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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

주인이 서너 번 바뀐 집이라 벽의 자재를 뜯어내면 그 안에서 제2의, 제3의 자재가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게다가 본연의 건물 구조가 드러나려면 천장의 끝까지 뚫고 또 뚫어야 했다. 철거는 꼬박 삼일 밤낮이 소요됐지만, 결국 전선과 시멘트만 남은 헐벗은 공간으로 환골탈태했을 땐 `간지 난다`고 기뻐 날뛰기까지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br><br> [2006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1, 2006

 

2년전 크리스마스. 남편이 홍대 앞에 와인바를 오픈했다. 그의 의욕과 자금에서 비롯된 일이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을 요량이었으나 ‘오늘의 피로는 오늘 풀자’라는 적색 구호를 내건 박카스란 상호의 소줏집-그것도 세 달이나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는-을 와인바로 개조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근심이 눈덩이처럼 불어 뒷짐만 지고 있을 노릇은 아니었다. 위치 역시 좋지 않았다. 클럽 문화의 정수라는 M2 근처라고는 하나 말이 그렇지, 위치를 설명하자면 변변히 이름 댈 만한 가게 하나 없는 골목에, 그것도 동굴 같은 지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늦가을의 신성한 공기는 이성을 밀쳐냄과 동시에 정열을 부추겼고, 무모한 부부는 홍대 앞 밤거리로 거침없이 입성하고야 말았다. 우리 부부 모두 ‘간판’을 중요시하는 성격인지라 우선 바의 이름부터 정했다. 나는 정원영 음반에 수록된 연주곡 제목인 ‘니콜과 하룻밤’을 주장했다. 일견 외우기 쉽고, 왠지 끈적한 것이 지하동굴을 찾은 자들에게 하룻밤의 낭만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는 간곡한 설명도 덧붙였다. 게다가 그 음반은 남편이 디렉팅한 것이었으니 나름 의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의견은 무시됐다. 사흘 밤낮을 고민하더니, 비틀스의 연주곡 중 하나인 ‘12bar original’이라는 알쏭달쏭한 타이틀을 주장했다. 난 수용했다, 물주가 아니니까.
시작이 가장 쉬웠다. 기존의 것들을 모두 때려 엎는 것이었으니까. 거침없이 뜯어내고 무자비하게 부수고 한 톨의 먼지까지 싹싹 쓸어냈다. 물론 생각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주인이 서너 번 바뀐 집이라 벽의 자재를 뜯어내면 그 안에서 제2의, 제3의 자재가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게다가 본연의 건물 구조가 드러나려면 천장의 끝까지 뚫고 또 뚫어야 했다. 철거는 꼬박 삼일 밤낮이 소요됐지만, 결국 전선과 시멘트만 남은 헐벗은 공간으로 환골탈태했을 땐 ‘간지 난다’고 기뻐 날뛰기까지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다음은 내부 구조의 콘셉트를 정해야 했다. 합의된 내용은 매우 간단하지만 도도했다. ‘노출 콘크리트를 기저로 한 인더스트리얼 스타일’. 밀란과 런던, 그리고 동경의 라운지 바를 두루 섭렵하며 눈동냥한 것을 거만한 입술로 내뱉는 것쯤 누가 못할까. 무지하게도 난 노출 콘크리트 형태의 벽은 그냥 건물 자체 시멘트를 생으로 사용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시간이 은근히 묻어나는-해외의 라운지 바에서 보았던-벽은 기존의 공간에 고급 시멘트를 얇게 칠한 후 그 위에 부식 코팅액 비슷한 걸 칠해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연출해야 하는 거였다. 못해도 그 작업만 일주일은 더 걸렸다. 그뿐인가. 심심할 정도로 네모반듯한 공간에 음각과 양각을 주기 위해 입구 정면에서 보이는 벽은 튼튼한 합판으로 아예 모양을 짜넣고 그 위에 시멘트를 칠하고 부식액을 붓는 이중 작업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입구 왼쪽의 긴 벽만은 앤티크 벽돌로 쌓아 장식하기로 했다. 나중에 전시 공간으로 활용될 벽이라 특별한 조명으로 장식하고 싶었고, 사방이 모두 시멘트인 공간은 시기적으로 식상한 면이 없지 않아서다. 또 붉은 벽돌은 시멘트의 차가움에 훈기를 불어넣지 않겠는가? 선명하게 붉고 흠 없이 각진 벽돌-사실 이게 많이 싸다-대신 소금꽃이 핀듯 희긋희긋 구워낸 벽돌을 선택했다. 유럽 공장 지대 담벼락을 표현하기 위해 쌓는 방식을 달리했고 4×9m의 공간에 퍼즐 맞추듯 벽돌을 꽂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벽에 매달려 정으로 벽돌 하나하나에 일부러 흠집을 냈고, 그 위에 폐오일을 얇게 펴발랐다. 최초의 콘셉트인 ‘인더스트리얼’에 부합하기 위함이었다. 여기까지의 공사는 얼굴에 로션 하나 바르는 정도의 기초 스킨케어 단계에 불과하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분칠도 하고 눈썹도 그리고 속눈썹도 붙이고 립스틱도 칠하고 아이라인에 볼터치까지 해야 한다.
