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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은 힘들다

<천년학>의 개봉을 앞둔 임권택은 힘들다. `100번째 영화`라는 타이틀, 해외 영화제 진출의 기대, <서편제>의 속편일 거라는 선입견이 오늘도 그를 괴롭히고 있다. <br><br>[2007년 2월호]

UpdatedOn January 18, 2007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이지영

칠십 먹은 노인네를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걸까. 100번째 영화 촬영을 마친 임권택 감독(이하 임 감독)의 어깨가 무겁다. 아니, 무겁다 못해 아주 커다란 돌덩이가 어깻죽지 전체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언제나 한 가지 테마에 열중하는 언론은 그에게 ‘100’이라는 숫자를 꾸준히 인식시키고 있다. 어딜 가나 그놈의 ‘100번째’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12월 8일 진행된 <천년학>의 현장 공개 기자회견에서 역시 같은 질문이 쏟아져나왔다. “100번째 영화 촬영을 마친 소감이 어떻습니까?” 생략될 수 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이미 질려버린 탓이었을까. 이제는 ‘100’이라는 숫자 자체가 진부하게까지 느껴졌다. 사실 ‘100’에 대한 끈질긴 테마는 지난 99번째 영화 때부터 시작된 바 있다. 이제 막 99번째 영화를 마친 노장에게 수많은 언론은 묻기 시작했다. “100번째 영화는 어떻게 계획하고 계십니까?” 그러는 동안 임 감독은 서서히 지쳐왔다. 그는 늘 “아직 아무것도 계획된 게 없다”고만 일축해왔다. 아마 그 때부터 지겨웠을 것이다. 이놈의 ‘100’이라는 숫자가.
“어쨌거나 100번째 작품을 맞이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100번째인데 어떻게 영화가 진행되느냐, 만날 물어오고 있어요. 저는 사실 100번째 작품을 그냥 가볍게 넘길 처지가 아닙니다.” 대놓고 ‘그만 좀 해라. 많이 써먹었다 아이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임 감독은 이미 지겹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덧붙였다. “100번째 영화라… 영광스럽긴 한데, 과거를 돌이켜보면 초기 한 10년 가까이를 일 년에 다섯 편, 여섯 편 이렇게 난작했던 시대가 있었거든요. 지금 와서 돌아보기도 힘든 작품들을 모두 포함해서 백 편이라고 하면 제 마음이 좀 껄끄럽습니다.” 알려진 대로 임 감독은 그저 되는 대로 다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늘 영화 인생 중반까지 내놓았던 50여 편의 작품에 대해 ‘흐트렁 망트렁 찍어낸 난작’이라 말한다. 그런 그에게 영화의 편수를 언급하는 것이란, 사실 껄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입장에서 그런 사연을 고려할 리 만무하다. 언론에게 ‘100’이라는 숫자는 이슈화하기에 너무나 매력적인 그것이기 때문이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획 당시 순 제작비 35억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시네마 서비스가 일시적인 경영난으로 자금 지원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서 영화는 공중에 떴다. 그러다 다행히(?) 롯데 엔터테인먼트가 투자를 하겠다고 나서서 잘되는가 싶더니만, 이번엔 캐스팅 문제로 투자가 좌초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임권택 감독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태흥영화사가 제작 포기를 선언했다. 언론은 또 한 번 ‘100’이라는 숫자를 들먹이며 수군거렸다. 노장의 100번째 영화가 결국 투자 문제로 제작이 무산됐다는 둥, 1989년부터 함께해온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와 100번째 영화를 앞두고 갈라섰다는 둥 말이 많았다. 노장의 필모그래피에 얘깃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초를 겪던 와중에 지금의 제작사인 ‘키노2’가 제작 투자자로 나섰고, <천년학>은 다시 날 수 있었다.
시작부터 부담과 시련을 동시에 짊어진 영화 <천년학>은 이청준의 <남도 사람> 연작의 마지막 이야기인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남도 사람> 연작 중 <서편제>와 <소리의 빛>은 이미 <서편제>로 만들어낸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임 감독은 <선학동 나그네>까지 한데 묶어 영화화하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찍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지. 그런데 12년 동안 <선학동 나그네>가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저거를 해야 하는데… 하며 마음에 담고만 있다가 결국 이제야 하게 된 거지.” <천년학>의 첫 장면은 해가 지고 산 너머에 그림자로 학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에는 이런 것들을 표현해낼 컴퓨터그래픽이 발달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천년학>은 (CG의 비약적 발전을)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나오게 된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나긴 사연에도 불구하고, <천년학>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불안하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기대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결과(기자는 50여 명의 일반인 모집단에 설문을 진행했다)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기대는 되지만 과연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임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을 꼽았다. 임 감독 자체에 대한 기대를 감출 수는 없으나, 전작인 <하류인생>을 떠올릴 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류인생>은 개봉 후 3주간 겨우 전국 55만 명을 기록하는 데 그친 바 있다. <취화선>으로 칸에서 감독상을 받은 임 감독이 ‘이번엔 대중적인 영화 한번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오랜만에 액션 영화를 찍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천년학>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지금에도 임 감독 자체에 대한 불안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관객들은 입을 모아 과연 <천년학>도 <하류인생> 같을까 봐 걱정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당시를 떠올려봤을 때 언론의 반응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하류인생> 개봉 당시 일반인과 언론의 반응은 완전히 엇갈렸다. 일반 관객은 ‘거장의 졸작이다’, ‘구식 그 자체인 영화’라고 얘기했지만 언론은 칭찬 일색이었다. 언론은 한결같이 <하류인생>을 ‘상류’라 포장했다. 영화지 <씨네 21>은 ‘임권택 추종자’라 통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과의 대담을 무려 6페이지에 걸쳐 담으며 <하류인생>에 총 10페이지나 할애했다. 그런데 그런 영화가 흥행에 참패했다. 그러니 관객은 아직 <천년학>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더 이상 언론을 믿을 수도 없으며, 동시에 임 감독에 대한 기대 역시 1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단 <하류인생>뿐 아니라 임 감독의 변치 않는 고집은 여전히 걱정과 우려를 동시에 낳고 있다. <하류인생>의 주인공이었던 조승우는 “매일 현장 대본이 나오니까 대체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는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다. 촬영 전 오랜 준비가 필요한 요즘 배우들에게 ‘현장대본’은 어쩌면 넘어야 할 하나의 높은 벽과 같은 것이다. 후시 녹음 방식 역시 관객들에게는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하류인생>을 보고 난 관객들은 “대체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후시 녹음이냐”며 혀를 끌끌 찼다.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의 줄다리기 역시 <천년학>이 지니고 갈 수밖에 없는 꼬리표다. 상업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에게 ‘영화제용 영화’라는 점은 결코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
<서편제>로 ‘한국 영화 1백만 관객 시대’를 열었던 그가 <춘향뎐>, <취화선>, <하류인생>을 내놓으며 줄줄이 흥행에 죽을 쒔다. ‘칸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이 대중성과 멀어지고 있는 현상은, 커다란 아이러니다.

