 티백 하나 없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는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으니 집에 홍차 마시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노란 홍차 상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영국에 다녀온 선배가 준 고급 잎홍차였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받을 때는 고맙다고 백 번 인사하고는 향기 한 번 안 맡았군. 그러고 보니 일본에 다녀온 후배가 사온 천 번 재활용 가능하다는 특수 필터도 포장조차 뜯지 않았다. “차, 엄청 좋아하죠? 선배 같은 사람에게 이런 환경친화적인 필터가 필요한 거예요”라며 건네주었는데 이제껏 써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꼭꼭 묶어두었던 여유를 몽땅 만끽해주마, 하는 흐뭇한 마음으로 홍차를 마셨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게 10개월 전의 일이다. 아직 백수 생활의 마력을 체험해보지 못한 때였다. 이후 홍차를 정성스레 내려 마셔본 것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특수 필터는 세 번 써봤다. 아직은 성능이 괜찮다). 티백이 말라붙은 컵 백 개가 냄새를 풍기며 침대 옆에 쌓여 있는 판에, 언제 홍차를 내려 마시겠나. 이불 속을 벗어나는 데도 백만 볼트 에너지가 필요한 암흑 시절이 찾아왔다. 끼니도 귀찮아질 때면 머그잔 가득 우유를 따라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 데운 후 홍차 티백을 넣은 진한 밀크 티로 때우기도 했다. 이불을 구겨 안고 밤새 다운받은 영화를 보다가 날이 밝으면 구겨진 이불을 굽이굽이 펴서 덮고 자던 시절이었다. 지각의 위험, 상사의 꾸중이 아니면 절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는 회사 인간으로 3년 살다가 갑자기 백수가 돼서 겪는 무서운 무기력증이었다. 누워있을수록 몸이 쇠하던 그 시절, 뒤통수에 피가 고이는지 심각한 두통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지 쌓인 이불에서 나오지 않으면 폐렴이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망상에 쫓길 대로 쫓긴 후였다. 밀크 티가 연주홍색으로 말라붙은 컵 백 개(정확히 말하면 8개)를 들고 나가 싱크대에서 씻기 시작했다. 그때 마루에 계시던 어머니가 성경에서 눈을 떼고는 서른 살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녀석, 이제는 좀 움직이려나. 의심과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어머니. 이제 이불 속은 안녕입니다. 백수가 된 지 한 달, 그날부터 나는 움츠러드는 백수를 깨우고, 자극하고, 놀려주는 공간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백수가 되기 전까지는 매일 거실에서 찬송가 CD가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백수가 집에만 있다가는 몸과 마음에 골병들기 십상이다.
백수가 가장 맘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은 도서관이다. 물론 사시, 행시, CPA, 공인중개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머리에 기름이 떡진 남자들이 가득한 자습실은 사양이다. 여기에 가면 3일 연속 야근한 후 사무실에서 나던 냄새가 늘상 난다. 들어서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자습실을 패스하고 자유열람실을 찾는다. 오래된 책 냄새도 좋지만 인간이 빼곡히 들어차 있지 않다는 게 가장 맘에 든다. 책을 보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인지 추운 계절에도 히터를 거의 틀지 않아 코가 싸해지는 공간, 나는 이 찬공기가 좋아서 흠뻑 들이마신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약간의 기침 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는 쉬이 안정을 찾고 책들의 숲을 거니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가장 자주 찾는 곳은 카페다. 집중을 방해한다고나 할까, 일하기에도 놀기에도 카페는 약간 어설프다. 도서관의 단정한 기운과 술집의 산만한 기운이 적당히 섞여 휴식만이 가능할 것 같은 이 공간에서 비로소 백수는 일을 시작한다. 내가 카페를 찾는 시간이면 이미 동류의 인간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자주색 목도리를 감은 여자가 탁자에 발을 올린 채 펭귄문고 페이퍼백을 읽고 있는가 하면, 검은 뿔테 안경의 사내가 턱을 괴고 앉아 만화를 그리고 있다. 탁자 위에 쌓인 책, 노트와 함께 다크 초콜릿이 눈에 띈다. 커피 카페인 더하기 초콜릿 카페인. 함께 보내는 시간엔 알코올이 적격이지만 혼자 즐기는 시간엔 역시 카페인이 필요하다. 나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어젯밤에 쓰다 만 원고를 고친다. 그러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져서 놀라 시계를 본다. 겨울 하늘은 벌써 깜깜해졌고 카페 안에는 인간들이 득시글하다. 벌써 직장인에게 카페가 점령당할 시간이다. 네다섯 명씩 모여 수다를 떠느라 여기저기서 모자란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함께 즐기는 알코올이 필요한 시간이다. 카페를 나와 향한 곳은 아라비아풍 술집. 화려한 술이 달린 쿠션 하나씩 깔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바쁘고 또 바쁘기로 유명한 친구가 술을 마시자는 말에 냉큼 이곳으로 약속을 잡았다. 오지게 바쁜 만큼 돈도 잘 버는 녀석이라 왕창 마실 기회다. 직장인과 백수가 모여 술을 마시다 보면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직장인부터 하나 둘 자리를 떠나게 마련. 아직도 우리나라는 ‘자리를 뜨는 자가 죄인’이라는 미덕이 남아 있는지라 “지금까지는 내가 낼게”라고 말하며 곱게 접힌 계산서를 들고 일어선다. 그렇게 하나 둘 일어서고 나면 남은 백수는 늘어지게 마신 후 얼큰하게 취해 맑은 새벽 공기를 즐기며 첫차를 타고 집에 올 수 있다.
