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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옷을 보낸다

`자고로 세일 기간에 하는 쇼핑이라는 게 그렇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에 지갑을 열거나, 이걸 구입함으로써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지를 부러 과대평가해 지갑을 열거나, 누군가 먼저 낚아채지나 않을까 하는 경계심에 지갑을 열거나, 이번엔 절대 사지 않으리…<br><br> [2009년 2월호]

UpdatedOn January 27, 2009

 

‘자고로 세일 기간에 하는 쇼핑이라는 게 그렇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에 지갑을 열거나, 이걸 구입함으로써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지를 부러 과대평가해 지갑을 열거나, 누군가 먼저 낚아채지나 않을까 하는 경계심에 지갑을 열거나, 이번엔 절대 사지 않으리…를 수십만 번 반복했지만 의지박약으로 인해 결국 지갑을 열거나 하는 행위다.

그래서 누군가는 세일을 증오하고, 누군가는 세일을 학수고대하며, 어떤 이는 세일 기간에 욕구불만 덩어리가 되고, 어떤 이는 세일 기간에만 배고픈 투사가 된다. 하지만 일년에 4회가량 도시의 마천루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백화점 주변 도로가 토악질을 해대는 그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호모쇼핑리쿠스들은 가계부의 압박을 망각한 채 매장 문을 열어젖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은 틀렸다.

그건 호시절에나 할 만한 철딱서니 없는 정의였던 거다. 대리운전만큼이나 폭탄 세일 안내 문자를 자주 받는 요즘, 나와 지인들은 흥분으로 요동치며 쇼윈도를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노릇을 접게 됐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세일 안내 문구의 당도는 높아진다. 백화점으로부터, 콧대 높은 멀티숍으로부터, 싸구려 티셔츠 한 장 샀던 거리의 보세옷집으로부터, 심지어 동대문 매장으로부터도 달달한 연서가 날아온다. 나의 휴대폰은 세일 메신저가 되어 수시로 몸을 부르르 떨며 가여운 몸짓으로 외출을 권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연한 의지로 ‘delete’ 버튼을 누른다.

아, 이건 안 될 일이다. 소비로 인한 희열과 소비가 빚어내는 일상 부가가치에 대해 역설하며 누구보다 확신에 찬 쇼핑을 실천해야 하는 게 직업인 패션지 편집장이 바로 나니까 말이다. 가끔은 남들의 쇼핑을 간섭하고 침잠했으며 못돼먹은 붓끝을 가볍게 놀렸던 건 아닌가, 화려한 금박 안에 달콤한 글 몇 자 적어두고 그게 물건의 본질인 양 굴진 않았는지 반성마저 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간 나는 옷을 사고 몸을 치장하는 행위를 두고 <아레나>를 통해 한결같이  말해왔다.

1. 옷은 당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함입니다.
2.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3. 자신의 옷에 대한 자의식을 찾고자 한다면 지성과 인성을 가꾸십시오.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늘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옷 입기는 ‘성공 키워드’ ‘정체성 카드’이기 이전에 진화의 한 방편이라는 말은 아껴왔던 것 같다. 너무 당연해서 그랬다. 그래, 옷 입기는 진화의 방편이다. 생각해보자. 동물은 누구나 발정기가 있다. 그게 일년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이다. 그건 그 주기로 교미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간은 정해진 주기가 없다. 상시 대기, 에브리타임 가능이다. 그건 발정기에만 자신의 외양을 꾸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항상 외모를 가꾸도록 운명 지워졌다는 뜻이다. 항상 치장하고, 항상 교미하고 그래서 항상 종족이 번성하며 진화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유일한 존재라는 거다. 그래서 역사는 이 쉴 새 없는 진화의 욕구를 바탕으로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옷 자체를 진화시키는 존재와 옷을 구입함으로써 진화하는 존재. 생산자와 소비자. 노회한 논리의 비약으로 여겨도 할 수 없지만 틀리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부류의 인간이 올 한 해 얼마나 서로 죽도록 갈망할지를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내 일이란 게 바로 이 두 인간 사이에 오작교를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닳고 닳은 상투로 들리겠지만 한마디 덧붙이겠다. 시절의 수상함과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이데올로기’를 입어야 한다고. 좋은 옷을 지으려면 사람을 죽도록 갈망해야 한다. 그래서 좋은 옷에는 지문이 있다. 가문의 문장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칼과 창으로 시절을 헤쳐나가야 했던 아버지의 지난한 노고가 밴 곰삭은 표식이 바로 좋은 옷만이 가진 지문이다. 지금 나와 당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데올로기 수혈이 가능한 친아비 같은 브랜드를 찾아낼 때다. 소비에 대한 두려움으로 패션에 대한 호기심을 접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깡패 같은 경제의 신이 놀기 좋은 친구들과의 회합을 방해하는 이 시절이야말로 혈육을 찾을 절호의 찬스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읽고 보고 매만져서 나의 정체성과 뿌리를 같이 하는 브랜드를, 그 스타일을 찾아내길 바란다. 그게 바로 성숙한 호모쇼핑리쿠스로 한 단계 진화하는 과정이므로.

그래서
나는 봄 신상품 중에서 나와 혈육이 될 옷가지 몇 점을 발견했다.
십수 년이 흘러도 나의 지문과 별 다르지 않을 것들.
누구라 딱 꼬집어 말해줄 수 없는 건
내가 수많은 브랜드와 관계하는 패션지 편집장이기 때문이다.
이해들 해달라.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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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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