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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영화여, 부활하라

영화의 미덕은 상상력이다. 현실적인 드라마든 비현실적인 드라마든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을 대변하고 증폭시킨다. 그 상상력의 최첨단에 서 있는 영화는 단연 B급 영화다. 그런데 B급 영화가 사라지고 있다. 천만관객 시대에 위기를 맞은 한국 영화, B급 영화를 다시 돌아볼 때다.<br><br>[2006년 10월호]

UpdatedOn September 19, 2006

Words 김정대 Editor 김영진

나는 지금도 “어릴 때 TV에서 본 영화인데요, 줄거리는 가물가물한데 이런이런 내용과 이런이런 장면만은 생생히 기억납니다. 혹시 이 영화의 제목을 알 수 있을까요?”라는 식의 문의를 종종 받곤 한다. 아마도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질문을 지인들에게 던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질문의 대상이 되는 영화들은 대부분이 메이저 영화가 아닌 저예산 영화, 흔히 말하는 ‘B급 영화’라는 점이다. 그 영화들은 비록 <벤허>나 <타이타닉>과 같은 매머드급 상업영화만큼 유명세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어떤 요인들’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관객들의 뇌리 속에 강렬한 자취를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B급 영화만이 가지는 놀라운 영향력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다. 과연 이 영향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또 최근 들어 한국의 극장가에서 이런 영화를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B급 영화의 탄생 배경 및 변천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래 ‘B급 영화’라는 개념은 초창기 할리우드의 독특한 제작 및 배급 환경 속에서 탄생했다. 경제대공황기에 미국의 극장주들은 보다 많은 관객을 유인하기 위해 ‘동시상영’이라는 혁명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쉽게 말해 이것은 ‘한 편의 영화 값을 받고 두 편의 영화를 틀어주는’ 시스템이다. 두 편의 영화 중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고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는 ‘메인 영화’ 혹은 ‘A급 영화’라 불렸고, 다른 영화는 ‘B급 영화’라 불렸다. 말하자면 관객은 ‘A급 영화’를 보러 와서 싸구려 영화인 ‘B급 영화’를 보너스로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영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비, 출연 배우의 유명세, 장르 등에 따라 영화를 A급, B급으로 구분해 차별 관리하게 된다.
유니버설, RKO, 폭스 등 대부분의 메이저 영화사는 B급으로 분류된 영화만을 제작하는 팀을 따로 두었는데, 이들 ‘B급 영화팀’은 미국 프로야구의 마이너리그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 많은 신인 감독과 배우들이 ‘B급 영화팀’을 통해 데뷔식을 치렀으며 그중 눈부신 재능을 선보인 이는 메이저리그, 즉 ‘A급 영화팀’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B급 영화 팀원들은 박봉과 적은 제작비의 압박에 시달리긴 했지만, A급 영화팀에게는 없는 한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바로 간부들의 감시의 눈에서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영화사 간부들은 예외 없이 ‘주력 상품’인 A급 영화의 제작에는 살인적으로 간섭해댔지만, 애당초 흥행을 기대하는 상품이 아니었던 B급 영화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B급 영화 감독들은 무한대에 가까운 창작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흥행의 부담에서 원천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들은 다양한 장르적 실험을 통해 기막힌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이것이 바로 B급 영화가 가지는 영향력의 원동력이었다.
‘돈이 되는 방향’으로 양식과 구조가 정형화돼가던 A급 영화와는 달리,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B급 영화는 이전에 보지 못한 독특한 콘셉트와 비주얼로 관객들을 유혹했다. A급 영화에서 금기시되는 소재나 충격적인 장면들을 B급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B급 영화만을 즐기는 마니아가 늘어갔고, 급기야 AIP처럼 B급 영화만을 전문으로 만드는 영화사도 등장했다. 동시상영 시스템이 사라지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 B급 영화라는 개념은 ‘주류 상업영화와는 차별되는 특정한 부류(혹은 장르)의 저예산 영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영화들은 SF, 호러, 스릴러 장르인 경우가 많았으나(많은 영화광들은 아직도 ‘B급 영화’ 하면 SF-공포물을 떠올린다), 그 외에 장르의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로버트 알드리치나 래리 코헨 등은 지금까지도 영화광들의 절대적 추앙을 받고 있는 B급 영화 감독들이며,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조너선 드미 등은 B급 영화로 데뷔해 ‘빅리그’로 진출한 거장들의 대표적 예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사를 뒤져보면 로저 코만처럼 아예 B급 영화 제작에 평생을 바친 이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상의 탄생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 B급 영화의 힘은 바로 참신함과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험정신에 있다. B급 영화는 훌륭한 영화 인력의 등용문인 동시에 시장원리 때문에 부패·획일화되기 쉬운 영화산업을 질적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즉 B급 영화는 관객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본연의 역할 이외에 주류 영화에 끊임없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도 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B급 영화가 점점 설 곳을 잃어가고 있는 작금의 한국영화 시장은 실로 