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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와의 동침

사극과 일일극을 중심으로 한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망해가는 부자의 곳간을 보는 듯 초라하다. <프리즌 브레이크>와 <CSI>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는 드라마 키드의 미국 드라마 분석서.<br><br>[2007년 1월호]

UpdatedOn December 21, 2006

Words 김태영(온스타일 PD) IIllustrator 장재훈 Editor 김민정

삼순이 이후 나를 TV 앞으로 잡아끈 매력적인 한국 드라마 캐릭터는 투명인간 ‘최장수’와 짜장예슬 ‘나상실’뿐이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지 , <위기의 주부들>, <하우스>, <그레이 아나토미>, <프리즌 브레이크>, <24>, <로스트>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미국 드라마가 안방극장의 또 다른 블루칩으로 등장했다. P2P를 통해 많은 이들이 섭렵한 이름의 미국 드라마들이 최근 새삼 대두되고 있다. 이는 장르의 답습과 소재적 한계를 깨지 못하는 뻔한 드라마 트루기만을 간직한 채 성장을 멈춘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2006년 미국 드라마는 대단했고, 2007년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새 시즌, 새 에피소드에서 밤 깎아놓은 듯 반듯한 ‘석호필’을 보고 있는 지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서 뒹굴고 자고 먹고 지금까지 성장해온 정통 드라마 키드다. 다 찢어져도 중요 부분만은 가려주는 센스 바지를 가진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맥가이버 칼이라 부르게 만든 <맥가이버>, 생쥐를 날로 먹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두 눈을 가리게 만든 <브이>, 말하는 전천후 자동차 키트가 등장하던 <전격제트작전>, 멀더와 스컬리의 (<천사들의 합창>도 있었다고 하면 유치할까)…. 여기에 1980년대 일요일 정오의 <초원의 집>과 <제시카의 추리극장>도 덧붙이겠다. 지금은 오락 프로그램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시간대에 숱한 미국 드라마를 접하며 자란 세대들. 나는 감히 이들을 미국 드라마 키드라 부르고 싶다. 그들은 자라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을 만났고, <트윈픽스>에 열광했으며, 급기야 에 이르러 미국 드라마의 마니아를 자처하며 <질투>,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이후 지속된 한국 트렌디 드라마 열풍 속에서도 미국 드라마 키드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왔다.
한국 트렌디 드라마 열풍 덕에 하나 둘 공중파에서 사라져간 미국 드라마들. 하지만 미국 드라마 키드들은 트렌디 드라마가 팽배하던 1990년대 중반, 컴퓨터 통신을 통해 <프렌즈>와 의 새로운 시리즈들을 미국과 거의 실시간으로 호흡했고, 인터넷으로의 전환과 케이블 TV의 등장을 통해 그들의 활동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 드라마 중흥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당시 케이블을 통해 만난 시리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섹스&시티>와 <프렌즈>. 21세기를 바라보던 시절에도 ‘섹스’라는 단어는 입에 선뜻 담기 힘든 금기어였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으리라. 뉴욕의 서로 다른 4명의 여자들이 만들어낸 성공과 성, 연애에 대한 가볍고도 진지한 담론은 전 세계 여성들에게 상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프렌즈>의 여섯 친구들도 마찬가지. 친구와 연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상적인 인간 관계와 또래가 가진 고민에 대한 지침서가 되어주는 내용은 미국 드라마 키드는 물론 대학생, 고등학생까지 <프렌즈>를 영어 교재로 만들게 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이후 <밴드 오브 브라더스>, <윌&그레이스>, <70’s Show>, <웨스트윙>, <소프라노스>, 등의 미국 드라마 화제작들이 국내 케이블을 통해 방영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급기야 과거 공중파에서 방송했던 <맥가이버>, <제시카의 추리극장>, <브이> 등이 재방송되고, 시리즈 프로그램만 상영하는 채널까지 생겼다. 특히 의 경우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화 채널 OCN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며 하루 24시간이라는 파격적인 편성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불러모았다. 미국 드라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들 미국 드라마의 인기는 파격적 소재를 일상적 주제에 녹여내는 세련된 화술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초입체적인 캐릭터들에 있다.
