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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미스트 유진규

무려 `20년`이라는 압도적인 단어 앞에 무어라 덧글을 붙일 수 있을까. 한 사람의 굳센 의지만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춘천마임축제는 20년이 지난 지금,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제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이제 `유진규`라는 이름 석 자는 곧 `한국 마임의 역사`와 동의어로 분류되어야 한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2, 2008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사람들이 내 이름 앞에 ‘한국 마임의 선구자’니 ‘불모지의 개척자’니 하는 거창한 칭호를 붙이곤 하지만 다 허황된 말에 불과해. 오십 평생 살아오며 나만큼 충만한 삶을 꾸려온 사람이 또 있을까?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야. ‘춘천마임축제’라는 간판을 떡하니 내걸었는데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런데 그렇게 10년, 20년을 버티다 보니 뱃심이 늘어서인지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게 되더라고.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어갔고, 어느덧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제’라는 타이틀까지 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있을까?

나는 축제가 참 좋아. 축제란 게 뭐야? 공연하는 사람과 지켜보는 사람의 구분이 없어지는 ‘난장’ 아닌가? 한마디로 ‘피아의 구분’이 없어지는 거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거란 말이야. 마임축제의 하이라이트 격인 ‘도깨비 난장’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어. 스태프 한 명이 장난 삼아 객석을 향해 물대포를 뿜어댔는데 다들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고. 무아지경에 빠져 서로 물장난을 치며 밤을 홀딱 새는데 이런 게 바로 천국이 아니고 뭐겠어.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뻣뻣해. 평생 ‘빨리, 빨리!’만 외치다 저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 말이지. 누구나 한 번쯤은 축제라는 아수라장을 직접 체험해볼 필요가 있어.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을 보라고. 매년 몇 명씩 축제 기간 중에 죽어 나가잖나. 하지만 그 때문에 카니발이 중단되었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 있는가? 축제란 그 순간만큼은 일상을 까맣게 잊게 만들어야 한다고. 밤을 꼬박 새더라도 온몸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짜릿한 느낌이 넘쳐나야만 성공한 축제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 하룻밤 기억만으로도 1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니까. 누군가는 나를 이렇게 설명하더구먼. ‘행복으로 가는 약을 만드는 연금술사’라나. 흐흐. 뭐, 굳이 마리화나가 없어도 합법적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이야.

그러게. 우리 마누라 말마따나 ‘무슨 대단한 영화를 누릴 거’라고 이 판에 뛰어들었나 몰라. 대학 때는 수의학을 전공했어.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해서 덜컥 선택했는데 공부가 너무나도 재미없더구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연극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지. 난 천성이 리버럴리스트야. 안정적인 삶은 답답해서 싫어. 한참 연극을 하다 보니 그 또한 안정적인 곳이더라고. 그야말로 허허벌판을 찾다 보니 당시 아무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마임’이라는 신세계로 뛰어들게 되었지.

아냐. 당신이 착각하는 것처럼 무슨 대단한 소명 의식 따위는 없었어. 그냥 나에게는 ‘마임’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고. 난, 재미가 없는 삶을 살 바에는 그냥 죽음을 택하자는 주의였거든. 만약 마임을 해보고도 사는 게 별 재미가 없으면 그냥 죽어버리자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어느덧 20년이 훌쩍 흘러버렸네. 까마득한 옛일이건만 지금도 잠자리에 몸을 뉘면 제1회 공연 때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올라. 뜻 맞는 지인 세 명과 함께 망치를 직접 들고 뚝딱뚝딱 어설프게 무대를 만들었던 그 첫날밤의 설렘 말이야. 어느덧 마임의 본고장인 유럽 전문가들이 직접 찾아와 ‘왜 한국 춘천에서 저토록 폭발적인 마임이 줄줄이 공연되느냐?’는 질문을 던질 정도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지. 어떤가? 이런 인생, 한 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Arena Says

춘천마임축제는 매년 15~20%씩 급격히 성장해왔지만 20년째를 맞은 올해, 급제동에 걸릴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난 10년 동안 축제의 오라를 더욱 발하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곳, 고슴도치섬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무대 공간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쉰 살이 넘은 나이에도 ‘웃음 띤 소년’의 외모를 간직하고 있는 유진규 선생의 낯빛에 난생 처음 그늘이 드리워진 것도 이 즈음이다. <아레나>가 올 한 해를 대표하는 블랙칼라 워커를 뽑는 에이 어워즈 시상식 최선두에 ‘춘천마임축제 지원’이라는 타이틀을 선뜻 내건 것은 우아한 몸짓으로 스무 살 젊은이 못지않은 생동감을 무대 위에 쏟아 붓는 유진규 선생의 변함없는 열정에 경의를 표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는 상금 전액은 축제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데 고스란히 쓰일 예정이다. 에이 어워즈가 <아레나>의 또 다른 분신이듯, 춘천마임축제 또한 <아레나>의 스피릿이 고스란히 투영된 아시아의 대표 축제로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될 것을 바라마지 않으며.

Profile 1952년생인 마이미스트 유진규는 건국대 수의학과 1학년이던 1970년, 인생의 항로를 180도 뒤바꾸는 결단을 내린다. 학교 생활을 접고 연극 무대로 뛰어든 지 3년 만에 ‘마임’이라는 신세계를 발견, 지금까지 ‘한국 마임의 아이콘’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길은 내가 감으로써 생긴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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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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