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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잡을 수 없는

On August 09, 2016

씨익, 웃으며 예의 소년 같은 미소로 맞이한다. 긴장이 풀리나 싶더니,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깊이 침잠한다.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의 막을 금세 형성한다. 그러다가 꾸벅, 인사하며 실없는 동네 형처럼 주변 공기를 환기한다. 준비 없는 태세 전환. 그런데 박해일은 스스로 지루한 사람이라 말한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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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로브는 크로키 글로우 제품.

줄무늬 로브는 크로키 글로우 제품.

문득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이다. 장률 감독 영화가 있긴 했지만.
마지막 상업 영화가 <나의 독재자>였다. 재작년 10월쯤 개봉했다. 2015년에는 장률 감독의 <필름시대사랑>에 출연했고. 같은 해 6, 7월쯤 허진호 감독님 만나서 같이 하자고 했다. 준비 기간이 길었다.

11월 말쯤 촬영 들어가 올해 3월 중순쯤 마쳤다. 일부러 쉬거나 한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바로 시작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어서, 아, 그냥 천천히 가라는 거구나, 했다. 이럴 때도 있어야지, 하면서 애써 서둘러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덕혜옹주>에서 맡은 캐릭터가 빨리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싶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작품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정성을 많이 쏟게 되나?
연기하는 분들마다 다른데, 난 이번에 허진호 감독님과 자주 만나 얘기했다. 작품 외적으로도 알고 싶었다. 일상적인 대화부터 영화 이야기, 또 살아온 이야기까지 많이 들으면서 영화를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하면 사실 더디고 답답할 수도 있지만, 서두르지 않는 게 그때 마음가짐과 잘 맞았다. 난 되게 좋았다.

허진호 감독과 한번 해보면 좋겠다, 하는 마음은 배우라면 있을 듯하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허진호 감독님이 현장에서 찍어나가는 방식과 분위기에는 배우가 굉장히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게 있다고. 궁금하기는 했다. 이참에 잘됐다 싶었다. 느껴보고 싶었다.

해보니 잘됐다 싶나?
괴리감은 거의 없었다. 예상한 대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내가 보고 느끼고 싶었던 거구나, 하면서 많이 즐기면서 촬영했다. 일단 배우가 자연스럽게 하는 걸 먼저 보고, 그다음에 배우의 감정이나 정서에 관해 얘기하고, 상대 배우와 맞춰도 보면서 살짝살짝 원하는 방식으로 유도하는 스타일이었다. 충분히 상의하면서 타박타박 잘 찍어나갔다.

그런 식이 연기할 때 편한가? 연기자마다 성향이 달라서 하는 말이다.

맞다. 음… 작품마다 다르다. 작품의 성질에 따라 다르고, 장르나 캐릭터의 느낌에 따라서도 다르다. 어떤 건 타이트하게 감독이 포착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딱 보여주고 싶을 때도 있고, 어쩔 땐 내 정서를 따라가지 않으면 뭔가 낯설고 어색할 때도 있다.

현장에서 일관된 건 없다. 내 정서로는 명확해요, 하고 먼저 나설 수도 있고, 주위에서 보기에 배우가 머뭇거리는 느낌이 있으면 채워주기도 하고. 그게 연출과 배우관계인 거 같다.
 

칼라가 없는 셔츠는 김서룡 옴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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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수트는 오디너리 피플, 셔츠는 살롱 드 서울, 팔찌는 모니카 비나더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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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는 암위, 꽃무늬 셔츠는 비욘드 클로젯, 바지는 크로키 글로우, 슬리퍼는 슈즈바이런칭 엠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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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감독님 영향이 크게 작용하겠다.
그렇다, 난.

그런 면에서는 복 받았다. 지금까지 작업한 감독 면면이 다 쟁쟁하니까.
복 받았다. 복 받은 사람, 하하하.

인간관계나 일할 때 상대와 동화하는 편인가?

우선 연출과 배우 입장에서는 그렇다. 연출이 이걸 왜, 이 작품을 왜 하는지, 그 부분을 들어봐야 한다.

