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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年 전과 3年 후

3년 전 박용하는 일본에서 살았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서울에 산다”고 말한다. 3년 전 박용하는 곱상한 얼굴이 싫어 미간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 그는 미간을 펴고 이렇게 말한다. “있는 대로 살자. 마약 안 하고 음주 안 하고 스캔들 안 내면 되잖아.” <br><br>[2009년 2월호]

UpdatedOn January 22, 2009

Photography 김태은 Editor 이지영

을 걷다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예상치도 않았는데 잭팟을 터뜨리게 되는 것처럼 ‘느닷없는’ 사건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다. 그 사건이 때로는 누군가가 올려붙인 따귀처럼 황당할 때도 있고, 하늘에서 금 덩어리가 떨어진 것처럼 눈물 나게 감사할 때도 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커다란 사건은 아무에게나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3년 전 박용하는 ‘예상치 않은’ 성공을 거뒀다. 당장 손아귀에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단 한 권도 없던 그때에 난데없이(?) 한류 스타가 됐다. 사람의 성정은 크게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이쯤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용하를 두고서 ‘많이 변했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평생 가야 한 번 맞이할까 말까 한 금은보화를, 그 기회를, 그 성공을 거뒀으니 말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으세요? 솔직히 전 별로인데요? 하지만 만약 실수로라도 다시 태어난다면 연기자를 하겠죠!” 이 말은, 그가 2002년에 내뱉은 말이다. “명품 브랜드의 정장 한 벌이 없어요.” 이 문구는, 그가 2002년 모 스포츠지에 연재한 내용이다. “일본 팬들이요? 볼 때마다 신기하죠!” 또한 이 대답은, 그가 2004년에 밝힌 흥분이다. 어마어마한 성공 이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다음 인터뷰는 그 엄청난 성공 뒤의 ‘변화 혹은 변치 않음’에 대한 이야기다.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났다. 2002년 <러빙유>가 마지막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스타급이 아니고 주조연급 정도였다. 주연도 할 수 있고, 조연도 할 수 있는 애매한 위치. 스타의 개념도 아닌, 예전의 모 드라마로 알려져서 쭉 이어져오던 거다. 그렇게 <러빙유>를 끝내고 2년 공백을 가지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 진출 권유를 받고, 갑자기 일본으로 날아가게 됐다. 사람들은 내가 일본에 간 것도 몰랐었다. 나는 정말 증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그렇게 갑자기 일본으로 날아간 내가 그곳에서 정말 새로운 세상을 맛봤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일이 많았으니. 물론 나로서도 처음 경험해본 일이었는데, 2년이라는 시간이 며칠 안 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매일 모이는 인원이 몇천 명 단위였고, 만 명대가 넘어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증발한’ 것치고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거둔 것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겠다.

예상치 못한 성공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 2년 정도 지났을 때, 문득 ‘연기가 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일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한류라는 딱지만 하나 붙어 있었다. 황당하지. 그래도 연기가 하고 싶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나를 대우해준다면서 하는 말이 “너 돈 많이 벌었다며?” 그 정도였다. 예의상 한류 스타라고 해주긴 하지만 한국에선 예전과 똑같이 나를 대하고 있었던 거다. 드라마 섭외도 들어오지 않고, 영화 섭외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돈 되는 이벤트만 들어올 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때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즈음 한류 역시 죽었다. 한류는 시작한 지 2년도 안 되어 죽은 거다. 몇몇 사람만 일을 하고 있을 뿐, 중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2천~3천 명 앉혀놓고 이벤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와중에 일본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한국인들은 일본에서만 활동을 하느냐’는 거다. ‘한국에서 스타가 아니었느냐’ 하는 거지. 정말 충격적이었다. 일본 활동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회사에선 일본 활동을 강요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는 이미 4~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가 낄 자리가 없어진 거다.

다들 일본에서 성공했다고 하니까, 일본에서 기거할 거라 예상했던 게 아니었을까. 누가 성공했다고 하면, 지레 겁부터 먹는 게 또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

아니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웃음) 한국에 오면 “너 왜 일본에만 있니?” 그러고, 일본에 가면 “왜 일본에서만 활동합니까?” 그러고. 이건 거의 미치는 거다. 회사에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일본 스케줄이 일년 내내 잡혀 있다고 그러고, 그 이후 계획을 잡아달라 해도 한국 현실상 일년 후에 들어갈 드라마 캐스팅을 미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니, 나는 중간에 붕 뜬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예전 회사와 계약을 끝내고 직접 나서서 알아봤더니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더라. 그래서 바로 들어가게 된 게 <온에어>였다.