카페, 도서관과는 달리 술집과는 회사원일 때부터 무척 친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가까이 두고 오랜 사귄 벗이 된 기분이랄까. 오늘도 내가 술집 마담이라도 된 양 손님 같은 친구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응대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떠드는 직장 상사 얘기는 늘 똑같은 레퍼토리지만, 와인 잔을 롤링하며 참고 들어준다. 그러다 보면 기분이 풀린 친구가 와인을 원샷한다. 병으로 마시는 게 싸겠지만, 이것저것 마셔보겠다고 잔으로 마시자고 해놓고는 맛도 안 보고 삼키는 것 같다. 뭐, 돈 많은데 뭐가 걱정이겠나. 그러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온다.
“요새 공부는 잘돼? 글은 잘 써져?”
어느새 새로운 와인을 주문해 코끝을 대고 있는 친구가 드디어 자기 얘기에서 빠져나왔나 보다.
“어? 글쎄. 대학 가서 청강이나 해보려구.”
“대학원 가게?”
“그건 아니고.”
“대학원 가는 것도 좋잖아. 그냥 노는 거하곤 달라서 우선 경력이 될 테니까. 다시 취직할 때도 도움이 될 테고.”
“내가 좋아하는 건 판타지 문학인데, 특별히 대학원에서 배울 게 없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세미나로도 충분하고.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거든.”
친구가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실은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달콤한 와인을 마시고 나서인지 입 안이 더 씁쓸하다. 도서관, 카페, 술집…. 백수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공간만 옮겨 다닌다 해도 이렇게 숨통 막히고 입 안 씁쓸한 순간은 언제든 찾아온다. 마주 앉은 친구의 질문 하나에도 금방 평화는 무너져내린다. 그 긴장의 중심에는 “언제부터 돈 벌래?”라는 질문이 늘상 들어가 있다. 백수(白手), 하얀 손을 가졌다고 해서 핑핑 놀고 있겠나. 다만 돈이 안 되는 일이라도 하고 싶을 뿐인데,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는 힘들다. 이해받으려는 게 오히려 이기적인 걸까. 나름대로 백수의 기원을 타고 올라가니 그 선두주자가 모차르트 아닌가 싶다. 엘리아스의 책 <모차르트>에 의하면 모차르트가 사는 시대의 예술가는 장인, 수공업자와 같은 위치에 있어서 궁정의 주문 생산에 응해서 살아나갔다. 모차르트 역시 궁정 음악가로서 높은 지위와 부를 누렸지만 어느 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비참했다. 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후견을 포기하고 “내 의지대로 곡을 써보겠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더 이상 그에게는 악곡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돈과 연주 기회가 한번에 날아가버릴 정도로, 사회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벌은 혹독했다. 하지만 훗날 평자들에 의하면 그가 백수가 된 후 10년간 만들어낸 곡들이 모차르트를 대표하는 곡이라고 한다. 너무 재능 있는 사람의 얘기라 마음에 와닿지 않고, 후세의 평가 따위엔 관심 없다고? 그럼 좀 가까운 데서 무지 부러운 문화백수 하나를 찾아보자. 바로 “좇까라 마이싱들아”라는 발언과 함께 청년문학의 기수가 된 작가 박민규 말이다.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2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글만 써댔다는 그는 10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나는 이제 나만의 우주에 빠지겠다.”
