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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욕망을 보다

한 주에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그 속에서 다종다양한 일을 체험한다. 군대에 가고, 결혼하며, 귀농도 한다. 우리가 선망하는 어떤 욕망을 담고서. 예능 프로그램은 시대의 욕망을 건드린다. 우리는 그 몸짓에 취한다.

UpdatedOn September 09, 2015

텔레비전, 특히 예능 프로그램들은 세상의 거울이다. 거울이 실상과 허상의 경계선을 의미하듯, 예능 역시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선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실제 나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반대다. 내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상은 왼손을 올린다. 텔레비전 속 예능이 비추는 세상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에 부족한 것, 필요한 것, 우리가 정말로 원하지만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예능은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능은 현실의 왼쪽을 오른쪽으로, 오른쪽을 왼쪽으로 비춰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 비추는 현실은 어떨까?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일밤-진짜 사나이>다. 군대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어떤 것들은 나름 긍정적이다. 방아쇠를 당기면 반드시 발사되어야 하는 무기들을 다루는 조직답게 신뢰성을 추구한다. 예외 없이 규칙에 맞춰서 생활하기, 어떤 상황에서든 명령을 수행하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군대는 낡은 부조리와 몰상식과 폭력이 그대로 혹은 더 심각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군에 입대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군대는 그저 참으면 윤 일병처럼 죽고, 못 참으면 임 병장처럼 터지는 무서운 곳이다. <진짜 사나이>는 군대라는 조직의 부조리는 가리고 원래 군대가 추구해야 하는 바람직한 모습, 신뢰성만을 보여준다. 출연자들이 생활하는 곳도, 먹는 음식도, 그들이 접하는 훈련도 모두 실제 군 경험자들 입장에선 가상현실이다.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이하 <슈퍼맨>)는 아빠의 육아 일기다. 이 예능이 비추는 현실은 아빠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매우 드문 현실 세상이다. 일단 아이의 절대 수가 줄었다. 한국의 출산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 게다가 아버지가 양육에 참여하는 일은 더욱 드물다. 가장이 집에서 아이를 볼 수 있으려면 육아휴직이 가능한 직장에 다니거나 아예 백수여야 할 텐데, 전자는 결코 한국의 대다수와 거리가 멀고 후자는 아이를 낳기 어려운 여건이다. 심지어 출연자인 여유 있는 아빠들조차 방송 출연료와 (예측하는) CF 출연료가 아니라면 육아에 참여하지 않았을 테니 진정 현실의 정반대를 보여주는 거울상이라 하겠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슈퍼맨>의 프리퀄 격이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 남자가 결혼하는 나이는 만으로 평균 32.8세, 여자는 30.7세다. 그나마 그쯤에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45세까지 결혼 못하는 남자의 비율이 24%가 될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다른 모든 진입 장벽이 높아지면서 결혼 자체의 장벽도 높아진 거다. 2015년 현재 평균 결혼 비용이 2억1천만원이라는데, 과연 요즘 세상에 결혼이 그만한 비용을 치를 가치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들에게 <우리 결혼했어요>는 결혼의 골치 아픈 현실은 모두 삭제한 순수 판타지를 제공한다. 여기의 결혼은 직장 생활도 없고 시집살이도 없고, 혼수 따위로 벌어지는 저속한 갈등도 없으며, 육아도 없는 진정한 허상이니까.

같은 식으로 <삼시세끼>는 귀농 생활의 낭만적이고 좋은 면만을 보여준다. 거기엔 텃세를 부리는 이웃도 없고, 경제적인 압박도 없고, 1년 내내 계속해야 하는 농사의 고단함도 없고, 매달 치러야 하는 임대료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하루나 이틀 동안 ‘시골별장’에 들러 그동안 누군가 키워놓은 곡식을 수확해 세끼를 해먹으면 된다. 이 예능은 삼시세끼를 때우는 데 하루가 다 간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미묘한 건 <냉장고를 부탁해>나 <집밥 백선생>을 필두로 한 요리 예능 프로그램들이다. 냉장고에 따라, 조리사에 따라 프로의 성격 자체가 바뀌는 <냉장고를 부탁해>는 그렇다 치자. 진짜는 백종원이 이끄는 프로그램들이다. 그의 <집밥 백선생>은 사실 <식당밥 백선생>이라 해야 옳다. 거기서 알려주는 레시피들은 집밥이 아니라 대중식당 요리에 걸맞은 조합이니까.

어쨌거나 이 계열의 신종 요리 예능들은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자기효능감’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건 현재 이 프로그램의 주요 소비자들이 요리 불능 아저씨들이 아니라 진짜 주부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예능은 결국 ‘식당밥화’하는 우리 집밥의 실태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다. 마른 멸치로 국물을 내고 진짜 다시마로 맛을 내는 ‘진짜’ 조리 방식은 현재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고 (더 이상 한국 가족 시스템이 아닌) 대가족을 먹일 때나 의미 있다. 결국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최선의 방법을 찾다 보니 백종원의 레시피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거다. 자그마치 ‘만능간장’이라니! ‘만병통치약’ 같은 매력적인 아이템 아닌가!

그러니까 이들 프로그램의 인기는 나가서 사 먹자니 비싸거나 혼자 먹어야 해서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그렇다고 시켜 먹는 요리에는 물려버린, 그래서 값싸고도 그럴듯하게 집에서 한 끼를 때우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준다. 문제는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은 그 자체가 판타지라는 점이다. 결국 이런 추세는 ‘집에서 해 먹는 게 제일 몸에 좋다’는 상식이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건지도 모른다. 예능 프로그램은 우리 욕망을 건드리며 흥망성쇠를 이어간다. 결혼부터 집밥까지, 건드릴 것투성이인 인생이다.


장근영의 타심통
장근영은 심리학자다. 하지만 딱딱한 심리학자가 아니다. 게임 <리니지>를 소재로 심리학 논문을 발표하고, 영화를 보고 심리학 칼럼을 쓴다. 대중문화와 사회현상을 심리학이라는 큰 바탕 속에서 유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매달 바라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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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장근영(심리학자)
Editor 김종훈

201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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