그래야 서로 이해하고 그 지점에서 나라는 배우가 보여주고 취해야 할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서로 의견을 내면서 뭐가 시너지인지 고민하며 합의점을 결과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런 방식으로 임했나?
데뷔작이 임순례 감독님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인데, 작업 자체나 임순례 감독님도 배우한테 맡겨주는 스타일이었다. 내게는 영화를 처음 접하는, 첫 경험이어서 아무래도 그런 성향이 남아 있다.

물론 계속 작품에 출연하며 그렇지 않은 감독님이나 작품을 만나면서 또 이걸 고수할 수만은 없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다. 상황에 내가 맞출 필요도 있고, 어떨 때는 내게 적합한 느낌을 주장할 때도 있고. 갈수록 복잡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같이 만들어가는 거라는 생각은 항상 놓지 않는다.  

보통 어떤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나? 딱히 하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다는 얘기가 아닐까?
아무래도 전 작품과 기운이 많이 닮았거나 발전시키면 재밌을 만한 시나리오가 공통적으로 들어온다. <덕혜옹주>를 했으면 그 시대 다른 내용의 작품이 들어온다든가, <제보자>를 했으면 언론 쪽 역할이 들어온다든가.

이런 식의 일반적인 패턴은 있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적어도 영화가 개봉하고 DVD 코멘터리까지 할 상황을 염두엔 둔다. 배우로서 마지막 작업까지 내가 이어갈 수 있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영화인가 하는 기준점으로 선택한다.

배우 박해일은 연기 자체만으로 영화를 보고 싶은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다. 소년부터 속물, 단정하면서도 광기 어린 모습까지 여러 이미지가 꽤 잘 스며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맞나?
나름… 음, 나라는 사람이, 배우가 해볼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도전하기도 했고, 어떤 건 도움받기도 한다. 항상 그렇다. 뭔가 하나로 얘기할 수는 없다. 단 전제는 강력한 호기심인 거 같다. 직관적인 느낌. 결국 나라는 사람에서 출발하는 거잖나.

반대로 얘기해보면, 관객은 결국 박해일이라는 배우의 모습에 호기심이 계속 발동했다는 것이겠다.
그렇게 봐주시면 정말 힘이 난다. 그런데 그걸 많이 느낄수록 부담도 커진다.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관객이 이 작품을 봤을 때 이런 시선으로 감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관점으로 연기할 때도 있다. 소통이 됐다, 안 됐다는 점이 결과로 나올 수도 있다.

내게 영화는 대화 도구다. 어쩌면 관객에게 말 걸기다. 내 말이 잘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수준에 못 미쳤을 때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주기적으로 해나가는 거다. 이런 지점은 항상 견지하려고 한다. 어떤 얘기로 말 걸고 싶다. 사회적 함의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는 시대적 느낌일 수도 있다.

배역과 배우를 동일시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실제로도 소년과 광기까지 성격 스펙트럼이 넓을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선입견이겠지만.

영화라는 테두리에서 해온 캐릭터가 일관될 수만은 없잖나. 대중 영화 입장에서는 더 다양한 패턴을 원한다. 인물이 갈등할수록 관객은 더 재미를 느끼니까 그렇게 되는 거 같다. 일상에선 내가 뭐 스님이 아닌 이상, 하하하.

보편적 수준에서 특별할 거 없다는 말인가?

맞다. 오히려 영화 속 캐릭터에 비해 평범하고 무디다. 안정을 찾고 싶어 하고. <덕혜옹주>에서 맡은 김장한 캐릭터는 굴곡이 많은데,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굴곡이 이렇게 클 수 있겠나. 평상시에는 좀 더 담담하게 살다 새로운 작품에서 들이닥칠 것들을 준비한다. 일상에서는 평온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일상 관련 이야기가 지극히 적다. 술은 많이 마신다고 듣긴 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많이는 아니라 조금씩 자주 먹는다, 하하. 가볍게 말하자면, 일상이 말 그대로 일상이잖나. 근데 일상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배우 분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일상과 작품 사이를 들락날락해야 하니까.

