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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번 준 거야

영화 <초록 물고기>에서 심혜진은 한석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놈 저놈 다 주는데 너라고 못 주겠냐?” 자신을 비하하는 방식으로 사랑 없는 섹스를 변명하는 건 과거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요즘 여자들은 가끔 불우 이웃을 돕는 심정으로 섹스를 하기도 한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1, 2008

Editor 이기원 Photography 김지태

축하한다. 오늘도 당신은 한 번 ‘자빠뜨리기’ 위해 열심히 작업을 하다 결국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미소는 잠깐 접어두라. 남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대는 것같이, 여자들도 가끔 그렇게 ‘던져주곤’ 한다. 계속 졸라대는 당신이 가여워서.

나는 욕망한다 나를 욕망하는 자를

어떤 여자도 “그래, 너랑 자줄게”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에둘러 말하거나, 자기 손을 잡고 어딘가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을 뿐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대개 술이 꽤 취해 있는 경우가 많다. 술이 개입하면 남자나 여자나 본능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남자의 본능이 오로지 단순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향해 나아갈 때 여자의 본능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술이 들어갈수록 남자는 집요해지고, 여자는 착해진다. 흑심을 숨긴 남자들이 그렇게 술을 먹이려고 하는 건, 여자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들이라고 그 뻔한 수작도 모른 채 남자가 주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지는 않는다.

남자는 자신이 욕망하는 사람을 욕망하지만, 여자는 자신을 욕망하는 사람을 욕망한다. 때론 내가 남자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보다 남자가 나를 얼마나 욕망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성욕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성욕의 에너지에 마음이 움직인다. 사랑 없는 섹스란 대부분 그런 순간 일어난다.

나도 한때 그런 관계에 흥미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일일이 밝히고 묘사하기에는 너무 누추한 순간들이었다. 다만 내 경우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남자들 중에 잠자리 실력이 괜찮은 인물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런 남자들은 공통적으로 질이 아니라 양으로 존재감을 입증하려는 통에 끊임없이 밤새 괴롭힌다. 남자들도 섹스가 끝난 후 찾아오는 고요한 시간을 의식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한 번 준다니까’ 좋아서 뛰쳐나왔지만, 그후에는 자신의 섹스 능력까지 어떻게든 검증받고 싶어 밤새 용을 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떤 종류의 ‘용’이든 간에, 그건 좀 씁쓸한 일이다. 굳이 그런 순간을 묘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지닌 원시성의 문제를 포장만 한다고 해서 뭔가 그럴싸해지는 건 아닐 테니까. 서로 무엇을 욕망했든 간에 어쨌든 그것은 그저 ‘일어나버린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남자들에게 착한 일도 많이 했는데, 산타에게 선물 한 번 받은 적이 없다. 올해는 꼭 양말을 걸어두고 잘 테다.

박소현(섹스 칼럼니스트)

마지막 한 번만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미란다는 고환암으로 한쪽 고환(그래, 불알)을 잃은 스티브가 자신감을 잃자 동정심과 그를 아끼는 마음에 하룻밤을 같이 한다. 그 사실을 알아버린 사만다가 미란다에게 ‘불쌍해서 자준 거냐’며 따져 묻는 신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불쌍해서 함께 자준다는 개념이 가당키나 한지 의심스럽겠지만, 내 생각에는 많은 여자들이 그런 경험을 했을 것 같다. 강자와 약자 운운하는 얘기가 아니다. 남자에게는 연말 보너스 같지만, 여자에게는 상대적인 우월감을 안겨주는 행위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까 그 장면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났던 건 예전에 양다리를 걸치다 들켰던 일이 생각나서다. 서로의 책임 소재를 캐묻고, 험한 말이 오가면서 이젠 완전히 끝이구나 싶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네가 인간이긴 하냐며 미칠 듯이 날뛰던 그가 내 어깨를 잡으며 했던 말은 이랬다.

