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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다시 파리 컬렉션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2010년을 겨냥한 봄여름 남성복 쇼다. 하늘에서의 11시간, 강압적 공중 부양의 불편함을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책뿐이다. 책을 읽어야 짓눌린 엉덩이의 절규도, 피 몰린 발가락의 발광도, 척추가 내지르는 한숨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br><br>

UpdatedOn August 08, 2009

 

다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다시 파리 컬렉션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2010년을 겨냥한 봄여름 남성복 쇼다. 
하늘에서의 11시간, 강압적 공중 부양의 불편함을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책뿐이다. 책을 읽어야 짓눌린 엉덩이의 절규도, 피 몰린 발가락의 발광도, 척추가 내지르는 한숨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이번엔 결연한 문장 하나를 취했다. 말 그대로 공중 포획이라고나 할까.
소개하겠다. 이런 문장이다. ‘샤워는 좌파에 목욕은 우파에 속한다’. 동의하시겠는가? 미셸 투르니에의 이 결정적 이분법을. 지나치게 단호하지만 수긍 가능한 논리다, 적어도 나에겐.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수평적 자세로 휴식을 취하며 따스한 물속에 잠긴 자. 반면 수직적 자세로 타일 바닥의 차가움을 감내하고 맑은 물을 맞는 자. 전자가 목욕파고 후자는 샤워파다. 샤워파에겐 두툼한 창이 있다. 서 있는 자는 누워 있는 자보다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세다는 거다. 샤워파에게는 날랜 검이 있다. 언제나 문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문장을 좌심실 옆 심박동 주머니에 접어 넣고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파리 컬렉션이 시작됐다.
경건하기까지 한 YSL 옷들이 묵직한 컬러를 입고 런웨이의 포문을 열었다. 라프 시몬스, 드리스 반 노튼, 지방시, 준야 와타나베, 앤 드뮐미스터, 루이 비통, 디올 옴므, 송지오, 겐조, 에르메스, 준 지, 크리스 반 아쉐, 랑방, 마틴 마르지엘라, 우영미, 웅가로, 버나드 윌헴,  폴 스미스를  끝으로 나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쇼는 끝났고 그제서야 나는 트루니에의 문장을 꺼내 들었다. 후끈한 더위와 지옥 같은 교통 체증과 싸워야 했던 이번 컬렉션에 맑은 물을 쏟아 부은 샤워파를 솎아내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지고 트렌드라는 깃발을 앞서 휘둘러야 하는 자에겐 샤워파의 기상이 넘쳐나야 하므로. 목록을 작성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준야 와타나베, 랑방, 루이 비통, 에르메스, 폴 스미스. 그렇게 적고 나니 최근 두각을 나타낸다는 젊고 끼있는 디자이너들이 한 발 물러서 있다. 누구나 안다. 지금의 디자인이 나가야 할 길이 ‘신사인 체하는 남자’를 그려내는 것임을. 그래서 누구나 한다. 대부분 ‘모던 클래식’이란 명제 아래 옷을 만든다. 하지만 누구나 성공하진 않는다. ‘진짜 신사’와 ‘부랑아’ 사이에 존재하는 ‘신사인 체하는’ 수준을 표현하기란 나비가 날아가듯 복어회를 뜨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준야 와타나베의 쇼는 기존 것들을 병렬 조합했음에도 나오는 모델 족족 ‘신사 친구를 가진, 신사인 체하는 남자’로 보였다. 그건 미묘하게 변화된 체크 패턴, 낙낙하지만 깡총한 길이의 팬츠, 클래식 액세서리의 자유로운 조합이라는 삼단 공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누군가는 준야 와타나베의 쇼가 늘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체크무늬 안에 숨어든 주홍과 청보라색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색들을 자신의 팔레트에 감춰두고 온밤을 새워 붓끝을 놀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또 한 명의 ‘샤워파’는 폴 스미스. 그의 쇼를 보고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쇼가 중반부로 치달을 즈음, 그의 상징물인 발랄한 꽃무늬가 삭제되었음을 감지했다. 심지어 줄무늬마저도 숨어버렸다. 뭔가 확실히 달랐다. 구름으로 바뀐 패턴들과 눈을 찌를 듯 강렬한 녹색과 파란색의 행진. 이 재기발랄한 노장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슬슬 궁금해질 무렵 쇼는 피날레로 접어들었고, 사십여 명의 모델들이 한꺼번에 캣워크로 쏟아져 나왔다.

아, 그때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가 쇼장 안을 강타했다. 정중함을 벗어던진 모델들은 런웨이를 춤추며 뛰어다녔고 그 무리 안엔 연분홍 셔츠와 청록색 구두를 걸친 폴 스미스 경이 섞여 있었다. 그도 역시 춤추며 박수치며 뛰어다니고, 그랬다. 그날은 팝의 황제가 사망한 지 사흘째 접어드는 날. 그는 이번 쇼를 영웅에게 바친 것이다. 누구나 잭슨의 사망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잭슨을 쇼와 연관 지을 만한 순발력을 갖진 못했다. 유일하게 그만 그게 가능했다. 고인이 된 잭슨의 음성이 쇼장을 장악했을 때 모두의 코끝은 붉어졌다. 그의 검술이 빛났던 통쾌한 순간.     

사실 완벽하게 입기 좋은 옷을 지어낸 에르메스 컬렉션도, 기모노 슬리브와 배기 팬츠의 변형을 보여준 랑방도, 쇼장에 모래 언덕을 지었던 겐조도, 전에 없던 컬러 배합으로 감동을 줬던 루이 비통도 모두 박수를 보낼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두 쇼만을 길게 언급하는 건 치기 어린 후배들의 도전을 충실한 기본기로 모두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와타나베의 튼실한 방패와, 젊디 젊은 누군가보다 시원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폴 스미스의 예리한 검이 최고의 성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번 컬렉션에선 그랬단 말이다.

  

아레나 옴므 플러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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