명확한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입체적인 구성과 캐릭터는 모든 창작물의 근간이 되는 성공 요건이다. 수많은 한국 드라마는 남녀 간 사랑의 결실이라는 뻔한 주제와 단선적 캐릭터로 자기 함몰되어가는 진부한 내용이다. 그러나 미국 드라마는 다양한 인생사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며 큰 공감을 얻는 드라마 트루기의 충실도와 전문성을 가진 풍성한 캐릭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캐릭터와 드라마의 충실도는 비단 멜로, 드라마 장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 , , <위드아웃 어 트레이스> 같은 독특한 소재를 다룬 드라마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를 예로 들자. 한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전개 방식은 마치 일본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에 관련된 증거들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수사 장르의 외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가 다른 유사 수사 장르와 차별화되는 점은 화려한 영상, 독특한 소재를 발굴하는 능력 이외에, 7시즌을 이어오는 동안(마이애미와 뉴욕까지 포함하면 15시즌) 5명의 캐릭터가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화려한 외향은 쉽게 질리는 데 반해, 탄탄한 캐릭터들로 이뤄진 구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45분의 드라마를 보는 중 40분이 범죄 수사이고 딱 5분 정도 캐릭터에 대한 설명과 그에 대한 일상이 보여지는데 우리는 모두 그 5분에 낚이는 것이다.
더불어, 미국 드라마에서 소재 채택에 있어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접근하기 힘든 성역들에도 꾸준히 도전한다. <섹스&시티>도 그랬고, <위기의 주부들>도 그랬다. 또 미국에서 6월에 방영되었고, 2007년에 캐치온에서 방영 예정인 <빅러브>라는 미국 드라마는 일부다처제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세계 어딘가에는 분명 일부다처제가 존재하고 몰몬교라는 종교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 가정이 일부다처제라는 설정은 꽤 센세이셔널하다. 의 등장도 그랬고, 드라마라는 한계상 다루기 힘들었던 전쟁을 소재로 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 비행기 사고로 외딴 섬에 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로스트>, 성형 수술에 대한 적나라한 진실 <닙턱> 등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소재의 개발은 미국 드라마가 오랜 시간 인기를 얻게 한 원동력이다. 미국 영화들이 아시아 영화와 카툰들을 리메이크하며 자신들의 생산성을 근근이 유지하는 것에 반해 미국 드라마의 끝은 예측 불가능하다.
또 미국 드라마의 파일럿 시스템과 같은 과정을 통해 드라마 장성의 초석을 고르고 있다.
추리다큐 <별순검>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조선시대판 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등장한 이 드라마는 국내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으로 파일럿의 형태를 띠었고, 추석 특집으로 방송되었다가 2개월이 채 못 되는 기간에 종영 되었다. 이런 파일럿 형태의 제작을 통해 시청자 반응은 물론, 시청률에 대한 개략적인 예측과 향후 드라마의 향배를 결정하는 것이다. 미국 드라마는 이 같은 파일럿 과정을 엄격하게 거친다. 병아리 감별사보다 더 엄격한 시청자를 통해 양질의 프로그램은 시즌을 거듭하며 롱런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1, 2회 만에 종영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 드라마 시장의 엄격한 파일럿 시스템은 더욱 탄탄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럼으로써 거대 자본이 들어간 대작뿐만 아니라 적은 자본으로도 제작할 수 있는 아이디어 넘치는 작품들도 미국 드라마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최근 들어 방송된 <마이네임 이즈 얼>이나 <위기의 주부들>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많은 미국 드라마가 들어올 것이다. 2007년에 케이블을 통해 시청자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작품만 해도 <프리즌 브레이크>, <그레이 아나토미>, , <24>의 새 시즌, <히어로스>, <4400>, <어글리 베티>, <콜드 케이스>, <빅러브>, <위드아웃 어 트레이스> 등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오는 걸작들이다.
세상은 넓고 볼거리는 많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드라마의 세계는 이제 겨우 문이 열렸을 뿐이다. 벌어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인도하는 그곳에 밝게 켜진 텔레비전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곳에 미국 드라마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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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김태영(온스타일 PD)
IIllustrator 장재훈
Editor 김민정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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