3년 전의 박용하와, 3년 후의 박용하를 대하는 시선이 분명 달라졌을 텐데. 혹시 촬영장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욘사마 모시듯’ 하지 않던가.(웃음)

변화를 느낀 것은 <온에어>가 끝난 뒤였다. 그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왜 일본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느냐”고 하면, “저 3백65일 중 3백 일은 서울 논현동 집에 있는데요?” 했다. 일본에서 뜨더니 달라진 거 아니냐는 시선은 그냥 참고 넘겼다. 사실 내 성격이 보기와는 달리 엄청 까칠했는데, 그동안 좀 바뀌었다. 지금도 누군가가 나에게 나쁘게 말하거나 하면 나도 같이 응대한다. 뭘 받으면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성격이거든.(웃음) 그런데 그 수위가 예전보다 유연해졌다는 게 가장 큰 변화일 거다. 예전에는 촬영장에서 주위 사람들이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버리고, 화나면 바로 질러버리고 그랬었거든. 그런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스스로 많이 느긋해졌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나 자신도 굉장히 마음에 든다.

“한류는 시작한 지 2년도 안 되어 죽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한국인들은 일본에서만 활동을 하느냐’는 거다. ‘한국에서 스타가 아니었느냐’ 하는 거지.”

변화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었나. 아니면,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어느 순간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되나. 최근 당신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솔직하다’는 평이더라. 예전에 제멋대로였다는 말이 와 닿질 않는다.

내가 외모와는 달리 조금 거친 편이라, 아마 계속 예전처럼 했더라면, 지금쯤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거다. 그때는 화가 나면 거의 모든 것이 ‘올 스톱’ 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나를 화나게 만들면, 그 사람을 오줌 싸게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스타가 되고 싶은데, 쉽지 않았으니까. 계속해서 화가 나고 조급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스타’라는 호칭을 다는 사람은 어쩌면 등장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싶더라. 차라리 그렇게 스타가 되고 싶어 몸부림치기보다는 진짜 하고 싶은 것만 하자고 생각하고 나니, 급한 것도 없어지고 많이 차분해졌다. 그렇다고 성인군자처럼 변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웃어넘기게 됐다. 어떤 것이 나에게 달려오면 예전에는 튕겼지만 지금은 스펀지가 된 것이다. 물이 한번 들어오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나지만 다시 꽉 짜면 금방 원상복귀가 된다, 누군가 나를 찢어내지 않는 한. 회복력이 빨라진 거겠지.

다행이다. 갑자기 긴장할 뻔했다.(웃음)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하는 게 진짜 콤플렉스였는데, 이제는 인터뷰하는 게 좋다. 아니, 인터뷰하는 게 좋다기보다는 수다 떠는 게 좋다. 사실 이런 화보를 찍고 인터뷰를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진 않는다. 한 일년? 그전까지는 나를 보여준다는 게 죽도록 싫었는데, 이제는 나를 표현하는 게 좋더라.

언론을 믿는가 보다. 당신은 벼락같이 한류 스타가 된 사람이니, 언론에 데어도 한참 데었을 텐데 말이다.

신문사만 조심하면 된다.(웃음) 그런데 성격이 많이 바뀌어서 신문사 기자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다. 가끔 이상한 거 나오면 전화를 한다.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쓰면 죽여버릴 거야~” 하고.(웃음) 이렇게 장난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또 쓴다 하더라도 아마 나는 똑같이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나는 인터뷰할 때 거짓말은 잘 하지 않는다. 일단 비밀까지는 아니어도 다 얘기하는 편이다. 그래도 또 분명 이상하게 나올 몇 가지 말들이 있었을 테니,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할 때는 끝에 꼭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오늘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아마 다른 분들과 달랐다는 것 눈치 채셨을 거다. 그러니 이런 내가 제발 다치게 하지 말아달라” 하고. 마음이 ‘닫힌다’는 것과 ‘다친다’는 건 차이가 있는 거 아닌가. 말 그대로 ‘다친다’는 건 스크래치다. 마음을 열었는데, 거기에 나는 스크래치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처가 여러 번 반복되면 언젠가는 나도 닫히겠지.

어떤 말이 당신을 다치게 하나. 그때와 지금,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뭐였나.

