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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와 냉소의 디스토피아

건조한 유머와 시니컬한 말장난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온 영국인 아티스트,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국내 첫 전시가 열린다.

UpdatedOn November 30, 2016

 


지난여름이었다. 영국 북서쪽 서머싯 지역에서 비밀리에 뱅크시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버려진 수영장에 세운 우울한 나라, 디즈멀랜드(Dismaland)다. 휘황한 테마파크에 점철된 가짜 희망 대신 음울함을 가득 담아 만든 디스토피아. 이 음산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 중 뱅크시, 데미언 허스트와 함께 선봉에 선 아티스트가 바로 데이비드 슈리글리다.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디즈멀랜드에 풍선 파는 남자를 뒀다. 풍선 파는 남자는 10개 남짓의 검은 풍선을 쥐고 디즈멀랜드를 배회했다. 마치 쓰레기봉투에 바람을 넣어 만든 듯한 풍선에는 ‘I am an Imbecile(바보 천치)’이라는 하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뱅크시가 만든 디즈멀랜드의 ‘스피릿’은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작업 정신이기도 하다. 영국 브라이턴에 거주하며 예술 하는 이 아티스트는 드로잉, 텍스트, 사진, 애니메이션, 조각, 음악, 건축, 필름 등 매체를 넘나들며 작품 세계를 펼친다. 특유의 시니컬하고 건조한 유머가 그대로 배어나는 그의 작품은 현대인의 공감과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일상적인 상황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그리고 풍자한다. 그의 드로잉에는 무표정하게 차가운 유머를 내뱉는, 실제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었다. 유머러스한 풍자와 독특한 감각으로 일상과 사람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지난 9월 말부터,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 프로젝트에 참여해 작품 ‘Really Good’을 좌대에 올린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지금 영국에서 주목받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그런 그의 전시가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다. 국내에서는 처음 열리는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전시다. 현대카드가 마련한 새로운 전시 공간, 스토리지가 무대다. 20~21세기 영국의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들을 보유한 영국문화원이 기획했다. 20년 전부터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주요 작품들을 엄선해 소장해온 영국문화원의 컬렉션과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작품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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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뜻하는 단어 ‘Exhibition’의 철자를 일부러 틀리게 적었다. 누군가는 발견하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만한 자리에 설치했다. .

전시를 뜻하는 단어 ‘Exhibition’의 철자를 일부러 틀리게 적었다. 누군가는 발견하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만한 자리에 설치했다. .

  • 전시를 뜻하는 단어 ‘Exhibition’의 철자를 일부러 틀리게 적었다. 누군가는 발견하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만한 자리에 설치했다. . 전시를 뜻하는 단어 ‘Exhibition’의 철자를 일부러 틀리게 적었다. 누군가는 발견하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만한 자리에 설치했다. .
  • 싸구려 가발을 쓴 얼굴 로봇이 콧구멍에 펜을 꽂은 채로 그림 그린다. 그의 이름은 ‘아티스트(The Artist)’다. 싸구려 가발을 쓴 얼굴 로봇이 콧구멍에 펜을 꽂은 채로 그림 그린다. 그의 이름은 ‘아티스트(The Artist)’다.
  • 점토로 제작해 매끈하게 마감한 10켤레의 부츠들. 전시 공간에 따라 매번 배치를 새로 한다. 점토로 제작해 매끈하게 마감한 10켤레의 부츠들. 전시 공간에 따라 매번 배치를 새로 한다.
  • 2009년에 제작한 ‘Ostrich’ 실제 타조의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 박제한 작품이다. 2009년에 제작한 ‘Ostrich’ 실제 타조의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 박제한 작품이다.
  • 1천 장 이상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작업.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작업해온 드로잉 아카이브에서 선별했다.1천 장 이상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작업.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작업해온 드로잉 아카이브에서 선별했다.
  •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구멍에 머리를 넣을 것. 그리고 ‘I am a Person’이라는 문장을 되뇌어보자.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구멍에 머리를 넣을 것. 그리고 ‘I am a Person’이라는 문장을 되뇌어보자.
  • 낚시용 바지에 시원한 맥주를 가득 부은 것 같은 ‘Cheers’. 낚시용 바지에 시원한 맥주를 가득 부은 것 같은 ‘Cheers’.
  • 400m 길이의 이 점토 작품은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제작했다. 이 작품은 서울 사람들이 만들었다. ‘신화적 존재’로서의 예술가를 우회적으로 부정하고 재치 있게 조롱한다. 400m 길이의 이 점토 작품은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제작했다. 이 작품은 서울 사람들이 만들었다. ‘신화적 존재’로서의 예술가를 우회적으로 부정하고 재치 있게 조롱한다.
  • 데이비드 슈리글리에게 진정한 ‘힙스터’란. 데이비드 슈리글리에게 진정한 ‘힙스터’란.
  • 4백13개의 개별 작품으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그의 드로잉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4백13개의 개별 작품으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그의 드로잉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 곳곳에 전시된 ‘No Photography’. 누구든 촬영 가능하다. 곳곳에 전시된 ‘No Photography’. 누구든 촬영 가능하다.


