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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그 남자

디자이너 우영미가 스무 살 청년(靑年)을 키워냈다. 잘 키운 그녀의 아들은 화이트 셔츠가 잘 어울리는 착한 남자다. 우영미와 20주년을 맞이한 솔리드 옴므에 관한 스무 가지 단어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6, 2008

Photography 박원태 Editor 김민정

고 하얀 손가락, 구김이 없는 화이트 셔츠, 따뜻한 그레이 울 팬츠, 쉼표를 자주 찍는 자분자분한 말투, 입김에도 날리는 부드러운 생머리, 콧등 위에 얹은 안경, 턱을 괴는 버릇. 솔리드 옴므의 옴므에게는 이런 것들이 어울릴 듯했다. 좋은 취향을 가진 남자, 그리고 그 좋은 취향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는 진지한 남자. 그 남자를 20년 동안 똑같이 그려내는 우영미가 궁금했다. 우영미를 알고 싶어서 ‘우영미’ 하면 떠오르는 단어 스무 가지를 주변인에게 물어봤다. 그 단어를 토대로 그녀를 인터뷰했다.

1
여자 디자이너

여자가 남자 옷을 만든다. 그래서 당신이 만들어내는 남자는 당신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같이 늙는 게 아니라, 언제나 소년 같다. 여자 디자이너가 남성복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점, 오히려 도움이 된 점?

나빴던 것은 거의 없다. 피팅에 관해서는 과학이 발달돼서 고민할 일이 아니다. 많은 테크니션이 있으니. 디자인은 생각에서 나오는 거다. 디자인할 때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여자이기에, 내가 입을 옷이 아니기에 ‘나 같으면 이렇게 입었을 텐데’ 하는 제약을 받지 않는다. 나는 한번도 내가 입을 것을 생각한 적이 없다. 어느 시점의 남자를 생각하고 옷을 만든다. 그렇기에 그 상태에서 점점 업데이트되어갈 뿐이다.

2
처음

남성복 디자이너로선 처음으로 파리 무대에 진출했고, 처음으로 한국인 모델(강동원)을 무대에 세웠고, 한국 디자이너로선 처음으로 파리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당신이 처음으로 한 일, 그 일에 대한 만족도.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시도하려 하는 일?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목표는 멀기만 하다. 앞으로 시도할 또 다른 처음은 내년 1월 밀라노 단토네의 윈도 디스플레이 작업. 단토네는 파리의 콜레트와 같은 내공 있는 멀티숍이다. 그곳에서는 패션 위크 때마다 그해의 디자이너를 뽑아서 윈도 디스플레이를 맡긴다. 다음 1월에 있을 패션 위크 때 우영미의 옷을 전시하기로 했다. 옷뿐 아니라 아트워크가 어우러진 윈도 디스플레이를 준비하고 있다.

3
벼락

평소에는 지금 말투처럼 온화하지만, 화가 나면 꽤 무섭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한다. 요즘 당신을 가장 화나게 하는 일은? 패션계와 관련해서.

디자이너가 정도를 가지 못하게 하는 일들. 예를 들면 옷을 판매하는 유통 문제. 해외에는 디자이너나 바이어가 구별돼 있어 각자 일을 한다. 판매는 옷이 완성되면 디자이너의 손을 떠난다. 하지만 한국은 디자이너가 책임져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4
솔리드 소재

디자이너에게 텍스처는 중요한 디자인 도구다. 무지로만 옷을 만드는 당신이 때로는 갑갑할 것 같다.

내가 솔리드 소재를 좋아한다는 것도 ‘솔리드 옴므’라고 이름을 지으면서 알았다. 이름을 뭘로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숍에 쌓여 있는 소재들이 죄다 솔리드였다. 그래서 솔리드 옴므가 되었다. 물론 말한 대로 제약은 있다. 하지만 솔리드도 미묘한 터치를 통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 그레이 안에서의 변화, 감촉의 변화 그런 것들. 이번 S/S 시즌 사용한 투명한 소재들도 솔리드 안에서 추구한 변화였다.

5
파리

파리 남자, 서울 남자 당신이 느끼는 차이는?

요즘 남자는 우리 세대와는 다른 신인류 같다. 차이는 모르겠다. 패션 감각만큼은 특히 비슷하다. 파리에서 바이어들에 의해 선택된 아이템들이 한국에서 또한 잘된다. 그런 걸 보면 취향이 비슷한 남자들 아닐까.

6
고집

옷에 관해서는 고집스럽다. 20년간 남성복을 해온 것만 봐도. 당신이 옷을 만들 때 가장 고집스럽게 지키는 수칙이 있다면?