“마지막으로 한 번 하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그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그 썰렁한 상황에서 약간이라도 욕정을 느꼈다면 내가 미친 년이겠지만 왜인지 그 순간만은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죄책감도 한몫했다. 서로 몸을 섞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그 새털같이 많은 날들. 마지막 가는 길, 까짓것 한 번 못 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무릎을 다쳐 입원 중인 그와 몰래 병실을 빠져나와 모텔로 들어갔다. 마지막 섹스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는 아픈 다리를 끌고 열심히도 해댔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섹스가 끝난 뒤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합의했다. 서로의 몸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내가 베푼 자비의 대가로세금을 공제받을 수 있듯이, 그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나에게 한 번 기회가 더 온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걸로 됐다.

이민주(네일 아티스트)

남자는 자신이 욕망하는 사람을 욕망하지만, 여자는 자신을 욕망하는 사람을 욕망한다. 오로지 성욕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성욕의 에너지에 마음이 움직인다. 사랑 없는 섹스란 그런 순간 일어난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1

10여 년 전, 당시만 해도 착해 빠졌던 그녀가 그와 한 번 자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백 퍼센트 동정심 때문이었다. 백 번을 바라봐도 그는 전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내다운 카리스마는커녕 빈티가 줄줄 흘렀고 소처럼 껌뻑대는 눈에서는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가 ‘나같이 미천한 놈에게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절대 주어지지 않겠죠?’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차마 그 표정을 외면할 수 없어, 그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여자를 경험해봤을 것 같은 남자와 섹스하면서 ‘내가 섹시했을까? 잘 조였을까?’ 전전긍긍하는 건 싫었다. 대신 자신이 손만 내밀어줘도 감지덕지할 것 같은 이 남자에게 성은을 베푸는 것이 훨씬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막상 침대로 가면 갑자기 마초로 돌변하는 건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예상은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속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을 듯이 숨을 헐떡였다. 자신에게 이런 감개무량한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조심 가슴을 만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체온과 몸의 떨림만으로도 ‘얼마나 나와 하고 싶었을까’, 느껴질 정도로 그의 모든 욕망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흥분의 강도만큼 사정은 빨라서 삽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내 배 위에 오징어같이 축 늘어졌다. 그는 무척 쑥스러워했고 미안해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마치 마릴린 먼로라도 된 듯한 우쭐함에 빠졌다. 그녀는 기뻤다. 여자로서의 행복이란 그런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기에.

이연희(팍시러브 운영자)

착한 여자 콤플렉스 2

어릴 때부터 그랬다. 착한 성격은 아닌데도, 다른 사람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날도 그랬다. 그와 자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가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덮쳤왔을 때 도저히 그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손목을 붙들린 채로 모텔 앞까지 갔을 때도 그랬다. 내 손을 쥔 그의 손은 불처럼 뜨거웠다. 그래서 그냥 한 번 주고 말리라 마음을 먹었다. 어쩌면 의외의 수확, 드라마틱한 전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드라마틱이라는 단어는 현실에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에 생긴 단어라는 걸.

그는 끝까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심지어 삽입을 하고 피스톤 운동을 하는 순간조차도 그의 수줍음과 소심함이 느껴졌다. 나는 섹스하는 내내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모텔 천장 한쪽에 개머리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빗자국을 바라보며,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얕은 신음과 함께 페니스를 뺐다. 끝난 건가 싶을 때 또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작동했다. 나는 늘 그랬듯이 남자 등을 쓰다듬으며 격려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당장 샤워장으로 달려가 이 남자의 체취를 지워버리리라’는 다짐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그가 갑자기 또 가슴을 더듬으며 말했다. “나 아직 안 했어. 할 것 같아서 잠깐 뺀 거야.”

배 위에서 씩 웃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짜증을 넘어선 분노를 느꼈다. 왜 나는 이 남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난 너랑 하는 것 별로야.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무료 매춘 봉사대라도 되는 건가. 자기혐오의 감정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결국 그가 하자는 대로 다 했다. 싫은 내색은커녕 빨리 끝내야겠다는 조급함에 섹시한 신음소리까지 내면서. 거사가 끝난 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나 자신을 위로했다. ‘내가 너무 섹시한 탓이야. 똥 밟았다고 치자. 다시는 안 만나면 되지 뭐.’

박춘희(가명, 방송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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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기원
Photography 김지태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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