톱과 못을 검과 활처럼 다루는 무림의 고수들이 나타나 바와 조리대, 진열대를 나무로 재단했다. 종이인형처럼 정교하게 오려진 나무 조각들은 낮고 소박한 바로, 길쭉하고 군더더기 없는 진열장으로, 라인이 깔끔한 싱크대로 거듭났다. 이후 마감 전문인 40대 ‘칠박사’가 나타나 진열장과 바를 스칼렛 레드로 칠했고, 싱크대에는 트윌라이트 블루 원형 타일을 장식했다. 가봉 상태의 옷을 입은 꼴이었지만 이제 이 지하의 동굴은 누가 봐도 ‘바’라는 원형을 눈치챌 정도는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한숨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조명과 가구를 세팅해야 했다. 사실 25평 남짓한 구멍가게 수준이라 데커레이션 과정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했다. 패션 화보와 인테리어 화보 촬영만 수백 번 해온 에디터 출신 아니던가. 문제는, 돈과 시간과 경험자의 조력이 부족하다는 것. 눈높이에 모든 물건을 맞추자니 돈이 모자라고, 해외에서 공수하거나 모든 걸 다 제작하려면 오픈일을 맞출 수 없고. 바의 인테리어라는 것은 촬영용 세트와는 달라서 손님과 일하는 사람의 동선, 안락감, 테이블 회전 용이성 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런데 무지한 한 쌍은 그걸 몰랐다. 매일 청담동 카페에서 밀크티를 마시고 잘나간다는 바에서 와인을 홀짝대면서도 몇 센티미터 높이의 테이블이 가장 편안함을 주는지, 의자의 팔걸이 높이는 어느 정도가 좋은지, 테이블의 지름은 어느 정도가 세팅하기 알맞은지, 조명의 밝기는, 또 조명의 위치는 대체 어느 정도여 하는지. 나름 전문가 수준이라고 인정받던 나의 위치는 뭐 하나 뚜렷한 해답을 제시 못하면서 급격하게 추락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중심을 잃지 않는 자, 끝을 보리라’는 신조로 사는 터미네이터 우먼 아니더냐 말이다. 칼을 뽑았으니 사자의 심장을 찌르고 싶었다. 국내 최고의 빈티지 가구 전문가이며 요식업계의 대부에게 넙죽 절하고 도움을 청했다. 조명, 의자, 테이블의 위치와 개수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언에 머리를 1백 회 정도 조아리고 그의 창고로 쳐들어갔다. 벽돌로 장식된 공간에 매달 조명은 50년대 런던 팝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공수해왔다는 구릿빛의 원형 스틸 램프를, 바와 콘크리트 벽에 어울리는 조명으로는 취조실 등이라 불리는 유럽 앤티크 셰이드 형태를 골랐다. 메인 테이블은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덴마크 가구로, 소파는 파리 벼룩시장에서 사온 바우하우스풍의 담백한 놈으로, 여기에 임즈체어와 허먼밀러 리프로덕션을 섞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바 체어는 1900년대 초반 영국 오페라 극장에 있던 세월 묻은 갈색 가죽 의자. 등받이에 손으로 쓴 좌석 번호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명물이어서 손에 넣는 순간의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위대한 것은 진중한 손맛이고, 그 맛은 세월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법’이라는 진리를 신봉하는 내가 빈티지와 앤티크 가구를 고른 것까지는 좋았으나 손님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보수하고 지독한 때를 벗겨내는 작업은 또 한 번의 굵직한 땀방울을 요했다. 이외의 메뉴 선정 , 음악 선곡, 식기류 구입, 자투리 공간-화장실, 계단, 주방, 냉난방 공간, 비상구 등-공사, 간판 제작, 로고 제작 등 25평의 콘크리트 동굴을 치장하는 데 넘은 곡절의 세월이 굽이굽이 열 고개를 넘는다.
아, 오픈일의 그 짜릿한 감흥을 잊을 수 없다. 피치카토 파이브, 리얼 그룹, 비틀스의 음악이 넘실대는 가운데 테이블을 가득 메운 사람들. 와인과 수다를 섞은 크리스마스 시즌의 취기가 뜨거운 대동맥을 타고 모든 이에게 전도되는 그런 밤이었다. 아는가? 최고의 인테리어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공간, 음악, 메뉴에 공감하는 자들이 모여 내뿜는 혼연일체된 흥이 수개월 동안 머리를 쥐어짜서 꾸민 공간에 화룡점정이 되는 것이다. 하룻밤 머물다 가는 손님은 단골이 되고 집단 예약을 하고 공연과 전시를 하기도 했다. 뜻 맞는 자들의 놀이터가 된 이 지하동굴에서는 판화가 김태중, 사진가 보리, VJ 피쉬의 전시가 열리기도 했고 수차례 ‘12 BAR ORIGINAL’이라는 카페의 정모로 밤을 나기도 했다. 공간을 사랑하는 그들의 열정이 마음에 닿아 흥이 오르면 주인장인 남편은 피아노 연주로 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축복의 연말이 왔다. 
2년 후, 2006년. 난 <아레나>를 판박이처럼 똑같은 과정으로 창간했고, 또 찬란한 연말을 맞이했다. 목수와 칠박사가 되어준 <아레나>팀과, 공연을 펼쳐준 작가들과, 여흥을 즐겨준 손님(독자)들…. 참 감사한 선물꾸러미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은 건 화장실 개보수와 비상구의 안정성 보강 정도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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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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