쉴 때도 나를 오랫동안 던져놓고 여행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상에서 계속 사람을 만난다. 그래 봐야 다 문화계 사람이다. 그러거나 혼자 근처 뒷동산 올라가서 산책한다. 혼자 집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하.

배우라는 화려하고 독특한 면을 빼면 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대중이 배우를 바라보는, 기대하는 지점이 있잖나. 그런 면에선 명확히 지루한 사람이다, 하하.

이제 어느 순간 자기를 돌아볼 시기 아닌가? 그동안 작품 수도 꽤 많다.
이제 선택과 집중을 잘해서 작품을 하나하나 잘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큰 시기다. 20대 때는 어떤 조바심 또는 쑥스러움, 낯섦 때문에 즐기지 못했거나 더 보여줘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있다.

대신 열정이 넘쳤기에 작품에 담은 것도 있겠지만. 앞으로 해나가면서 덜 후회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 한다. 또 많은 감독님을 만나면서 그들의 영화적 철학을 옆에서 힐끔힐끔 보거나 또는 그분들이 내게 던져주신 경험이 이제 조금씩 쌓여서 다음 작품을 할 때 감정을 놓치지 않고 싶다는 기분이 크다.

배우에게는 선택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근원적 불안감이 위치와 상관없이 있다고 한다.
불안감이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 라기보다는 불안보다 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져서 불안이 밀려나는 자연적인 효과가 있다. 예전에는 불안 하나 때문에 괴로워했다면 이제는 맡은 역할에 대해 생각할 부분이 더 많아졌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걸 좋은 긴장감으로 가져가고 싶긴 하다. 사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달라지잖나.

그 불안감은 달리 말하면 익숙함을 넘어서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의 숙명과 맞닿는다.

확실히 그 지점은 고민한다. 익숙함이 좋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방해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때는 맞고, 어느 때는 틀린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란 게 혼자 모든 걸 결정하는 상황이 아니잖나.

차라리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 스태프와 더 많이 얘기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우리가 계속 지향해야 할 것을 순간순간 확인해나가는 게 더 좋다고 본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이제는 좀 더 많은 이와 합리적으로 만들어가려고 한다.

스스로 좀 성장했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나잇값은 해야겠다, 라는 생각은 항상, 하하하.

배우로서 목표는 뭔가? 하고 물어보려다 문득, 박해일에게는 이런 질문이 의미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 따윈 뭐, 이렇게 받아들일 거 같다는 생각?
하하하. 정리해놓은 목표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해보려는 작품 안에서 호기심을 느낄 때 그 지점을 잘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잘 만들어내고 싶다. 작품 안에서 순간적인 목표인 거다.

이번 <덕혜옹주>가 배우 박해일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할 거 같나?

좋은 계기였다. 지금까지 해온 영화적 경험을 다 끄집어내 <덕혜옹주> 속 내가 맡은 김장한이란 캐릭터에 잘 융화해서 소진해보자, 그러고 40대를 맞이해보자는 느낌이 있었다. 이 작품은 그렇게 느꼈다. 또 다른 시작점인 거 같기도 하다.

엄청나게 중요한 영화네?

하하. 작품마다 포인트가 있는데, 이번엔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 아, 저래서 얘기한 거야? 하고 볼 수 있다. 기존 필모그래피가 스르륵 느껴질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럴 거 같다.

씨익, 웃으며 예의 소년 같은 미소로 맞이한다. 긴장이 풀리나 싶더니,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깊이 침잠한다.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의 막을 금세 형성한다. 그러다가 꾸벅, 인사하며 실없는 동네 형처럼 주변 공기를 환기한다. 준비 없는 태세 전환. 그런데 박해일은 스스로 지루한 사람이라 말한다. 설마.

Credit Info

Editor
김종훈
photography
레스
STYLIST
정주연, 지윤지(D 12.)
HAIR
봄(파인트리)
MAKE-UP
경연(파인트리)
ASSISTANT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