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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민자

꽃무늬 냉장고와 에어컨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요즘, 민무늬 냉장고를 급구하는 자로서 한마디 하련다.<br><br>

UpdatedOn May 25, 2009

"너는 누구 배에서 나왔기에 이렇게 고집이 세니?” 이사할 집에 놓을 냉장고를 찾다가 엄마는 드디어 나의 존재마저 부정할 정도로 화를 냈다. 하얀색 바탕에 분홍색 재스민이 무려 3개나 그려진 ‘퍼니처 스타일’ 냉장고 앞에서 화를 낸 것이다. 엄마가 아무리 성을 낸대도 나의 은색 플로어 스탠드와 이케아의 흰색 천 소파, 알레시의 수저 세트들과 저 꽃무늬 냉장고는 심플한 수트에 보석 박힌 빨간 넥타이를 매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꽃이 작지 않느냐(실제로도 장미나, 아네모네 중 재스민이 제일 작았다)며 화사하니 좋지 않느냐며, 심지어 너는 잡지사 기자라는 애가 왜 이렇게 트렌드를 모르냐는 구박까지 했다. 실제로 계속 민무늬 냉장고를 찾는 나에게 점원은 “요즘 트렌드가 아닌데… 저렴한 것 찾으시나 봐요?”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엄마를 더욱 자극하는 말을 했다. 순식간에 나는 취향도 돈도 없는 여자가 돼버린 거다. 패션지 기자로 매번 ‘에지, 시크’ 운운하며 크리스찬 라크르와의 꽃무늬 셔츠보다 라프 시몬스의 화이트 셔츠를 권하던 나는 재스민이라는 절충안에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결국 진열대 구석으로 가서 사양이 그저 그렇다는(그래서 점원이 친절한 설명도 곁들이지 않는) 민무늬 티타늄 냉장고 앞에 섰다. 잘 긁히고, 소음이 좀 있다는 단점만 늘어놓더니 그마저도 재고가 없어 2주는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그날의 쇼핑은 결국 허탕을 쳤고, 엄마는 대학 원서를 넣을 때처럼 ‘네 맘대로’ 하라며 고향집으로 내려가셨다.

꽃무늬 가전은 ‘아트 가전’ ‘인테리어 가전’ ‘패션 가전’이라는 고상한 동의어를 가지고 있다. 도대체 자주색 컬러에 장미꽃, 회오리 다이아몬드 장식이 무슨 아트고 패션이란 말인가. 하지만 더 큰 배신감은 삼성과 LG의 글로벌 웹사이트를 여는 순간 다가왔다. 그들이 아트다, 패션이다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꽃무늬 가전이 단 한 제품도 없었던 거다. 오히려 삼성전자 웹사이트에선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냉장고가 ‘세계 트렌드에 맞춘’이라는 주석을 달고 소개되었다. 여기서 재스퍼 모리슨이 누구냐고? 재스퍼 모리슨, 미니멀 디자인의 대가이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자신의 개인관이 있는, 21세기에 손꼽히는 유명 산업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의 냉장고를 쓸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가 그 유명한 재스퍼 모리슨을 모를 일도 없을 텐데. 디자이너 하면 앙드레 김만 떠올리게 된 데는 기업의 탓이 제일 크다. 물론 언제나처럼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제품만 출시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도대체 한국인의 취향을 40~50대 주부의 취향에만 맞춘다는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걸까. 또 휴대폰이나 자동차의 경우처럼 어차피 팔릴 것이니(그도 그럴 것이 다른 수입 브랜드의 냉장고는 가격이 2배가 넘는다) 마케팅 비용 절감 차원에서 다양한 제품보다는 한 가지 스타일만 밀자는 속셈이다. 문제는 ‘아이덴티티’라는 건 진즉 찬물에 밥 대신 말아 먹은 양 각 브랜드들이 유독 꽃무늬에만 열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냉장고에 이어 에어컨, 공기청정기, 심지어 다리미에 이르기까지 꽃무늬가 쓸고 갔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리 요리조리 피해봐도, 집 안에 꽃무늬가 가전을 한 대도 안 놓고는 살 수 없는 ‘꽃무늬 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꽃무늬를 고르지 않으면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미디어가, 점원이, 김희애가, 윤은혜가, 엄마가 강요하고 있다. 특히 꽃무늬 가전을 ‘자연친화적인 디자인’이라 두둔하는 미디어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어쨌든 나는 트렌디하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고집이 센 사람도 아니며,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단지 꽃무늬가 싫고, 나의 은색 플로어 스탠드와 이케아 화이트 소파, 알레시 수저 세트에 어울리는 냉장고를 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게도 선택의 기회 좀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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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민정
ILLUSTRATION 차민수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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