우려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전통적으로 한국 영화사에서는 미국 영화사에서처럼 B급 영화와 주류 영화가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에도 김기영이나 남기남처럼 B급 영화 감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는 분명히 존재했고, <대괴수 용가리>나 <비천괴수>와 같은 키치적 취향의 SF 영화들도 상당수 있었다. <목 없는 미녀>나 <월하의 공동묘지> 같은 고전 공포영화도 물론 B급 영화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넓게 보면 1980년대에 유행했던 저예산 에로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요컨대 한국의 B급 영화도 남부럽지 않은 전통과 성취도를 자랑해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21세기에 들어서는 ‘양질’의 B급 영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원인은 크게 제작 및 배급 시스템의 문제와 2차 판권시장의 열악함으로 나눠서 규명해볼 수 있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 시장은 외적 성장에 비해 내적으로는 갈수록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천만관객 시대를 열며 한국 상업영화의 성공 모델을 제시한 <실미도> 이후 한국 영화의 양극화와 질적 획일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몇 작품으로 확실한 돈 맛을 본 제작사들은 다양한 작품에 제작비를 분산투자하기보다는 대박이 확실해 보이는 한두 작품에 인적·물적 자원을 ‘올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시장성 없어 보이는 ‘참신한’ 각본은 아예 기획 단계에서 퇴짜를 맞기 일쑤며, 그나마 각본이 채택된다 해도 막상 제작에 돌입하면 제작비가 대폭 삭감되거나 턱없이 짧은 제작 스케줄을 부여받곤 한다. 제작자들의 입김이 갈수록 거세지는 것 또한 문제다. 전술했듯, ‘창작상 자유의 부여’는 B급 영화 제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B급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중 제작 과정에서 그런 ‘당연한 특권’을 누린 작품은 드물다. 현재 한국에서는 B급 영화의 제작 행태도 시장성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단 제작사들은 B급 영화의 ‘B’자만 들어도 대부분 아연실색한다. 적은 돈 들여서도 충분히 흥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있는데 왜 그런 ‘모험적’인 영화를 만드느냐는 식이다. 그나마 시장성이 보여서 채택된 저예산 영화라 해도 제작이 끝날 때까지 제작사의 살인적인 간섭에 시달려야 한다. 각본상, 혹은 연출상 시장성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보이면 제작자들은 즉각 시정을 요구한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시장성이 참신성과는 완전히 상극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은 시장에서 검증된 몇몇 ‘수익모델’과 유사한 콘셉트의 영화가 아니면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은 최근 몇 년 간 한국에서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저질 조폭물이나 공포물이 범람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갈수록 심화되는 스크린 독과점 현상이다. 어렵사리 완성된 B급 영화라도 수백 개의 상영관을 점령한 공룡 같은 영화들 때문에 간판도 내걸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가까스로 상영관을 잡는다고 해도 1~2주일 만에 조기종영되기 십상이다. 2차 판권시장에 이르면 상황은 거의 ‘절망 상태’로 접어든다. 미국에서 지금도 B급 영화가 활발히 제작되는 이유는 DVD, 비디오 같은 2차 판권시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장에서 흥행에 실패했다고 해도 DVD 등의 수입을 통해 충분히 ‘본전 이상’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판권 시장이 고사 상태에 이른 한국에서는 이것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즉 극장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는 그 자체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제작사들이 모험적인 저예산 영화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이성적인’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지구를 지켜라> 같은 걸작 B급 영화는 앞으로 더욱 구경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국 B급 영화 팬들은 정말 합동 고사라도 지내야 할 판이다. 잘 만든 국산 B급 영화는 갈수록 줄어들고, 외국의 우수 B급 영화들 역시 스크린 독과점 때문에 상영관에 걸릴 기회를 원천박탈당하고 있다. 한국 관객들은 <괴물>이 흥행 신기록을 수립했다고 해도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다. <괴물>은 사실상 B급 영화라는 소재적·스타일적 자양분이 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영화인데, 현재 상황대로라면 앞으로는 이런 영화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금의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스크린 독과점 규제 같은 정부 차원의 대책도 시급하지만, 마니아를 자청하는 이들의 의식 개혁도 절실하다. 정말 B급 영화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지갑을 열고 어렵사리 상영관을 잡은 ‘작은 영화’들에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시길. 당신이 사랑하는 B급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 파일로 감상하는 대신, 당당히 돈을 지불하고 DVD로 사서 보시길.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이 땅에서 양질의 B급 영화를 부활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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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김정대
Editor 김영진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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