‘한류 스타’ 이런 거?(웃음) 다른 배우들과 나를 전혀 다른 종족인 양 소개하는 거 싫다. 그건 본의 아니게 이간질시키는 것 아닌가. 그리고 예전에는 이런 말 진짜 많이 들었다. “요즘 뭐해?” 이런 말.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그래 요즘 잘 보고 있어. 좋더라~” 이런 말. 내가 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선배들인 거다. 그만큼 내가 존재감이 없었던 거겠지. 차라리 그럴 땐 “요즘 뭐해?”가 낫다는 생각을 했다. “잘 보고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혼자 속으로 ‘저 인간은 내가 박용하인 줄은 알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주로 어디 계세요?”다. 이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말 요즘 어디에 사나.(웃음)

논현동 우리 집. 요 근방을 벗어날 일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일본에 가 있는 줄 아는데, 난 3백65일 중 3백 일을 서울 논현동 집에서 사는 사람이다. 처음에 일본 갔을 때야 몇 달씩 호텔 생활하면서 지내고 했지만, 이제 그 정도는 하지 않아도 될 때가 됐다. 꼭 필요할 때만 건너가서 공연을 하고 온다. 예전에는 모든 준비와 연습을 일본에서 했었다면 지금은 한국에서 모든 준비를 해서 가는 거다. 그 외에는 거의 모든 행동반경이 이 근처이다. 운동을 따로 못하니까 근처 어디 나갈 땐 자전거 타고 다닌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극복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텐데. 혹은 예전에는 불만이었던 게 3년 후인 지금은 애착으로 돌아선 것들도 있을 텐데, 무엇인가?

예전에는 곱상하고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 싫어서 항상 무언가를 얼굴로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찡긋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콤플렉스를 바꾸기 위한 의도된 습관이었던 거지. 물론,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키 작고, 눈 작고, 쌍꺼풀 없고 이런 거. 그런 것들은 신경만 쓰면서 산다. 버리지는 못하니 눈 찔끔 감고 살아야지 뭐.(웃음) 성격은 또 말할 것도 없이 소극적이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는 편이다. 다만 여전히 말을 걸러서 하지 않는 것. 아까 말한 것처럼 ‘누가 한마디 하면, 나도 똑같이 한마디 한다.’ 이런 말은 사실 안 해도 되는 말이니 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나 스스로는 ‘욕 좀 먹으면 어때. 마약 안 하고 음주 안 하고 스캔들 안 내면 되잖아. 이게 내 성격인 걸 어떻게 하라고’ 이런 생각을 한다. 사실 이제 와서 나를 포장하면 무얼 하겠는가. 난 꽃미남 대열에 서 있는 스타도 아닌데.(웃음)

3년이 지난 지금, 번 돈이 많아진 만큼 쓰는 돈도 많아졌을 것 같다.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쓰고 있나.

이사한 것 외에는 그렇게까지 달라진 건 없다. 옷도 동대문 가서 사 입는 편인데 뭘. 대신 나는 재테크를 한다. 주식은 안 하는 대신, 저축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생활비는 항상 빠듯하게 정해놓고 산다. 그렇다고 궁색하거나 한 건 아닌데, 나에게 들어가는 돈은 늘 정해놓은 선이 따로 있다. 그리고 또 큰 목돈이 들어갈 일을 잘 안 하기 때문에 적금을 깰 필요도 없고.(웃음) 거의 커피 마시고 밥 사는 게 한 달 카드 대금의 대부분이다. 자동차에 기름도 한 달에 두세 번밖에 넣지 않는다. 집이 논현동이라 이 근처에서 몇 바퀴 도는 게 전부이기 때문에 기름 넣을 일도 딱히 없다. 좀 많이 쓰는 날은 와인 먹는 날 정도? 더군다나 난 지금 여자친구도 없지 않은가.(웃음)

하긴 연애는 시작과 동시에 돈이 펑펑 들어가는 행위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친구에게는 아끼지 않는 편이다. 선물을 많이 하고, 옷도 자주 사주고 그런다. 뭐 그렇다고 해서 좋은 옷은 아니고, 나는 주로 동대문 시장을 자주 간다.(웃음)

음…. 여자친구들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웃음)

물론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근데 내가 결혼할 것도 아닌데 명품 백을 사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사랑하는 여자라 해도 말이다. 난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명품 백을 선물하는 그런 골 빈 놈은 아니다.

3년 전과 3년 후인 지금, 사랑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을 것도 같다.

‘여자를 믿지 말자’ ‘여자만 믿지 말자!’(웃음) 적어도 결혼에 대해서는 그렇다. 여자는 결국 돈 많은 남자와 무조건 결혼한다. 결혼하기 직전, 그 마지막까지 머리 굴려가며 ‘돈 많은 남자를 만나자’ 아닌가. 물론 결혼 후에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역시 돈보다는 사람이야’라고 말하겠지만, 결혼 전에는 무조건 능력 있는 남자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니 여자를 믿지 말아야지.

