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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운명

정확하게 15년 전이다. 추레한 국철을 타고 시청 앞에 내려 종로서적 5층 소설 코너에 처박혀 한나절을 보내고 나면 속이 참 헛헛했다.

UpdatedOn December 07, 2005

Black Collar Workers!

<아레나>의 독자를 블랙칼라 워커라고 칭한다. 외모와 내면 모두를 스타일리시하게 가꾸는 데 관심이 있는 남성을 말함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젊은 남성은 이미 화이트도 블루도 아닌 블랙칼라 워커라고 해야겠다. 이 책을 읽고 있다면, 당신 역시 블랙칼라 워커임이 확실하다.

(부끄러운 이 사진은 지난 11월, 광고주 대상 <아레나> 프레젠테이션에서의 제 모습입니다. 참석해주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너는 내 운명

정확하게 15년 전이다. 추레한 국철을 타고 시청 앞에 내려 종로서적 5층 소설 코너에 처박혀 한나절을 보내고 나면 속이 참 헛헛했다. ‘…라면이나 먹을까’ 하여 느릿한 걸음으로 광화문 사거리를 스쳐 정동길로 접어든다. 구멍가게를 끼고 다닥다닥 붙은 붉은 벽돌집 사이로 소심한 서체로 쓰여진 ‘그림’이라는 나무판자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의수족을 판매하는 1층을 지나, 헬레나강 아줌마가 원장이던 2층 미용실을 지나,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돌아 오르면 그제서야 햇빛 한 사발과 파란 플라스틱 벤자민 화분으로 둘러싸인 슬레이트 지붕의 화실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서둘러 라면 한 그릇 해치우고 키스 재릿의 ‘마이송’ 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참으로 무모하게 보낸 대학 4학년의 봄이었다. 전철로 세 정거장, 그곳에 의당 내가 가야 할 학교가 버티고 있는데, 2호선을 갈아타는 대신 시청 앞 광화문 일대를 배회했다. 데자부 현상을 경험하듯 늘 몽롱한 기운에 취해 미로처럼 휘어진 골목과 골목 사이를 돌고 또 돌고. 취업을 앞둔 학생의 불안감이라고 하기엔 그 감정의 타래는 너무 ‘흐느적’ 맥 풀린 것이었다. 한 가지 정확한 건 그 시절의 나는 신문로라는 서울의 정점에서 ‘내 운명’을 찾고 있었다는 거다. 예감에, 반드시, 그곳에 그놈이 있을 거라는 무모한 확신을 갖고 말이다.

하지만, 난 운이 참 좋은 편이어서 광화문 순례 6개월 끝에 그 운명의 놈을 만나게 되었다. 과정은 매우 심플하다. 여느 때처럼 화실을 나와 덕수궁 방향으로 가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경향신문> 게시판 귀퉁이에 박힌 ‘잡지 기자 모집’이라는 여섯 글자를. 핀라이트 조명을 받고 화려하게 빛나던 명조체의 글자. 그렇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던 이기적 인간형인 나에게 하늘은 억세게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준 것이다. 나는 얼마 후 기자가 되었고, 꺼끌꺼끌한 누런 색깔의 원고지 한 뭉치(PC 보급은 한참 후의 일이었으므로)를 받았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잡지쟁이로서 축복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첫 취재에서 지금의 신랑을 만났고, <아레나>에서는 복에 겨운 후배 기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다. 첫 취재원을 마주하고 녹음기의 붉은 버튼을 누르는 순간(그 또한 내 운명이었으니…) 진땀이 나더니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다. 그렇다. 또 한 번 <아레나>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이다. 한데 이놈 참, 만만치가 않다. 영국에서 우리나라로 모셔오기까지 내 맘을 그토록 애타게 하더니만 하루하루 한 이불을 덮고 살아보니 이거야말로, 산 너머 산이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세련된 데다, 뇌 속까지 지식이 꽉 들어차 있으니 애정으로 보살피는 나의 허리는 휠 지경이다. 하지만 어디 내놔도 빛이 나는 그놈을  마주하고 있으면 ‘심히 보기에 좋더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서점에 내놓는 순간 이놈을 한눈에 낚아채 갈 훌륭한 독자를 상상하노라면 비실비실 웃음도 새어나온다.

사실, 피처와 패션 기자를 돌고 돌아 편집장이라는 명함을 갖게 된 몇 해 전부터 머릿속을 지겹게 기어 다니던 화두는 한 가지였다. 또 다른 색깔의 남성지를 만나야겠다는. 이 땅의 남성이 형형색색의 모습을 띠고 변화해가는 동안, 그들에게 맞는 잡지는 만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잘난 데다 잘 꾸미고 스마트하기까지 한 젊은 남성의 취향에 꼭 맞는 애인 같은 남성지를 찾아내는 일이 녹녹지만은 않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운명의 상대를 좀 늦게 만난 감이 없지는 않지만, 대신 매우 뜨겁게 사랑하겠다. 늦바람이 무섭다지 않던가?

P.S

믿고 있다. 이곳에 모인 편집부 기자들은 모두 잡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인간이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전의 잡지에서 받아온 데스크의 충실한 사랑을 훌훌 털고 옮겨오기가, 또 다른 분야에서 쌓아온 빛나는 경력을 다 버리고 백의종군하기가, 자신의 인생 괘도를 수정해가며 합류하기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창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짐을 함께 지기를 자청한 기자들, 남성 패션지라는 새로운 숙제를 함께 풀어가기로 다짐한 기자들, 참 용감하고 든든하고 고맙다. 또한 지난 15년간 잡지 편집을 안주 삼아 나와 함께 술을 마셔준 아트 디렉터 김형도 선배님께도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앞으로도 계속 <아레나>를 안주 삼아 심심찮은 술자리를 함께할 수 있을 테니 그 또한 감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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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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