브로슈어에 실린 메인 이미지가 ‘I Hate Thinking’이다. 과연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유머와 냉소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드로잉이다.
생각하는 일을 싫어한다고 쓰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그린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선 내가 2004년부터 10여 년간 그려온 드로잉을 1천 점 이상 보여준다. 드로잉이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으면 했다. 드로잉 작품 선정은 주최 측 큐레이터의 몫이었지만.

당신의 모든 드로잉에서는 어쩐지 짓궂은 소년이 보인다.
다섯 살 때 그림 그리던 마음과 똑같은 느낌으로 드로잉 작업을 한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바로바로 그려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어떤 특정한 태도를 지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린 드로잉은 한 점도 없다. 드로잉할 때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건조한 유머와 냉소적인 풍자가 돋보이는 드로잉은 곧 당신 자신인 것 같다. 드로잉과 실제 데이비드 슈리글리 사이에 조금의 틈도 없어 보인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예의 그런 감성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20년 넘게 활동해오고 있으니까. 작품 속의 코믹함은 나의 유머를 재료 삼아 의도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처음부터 코믹하게 보이려는 의도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작품에 관해 설명하고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코믹함이 더욱 부각된 것 같다. 나 자신의 목소리가 이 작품의 목소리로 들렸을 테니까. 나의 작업을 지금과 같이 받아들이지 않던 때가 있었다. 이런 표현 방식에 고민이 많았다. 이제야 사람들이 이러한 뉘앙스의 예술을 즐기기 시작한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이제 중년이니까. 누가 이걸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은 거의 하지 않게 됐다.

드로잉에 집중했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사진, 애니메이션, 조각, 음악, 건축 등 다양한 매체로 확장해 작업을 펼친다. 심지어 이번 전시에는 당신이 만든 로봇이 추상 작업을 라이브로 해내는 작품도 있는데.
나의 추상 예술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로봇을 만들어봤다. 로봇의 이름을 ‘아티스트’라 붙였다. 이 로봇이 나 대신 예술을 하는 거지. 추상 예술을 말이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작업은 ‘Eggs’다. ‘Egg’라고 적힌 12개의 거대 달걀이 평대 위에 있다.

사실 그보다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Exibition’이다. 전시를 뜻하는 단어 ‘Exhibition’의 철자를 일부러 틀리게 적었다. 아마 관객이 발견할 수도 있고,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Eggs’는 달걀을 표현한 작업이다. 나는 ‘Egg’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발음하기에 짧아서 좋고 알이 없다면 새도 없을 테니까. 사실 나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언제나 다르게 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답을 한다. 내일 우리가 만난다면 아마 나는 또 다른 이야길 할 거다.

작업의 특성상, 지난 일보다는 현재를 표현하는 일이 많을 것 같다. 지금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가장 몰입한 소재는 무엇인가?

함께 사는 반려견이 있다. 그 친구를 소재로 작업할 때가 가장 즐겁다. 4년 동안 길렀는데 현재 전시 투어 일정 때문에 3주째 못 보고 있다. 굉장히 보고 싶다. 이번 전시에 박제된 타조 작품을 소개했는데, 반려견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는 박제 작업을 중단했다. 하고 싶지 않더라. 박제 작업으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다루었지만, 이제 더는 동물이 죽은 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이 바로 박제한 타조 ‘Ostrich’다. 타조 머리를 제거한 상태로 박제했는데, 머리를 제외한 이유가 있나?

‘Ostrich’ 앞에 선 사람들은 먼저 두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타조 머리를 제외하고 박제를 했을까?’ 혹은 ‘처음부터 머리가 없는 타조였을까?’ 정답은 없다. 다만 어떤 존재의 머리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할 뿐이다. 작품 자체의 의미가 굉장히 모호한데, 모호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점이 좋다.

이번 전시 타이틀이 ‘Lose Your Mind’다. 이 제목의 연장선상에 있는, 가장 거대한 작업이 ‘Ostrich’인 것 같기도 하다.

맞다. 전시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어떤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일이다. 그런 이미지로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이 ‘Ostrich’였다고 생각한다. ‘Ostrich’는 모호하기도 하지만 누구나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작업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저 머리가 제외된, 박제된 타조일 뿐이니까.

한국에서 열린 첫 전시다. 데이비드 슈리글리를 본 사람들에게 어떤 순간을 선사하고 싶은가?

나의 작품은 개념 미술이며 추상 예술이다. 개념 미술은 타인으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몸과 마음, 머릿속에 무엇을 일으킬 수 있다면 좋겠다.

조금 전, 전시의 개괄적인 소개를 하면서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 “제 작품을 이해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예술이란 그런 것 아닌가. 누가 뭘 하든 받아들이는 게 예술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모두에게 중요하다. 미술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도, 혹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언젠가는 그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만나게 될지 모르고, 심지어는 작품을 만드는 이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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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ER 김선익
ASSISTANT 김윤희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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