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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올림피아드

생각해보라. 나와 당신은 그런 사람들 아닌가. 적어도 싸구려 벽지를 오려다 붙인 것 같은 자주색 꽃무늬 냉장고, 은색 펄이 뿌려진 나비 문양 에어컨을 보고 `꼭 사야겠다` 다짐하는 그런 부류는 아니지 않은가.<br><br> [2008년 9월호]

UpdatedOn August 22, 2008

 

생각해보라.

나와 당신은 그런 사람들 아닌가.

적어도 싸구려 벽지를 오려다 붙인 것 같은 자주색 꽃무늬 냉장고, 은색 펄이 뿌려진 나비 문양 에어컨을 보고 ‘꼭 사야겠다’ 다짐하는 그런 부류는 아니지 않은가. 다리는 좀 부실하더라도 이케아의 플라스틱 의자 정도는 돼야 지갑을 열고, 연초가 되면 회사에서 나눠준 직원 수첩을 물리고 몰스킨 다이어리 하나 정도는 사주는, 비록 가질 수 없더라도 B&O의 거룩한 오디오에 눈먼… 그런 족속 아닌가. 그렇다면 베이징 올림픽이 시작된 요 며칠간 궁금한 게 여간 많지 않았을 거다. 일단 개막식 날, 177번째로 입장한 한국 대표 선수단. 벙벙한 흰색 재킷과 검은색 팬츠에 하늘색 셔츠를 입은 선수들을 바라보며 들었던 궁금증. 누가 디자인했을까. 디자인 의도는 뭘까. 저 유니폼으로 대한민국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려고 한 걸까. 자료를 뒤져봤다. 신문도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런데 없었다. 디자인에 대한 정보는.

궁금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올림픽 야구 대표팀의 유니폼도 그렇다. 좀 거슬리는 게 있다. 바로 엉덩이 중앙을 가로지는 파란 선. 물론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이 이와 비슷한 디자인을 지난 월드컵 배구에서 선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뭇 다른 건 그들의 선은 위로 한껏 올라붙은 빵빵한 엉덩이와 혼연일체를 이루었다는 거다.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이 유니폼 하의는 동양인 남자- 이대호처럼 엉덩이가 크든, 고영민처럼 빈약하든-에겐 치명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란 것 밖에는. 그 파란 선이 엉덩이를 타고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뭘 느껴야 하는 걸까. 혹시 디자이너는 그 선 안에 ‘건곤감리의 기상’이라도 숨겨 놓은 걸까. 그렇다면 설명을 해줘야 알 것 아닌가. 사실 탁구 대표팀의 상의에 얽히고설켜있던 6개 선도 이해 안 가긴 매한가지. 태극 문양을 응용한 건 알겠는데 왜 그렇게 갈래갈래 찢어놨을까.

상식적으로 국가 대표팀의 유니폼은 국가 이기주의가 극도로 드러나도 무방한 21세기 디자인의 청정 구역이다. 게다가 올림픽이라면, 투자 대비 효용성이 가장 높은 디자인 분야임도 틀림없다.

옛 어른들이 그러셨다. 모르면 물어가라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이렇게 중요한 디자인 객체를 앞에 두고, 전문가들(진정 능력있는)에게 좀 물어봤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남성복 디자이너 중에는 수트 라인을 누구보다 잘 뽑아내는 사람도 있고, 서양과 동양 복식의 미묘한 차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해낸 이도 있고, 컬러 선택의 감이 천재적인 자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한 조언을 꼭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국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구한다는 거다. 지안프랑코 페레가 디자인한 대한항공 유니폼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나는 비녀를 상징한다는 그 위협적인 머리핀과 뾰족한 머플러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재작년 국가 대표 축구팀 유니폼, 그 어설픈 V네크라인이 한복의 동정을 상징한다는 영국 디자이너 토마스 워커의 설명엔 쓴웃음 지었더랬다. 말해 뭐하랴. 보물 일호인 동대문 옆에 지어질 자하 하디드의 로보캅 같은 미래 성곽, 환유의 풍경까지야.

아, 좀 흥분했다. 지금도 TV에선 베이징 올림픽 하이라이트가 한창이다. 올림픽은 스포츠 뿐만이 아니라 디자인 페어플레이가 펼쳐지는 장이다. 그 중요성을 알아차린 중국이 수십조원을 건축물에 쏟아 붓고, 붉은색과 황금색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짓고(물론 이 디자인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저 국가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는 그만이었다), 시상식 도우미의 드레스를 그 어느 때보다 공들여 피팅했다는 건 티 내지 않아도 티 나는 거다. 이번 디자인 올림피아드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은 한자의 전서체를 바탕으로 한 경기 종목 픽토그램(Pictogram). 경기 종목을 블랙 선으로 상징한 이 픽토그램 안에서 우리는 ‘사람 인(人)’ ‘큰 대(大)’ ‘견줄 비(比)’ ‘물 수(水)’ 등의 한자를 뒤져낼 수 있다. 전 세계 문자 정보량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알파벳에 대항하고자 칼을 뽑아든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한자의 진군을 알리는 출사표를 올림픽에서 던졌다고 표현하면 오버일까. 자메이카에서도 스웨덴에서도 쿠바에서도 지난 몇 주간은 이 경기 종목 픽토그램을, 아니 중국의 상형문자를 익히게 됐을 것 아닌가. 이를 두고 유중하 교수는 네티즌의 의사소통 수단인 이모티콘, 소리 문자의 태생적 한계를 깨부순 이모티콘의 예를 들어 한자의 해외 정벌 전초전을 예고했다.

이 모든 논의는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시발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디자인 올림피아 아닌가. 이목이 집중된 시기에, 이목이 집중된 공간에, 이목이 집중될 만한 디자인 상징물을 수시로 노출시킨다는 것. 이야말로 효율적 디자인 마케팅의 극치 아닌가. 어차피 간 길인데, 어차피 비춰질 것인데, 어차피 입고 들고 신을 것인데, 디자인에 좀 더 신경을 써주면 좀 좋은가. 기왕에 같은 돈 쓸 건데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도 젊고 유능한 디자이너가 꽤 있다.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혼을 쏙 빼고 일할 자 널렸는데 왜 찾지 않을까. 그들이 지은 옷이라야, 그들이 빚은 장비라야, 그들이 택한 옷감과 색이어야 ‘국가 대표’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디자인 패권을 넘겨준 국가대표, 그건 생각만 해도 참 쓸쓸한, 아니 씁쓸한 일이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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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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