그건 오해다. 여자가 싫어하는 건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자격지심’이다. ‘네가 날 돈 없다고 무시해?’ 뭐 그런.

나는 여자가 조금 어리석어 보인다. 여자는 왜 자기가 돈을 벌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인정! 하지만 왜 자신의 능력을 꼭 경제적인 것으로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넌 내가 먹여 살릴 거니까, 우리 애들은 무조건 멋있게 키울 거니까 넌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해도, 여자들은 왜 듣지 않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직업이 없는 분들까지도 늘 ‘돈 벌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곧 다가올 나의 추락을 멋지게 장식할 것인가’다. 어떻게 하면 두 팔 벌렸을 때, 이 두 팔에 많은 것을 안고 천천히 내려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도 남자에게 빌붙어 기생충처럼 살겠다는 여자보다 낫지 않나?

난 똑같다고 본다. 기생충 같은 사람과 똑같이 본다는 의미까지는 아니고, 경제적인 능력에 대해선 그렇다. 일하는 여자? 나쁘지 않다. 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을 가진 여자는 질색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성형이 돈을 멋있게 쓸 줄 아는 여자다. 친구 중에 6개월간 돈을 모아 6개월 여행을 가는 친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더라. 그런데 그 친구 같은 사람들이 진짜 돈을 모을 줄 아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낄 줄도 알고, 멋있게 쓸 줄도 아는 여자가 난 늘 아름다워 보인다.

결혼에 대한 생각 역시 3년 전과 지금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도 살고 싶고 저렇게도 살고 싶고. 그런데 지금은 형들이 결혼하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끝까지 놀 것 다 놀고 나중에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란다. 누나들도 반 이상이 똑같은 말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딱히 결혼 생각은 없다. 아마 하더라도 늦게 하게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권상우 형은 진짜 멋있는 거다! 한창 때 결혼을 한 거니까. 나는 아마 서른아홉, 마흔쯤? 그쯤에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결혼을 생각하는 30대 중반 남자들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지.(웃음)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방향 역시 바뀌었겠다.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좋은 남편, 좋은 아빠’다. 그게 부모님이 주신 내 인생의 모토이기도 하고. 난 굉장히 화목한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스물셋, 스물에 결혼하셔서 지금 누나가 서른여덟인데, 어머니가 쉰여덟이다. 물론 IMF 때문에 집이 홀랑 망한 적이 있었다. 10년간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살았는데, 그때도 서로 큰소리 내지 않고 잘 지냈다. 어느 정도 힘들었냐면, 내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이 차압될 지경이어서 호적을 옮겨 지냈을 정도였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집에 가지 못했을 정도니까. 정말 힘들게 한 10년을 보냈는데, 그때 생긴 모토가 가정이 화목하면 다른 건 다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정이 화목하면 비행 청소년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니 내 인생의 가치관은 늘 하나다. 좋은 아빠 되고, 좋은 남편이 되자!

연기에 대한 정의는 어떠한가. 그때와 지금, 조금 더 진지하게 연기는 직업이라고 생각해봤을 것 같다.

그런 건 없다. 연기는 예전부터 평생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연기는 내 인생의 숨이다’ 뭐 이런 표현은 얘기하기도 싫다.(웃음) 그냥 골이 깊은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지, 내 이름 앞에 ‘티켓 파워’ 이런 단어 붙는 건 좀 우습다. ‘내 여자친구는 연기예요!’ 이런 표현? 더 싫다!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건 무엇이었고, 무엇인가.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멋있게 살 수 있을까’ 였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 모시고 편하게 살까. 사람은 두 다리 쭉 뻗고 따뜻하게 잘 자고 흰 쌀밥에 김치 하나를 먹더라도 서로 웃으면서 먹는 것이 최고인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요즘 가장 자주 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곧 다가올 나의 추락을 멋지게 장식할 것인가’다.(웃음) 어떻게 하면 두 팔 벌렸을 때, 이 두 팔에 많은 것을 안고 천천히 내려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추락은 아직 멀었다. 정상과 땅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넓으니까. 곧 개봉을 앞둔 <작전> 이후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유난히 많아지진 않았나.

시나리오는 <작전> 이후 아직 들어온 게 없는데? 드라마는 물론 전작이 있기 때문에 섭외가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나는 ‘반짝’ 박용하라는 사람이 등장했던 그 기대감이지, 배우 박용하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짜 저 배우는 나랑 해야 돼’가 아닌, 또 반짝 했으니까 써먹을 수 있겠다 해서 들어온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니 나는 죽어도 여기서 안주를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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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김태은
Editor 이지영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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