밸런스를 중요시한다. 사람의 신체에도 균형이 있다. 그 균형을 깨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계속 헤어스타일을 언밸런스하게 만드는 것 같다. 고집, 그런 건 없는데. 사실 디자이너로 20년 넘게 일하다 보면 많은 유혹들이 있다. 여성복, 아동복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싶은 것만 해서 나를 고집스럽다고 생각하는지도.

7
어머니

한 가정의 어머니다. 딸 유경 씨가 <안드로지니 매거진>을 만들고 있다. 당신이 딸에게서 받는 영향은?

서로 교류하는 부분이 많다. 어떻게 보면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래서 서로 치켜세우기보다는 다그치게 된다. 보통 모녀 사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 아이의 잡지를 보며 아트적인 영감을 받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지난호 주제가 블라인드(Blind)였는데 눈이 반 정도밖에 안 보이는 맹인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요즘은 HD다 뭐다 해서 모공 속까지 세세하게 보려고 난린데 오히려 그렇게 뿌옇게 보이는 게 꽤 신선했다. 그래서 이번 S/S 시즌의 주제를 블러(Blur)로 택했다. 딸과 나는 안드로지니(양성적인)한 부분이 닮았다. 각자 쇼핑을 해도 결국에 똑같은 아이템을 골라온다. 모녀보다는 쌍둥이 같고, 그래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게 많다.

8
화이트 셔츠

솔리드 옴므의 화이트 셔츠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많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화이트 셔츠, 그리고 그 스타일링법은?
남자 살갗에 바로 닿는 화이트 셔츠는 몸의 섬세한 실루엣을 살려준다. 또 불멸하는 클래식이다. 거기에 우리 터치를 가미한다. 우린 그걸 ‘점’을 찍는다고 표현한다. 우영미스러운 점. 섬세한 핏과 감성적인 디테일을 더하는 거다. 남자들이 화이트 셔츠를 입을 때만큼 근사한 경우도 없다. 과한 스타일보다는 셔츠 소매를 멋스럽게 접고 버튼은 하나만 푸는 정도. 정도(正道)를 지키는 스타일이 좋다.

9
섬세

파리에서 우영미 옷에 대한 평가는 항상 ‘섬세’였다. 그 섬세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 같나?

실루엣, 피팅, 디테일. 남자 옷에 흔히 쓰이지 않는 디테일. 이번 F/W의 피코트나 트렌치코트의 경우 칼라(Collar) 끝이나 포켓 디테일에 중점을 뒀다. 내가 여자 디자이너여서, 동양 디자이너여서 그런 것 같다고 말들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는 미묘한 광택도, 손뜨개도 잘 어울리는 남자다.

10
솔리드 옴므

한국에선 솔리드 옴므, 파리에선 우영미로 활동하고 있다. 솔리드 옴므와 우영미의 차이점, 공통점 그리고 둘의 목표는?

둘 다 훌륭한 남자들이 입는 옷이길 원한다. 솔리드 옴므는 더 보수적이고 성숙한 남자, 우영미는 모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남자. 둘의 목표는 정체성을 확립해 글로벌한 남자로 거듭나는 것.

11
언밸런스 헤어

좌우가 다른 헤어스타일을 즐겨 한다. 심지어 어린 딸도 그 머리를 했었다고 들었다.

그래픽적인 느낌을 좋아한다. 내 옷들을 보고 외국에서 한 평가 중 하나가 ‘클린 커트(Clean Cut)’다. 몸에는 직선이 없으니 머리를 통해 계속 그런 표현을 하는 것 같다.

12
완벽주의자

완벽주의자라는 평이 많다. 완벽하게 하기 위해 자주 반복한다고 들었다. 말도 두 번씩 하고, 들을 때도 두 번 이상 확인한다고.

나 자신에게 특히 엄격하다. 또 내게 불필요한 것들은 미련 없이 버리는 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춰졌을 때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큰일을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13
연필

메모광이라고 들었다. 포켓이 많은 가방을 들고 다니고 그 포켓 안에는 항상 연필이 들어 있고, 그 연필로 쓴 포스트잇이 모니터에 가득 붙어 있다고 하더라. 연필을 쓰는 것마저도 ‘우영미’스럽다. 연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아날로그 방식을 좋아하나?

기계치이기도 하고, 정리를 좋아한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또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일단 중요한 일을 포스트잇에 적고, 주변에 붙여놓은 후, 그 일이 해결되면 그 포스트잇을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주위를 정리해간다. 그래서 내주위에는 항상 포스트잇이 쌓여 있다. 그리고 단정 짓지 않아도 되는 연필이 좋다. 지우개가 꽁무니에 달려 있는 이 연필. 어떤 느낌의 사람, 순간을 기록하는 편이다. 기억하려 애쓰는 대신, 그 자리를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내어주는 편이다. 머릿속도 정리가 된다.