임감독의 부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이 아니냐는 선입견을 짊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년학> 역시 ‘판소리’를 소재로 하고 있고, 게다가 여주인공(오정해) 역시 같다. 이에 임 감독은 그 난감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서편제>와 비교해봤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고는 있지만, 그 차이를 말로 설명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아야 하는 영화를 앞두고 있는 임 감독. 그는 그저 “전작들의 경우가 판소리를 축으로 했다면 이번 영화는 판소리를 배경으로 하는 러브스토리가 축이다”라고만 일축한다. 하지만 언론은 그것만으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언제, 어디서든 보다 구체적인 차이점에 관한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임 감독은 지난해 12월 8일 기자 간담회에서 역시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그는 “이번 영화는 논리로 풀어내서 논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전편인 <서편제>에서 도리 없이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 즉, 감독도 그때 그 감독이고 오정해 양도 그때 그 연기자라는 조건을 넘어서서 어떻게 또 다른 영화로 거듭날 것이냐에 대해 무척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나름의 설명이 되긴 했을까. 영화를 직접 보기 전에 두 작품의 명확한 차이를 집어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천년학>의 보도자료는 두 작품의 차이를 보다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서편제>가 소리로 승화된 한을 그렸다면, <천년학>은 소리를 타고 한없이 날아오르는 남녀의 사랑과 그리움을 펼쳐 보인다’는 게 <천년학>에 대한 공식(?) 설명이다. 이는 <천년학>이 다분히 러브스토리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예시한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 ‘송화’ 역을 맡은 오정해 역시 두 작품의 차이점을 설명해내기 바쁘다. 그녀는 “<서편제>의 송화는 힘겨운 소리꾼이었다. 반면 <천년학>의 송화는 힘겨운 가운데에서도 사람인지라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천년학>은 임 감독 최초의(?) 러브스토리일까. 임감독은 (본인처럼 나이 든) 노인이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그린다는 점에서 약간은 쑥스럽다는 눈치다. 그는 “나이 먹은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하려다 젊은 연기자들 만나서 영화가 젊어졌다”며 겸연쩍은 웃음을 보인다. 또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또 멀리 두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의 감정, 이런 것들을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영화보다 농도 짙게 찍어냈다”며 이 영화의 진한 로맨스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천년학>은 본래의 목적을 놓아두진 않는다. 즉, 러브스토리를 그려내느라 판소리를 뒷전에 버려두진 않는다는 얘기다. <서편제>가 소리와 영상의 승화였다면, <천년학>은 소리와 러브스토리의 만남이다.
“100이라는 숫자가 사람 죽이는 거요.” 임 감독은 ‘100’이라는 숫자에 대해 그리 괘념치 않겠다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이에 맞는 영화를 찍는 것이다. <천년학> 역시 나이에 맞는 작품이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100번째 영화로 <천년학>을 하게 된 것은 나이가 든 영화를 하자는 목표였습니다.” 언제나 나이에 맞게 가고자 한다는 이 노장 감독은, 그러나 나이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당장 <천년학>이 칸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벌써부터 뜨겁다. 게다가 <하류인생>에서 못다 한 대중성에 대한 기대 역시 그를 힘겹게 하고 있다. 임 감독은 새로운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 말한다. 그는 <취화선>의 촬영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예술가의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이야기한 바 있다. “모두들 장승업이 자유인이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평생을 영화에 매달려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게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속엔 무지 고통스러운 게 있는 거다.” 과연 장승업도 지금의 임 감독처럼 힘겹고 무거운 고통을 짊어지고 다녔을까. 왕이 병풍을 그리라 명령해도 담을 넘어 도망가던 그의 속내는, 그러나 보이는 것처럼 자유롭지 못했던 걸까. ‘100’이라는 숫자를 등에 업은 임 감독의 어깨가 유난히 힘겨워 보인다.
과연 그는 언제쯤 모든 시름을 벗어던진 채 껄껄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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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이지영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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