후원자 없이 곡을 쓰겠다는 모차르트나 자신만의 우주에 빠지겠다는 박민규, 그들에게는 오늘 돈이 되지 않아도 한번 달려보겠다는 문화백수만의 기백이 있다. 하지만 이들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미진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내 스스로를 그런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게 무척 죄송스럽다. 모차르트가 여봐란 듯이 사회의 굴레를 벗어던졌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창작 방향을 뚜렷이 정립한 뒤였고, 박민규는 백수가 된 이후에도 9시부터 6시까지 책상 앞에 붙어서 글을 썼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의식해서일 수도 있으나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래, 비장함이다. 모차르트나 박민규와 같은 귀감할 만한 문화백수와 나를 가르는 단어. 노는 듯이 일하고 싶고 일하듯 진지하게 놀고 싶어서 백수가 된 나로서는, 도서관과 카페, 술집을 유유히 오가는 나로서는, 아니 그 오고가는 거리의 공기를 음미하는 걸 제일 즐기는 나로서는 그런 비장함은 도저히 갖추질 못하겠다. 굳이 설명하자면, 나는 차별이 곧 전통이었던 계급사회에서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계급화 되었던 백수가 되고 싶은 것이다. 오전에는 독서를 하고, 오후에는 승마를 즐기고, 주말에는 파티를 열며, 전인적인 삶을 추구하고 균형 있는 행복을 즐겼던 귀족 말이다. 내가 팔릴 만큼 뛰어나려면 승마든 독서든 하나만 택해서 죽어라 해야겠지만, 나는 귀족처럼 내 부족한 부분을 느긋하게 채우고 싶다. 운동량이 부족할 땐 승마를 하고 싶고, 지성이 부족하고 호기심에 목마르면 독서를 하는 것이다. 유희가 필요할 때 성장을 하고 파티에 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판타지 문학을 공부하고 싶을 땐 공부하고 이론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낄 땐 신화학 강의도 청강해보고…. 그렇게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여유롭게 챙기고 싶을 뿐이다. 귀족처럼 유유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귀족, 농노 모두 없애고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노력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나서 귀족이 되고 싶다니, 어디 이해받을 수 있겠는가. 그저 와인 잔만 돌리며 앉아 있을 수밖에. 이래서 문화백수는 고단하고 쓸쓸하다. 당분간 술집은 자제하고 카페와 도서관에 칩거할 작정이다.

문화백수, 한없이 행복한 한량
문화백수를 상징하는 단어는 매우 많다. 한량, 음악, 영화, 문학, 글쓰기, 카메라, 블로그, 낭만, 게으름, 고난도 문화적 취향. 여기 등장하는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문화백수의 개념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사실 ‘문화백수’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건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구호가 사라지면서부터다. 무릇 새마을운동으로 일으킨 빌딩 위에 벌러덩 누워 볕이나 쐬고 싶은 자들이 생겨났으니, 그들이 바로 문화백수다. 단,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문화백수는 일반적인 ‘백수’의 개념과 차별화된다는 점이다. 바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다는 점에서는 일치될 수 있겠으나, 문화백수는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능력이 없어서, 혹은 이러저러한 사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놀고 있는 자는 엄밀히 말해 문화백수라 할 수 없다. 문화백수란 자발적 의지로 사회생활을 멀리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또 그들의 문화적 취향은 한없는 ‘고급’이어서 얼핏 ‘한량’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즉, 능력은 있을지언정 스스로 정규적인 삶을 살아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문화백수의 범주를 채운다. 주로 영화감독, 소설가, 뮤지션 등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이 뚜렷한 증상은, 그러나 창피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지는 않다. 스스로 ‘나 문화백수예요’라고 떳떳하게 밝힐 수 있을 정도의 자부심은 문화백수의 기본이다. 영화감독 김지운은 ‘백수공력’이라는 말로 자신의 문화백수 시절을 정당화한다. 그는 스스로 “일생에서 직업적으로 제일 길게 한 것이 백수인데, 아마 감독이라는 직업도 영화를 안 찍을 때는 도로 백수일 수 있어서 선택한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10년간 백수로 지내면서 받아들이기만 하고 쏟지 않았던 것들이 엄청난 창작욕구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백수의 24시간은 어떠할까.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자칭 문화백수임을 제창하고 나선 박민수 씨가 그 정당함에 대한 변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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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박민수
Editor 이지영
Illustration 장재훈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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