14
건축

이번 시즌(2009 S/S) 도미니크 페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건축물을 좋아하는가?

사람이 사는 곳을 둘러싸는 건축, 사람의 몸을 감싸는 옷.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절제되고, 소박한 디자인의 건축물들이 좋다.

15
모델

강동원, 김영광, 윤진욱. 당신의 쇼에 섰던 모델들이다. 당신에게 좋은 모델은 어떤 모델인가. 그리고 모델로 세우고 싶은 이는?

내 옷이 딱 맞는 모델. 몸도, 표정도, 동작도. 모델은 디자이너에게 캔버스와 같다. 무조건 마르거나, 몸이 좋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솔리드 옴므의 취향을 드러내는 모델.

16
흐린 날

당신 옷은 무채색이 많다. 그리고 우산을 들고 나오는 2008 F/W의 모델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무채색 도시가 생각난다. 당신이 좋아하는 색,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색, 그리고 좋아하는 날씨?

그레이, 그레이. 그레이 안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다. 그레이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다. 특히 따뜻한 그레이가. 지난 F/W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파리에 있을 때 비가 많이 내리는 날 한 남자가 건물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봤다. 우산을 손에 들고 비를 최대한 덜 맞으려 재킷을 머리 위로 올리는 모습에서 느낌이 왔다. 흐린 날은 그래서 좋다. 내 색과 디자인, 테마 그것들이 모두 흐린 날과 이어져 있다.

17
디테일

라운드넥이 좋은가, 브이넥이 좋은가? 브이넥. 스리 버튼, 투 버튼? 투 버튼. 지퍼, 버튼? 버튼. 니트, 펠트? 펠트
내가 집착하는 스타일들이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야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있으니깐 또 나만의 무언가가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딱딱한 소재가 좋다. 텍스처도 솔리드하고, 색도 솔리드한 그런 소재가 좋다. 펠트는 딱딱하면서도 따뜻해서 제일 즐기는 소재이다.

18
남자

솔리드 옴므가 20년이 됐다. 당신에게 솔리드 옴므를 입는 남자는 어떤 모습인가?

나쁜 남자보다 착한 남자를 좋아한다. 건전하면서 영리하고, 따뜻하고. 내면에 파워를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남자. 나이가 많든 적든 정신 연령만큼은 젊은 남자. 한자로 ‘청년(靑年)’, 그 말에 딱 맞는 항상 푸른 사람. 또 어찌 생각해보면 여자, 남자의 구분을 거의 안 두는 편이다. 솔리드 옴므의 남자는 남자라기보다 중성적인 사람.

19
돌, 화분

돌과 화분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자매가 넷이다. 첫째, 셋째는 알레라는 플로리스트 숍 겸 카페를 하고 나와 막내는 패션 관련 일을 한다. 넷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다. 알레의 꽃도 중성적이다. 우린 모두 꽃보다는 나무, 꽃잎보다는 줄기를 좋아한다.

20
20주년

20주년 쇼를 했다. 참 긴 세월이었다. 그냥 당신의 감회를 듣고 싶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소감이랄까.

정작 나는 그 20이란 숫자가 갖는 의미를 모르겠다. 감정이 그렇게 다이내믹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저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옷을 만들었으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내 옷을 찾아주었다는 것 정도의 의미. 그래서 이번 서울 쇼는 디자이너인 내가 그동안 감사했다는 표현을 할 방법이 ‘옷’밖에 없어서 준비한 것이다.

20년이란 세월의 쉼표를 찍기 위해 우영미는 파리에서 했었던 2008 F/W, 2009 S/S 쇼를 서울에서 다시 집대성했다. 솔리드 옴므보다 모험적인 남자라는 우영미 라벨의 옷들이었다. 여백이 많던 널찍한 런웨이 위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언밸런스 헤어의 모델들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쇼가 시작됐다. 우영미가 만든 남자들이 우산을 쓰고 겨울을 걸어 나왔다. 그들의 길고 추운 걸음이 끝나자 무대는 금세 반투명으로 바뀌고 분주히 쇼를 준비하는 무대 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 눈이 반쯤 보인다는 포토그래퍼 눈에 비친 쇼장처럼. 그리고 몽롱한 반투명 옷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녀의 작업실을 나서려는데 문에 붙은 ‘Nomad’라는 메모가 보였다. 또 다른 처음을 위해 건축 서적을 보고, 메모를 끼적이는 그녀는 스물한 살 쇼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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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박원태
Editor 김민정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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