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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지 않는 브랜드의 정체성이 세기를 뛰어넘어서도 소비자 군단을 브랜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경쟁력이라 믿는다. <br><Br> [2008년 2월호]

UpdatedOn January 23, 2008

봄의 옷섶을 뚫고 나온 난해한 영어 단어들. 퓨처리즘, 럭셔리 엘리건트, 빈티지 클래식, 뉴 마린, 애시드 컬러, 레트로 무드…
또 한 번 ‘계절’의 스테이지 위로 허리를 곧추세운 해외파 용병들이 ‘트렌드’라는 거죽을 쓰고 고양이 걸음으로 행진한다. 조리개를 열고 시위를 당긴 눈동자들은 <매트릭스>의 스미스 군단을 떠올리며 이내 나른한 하품을 날린다. 아, 봄이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그저 그런 나른한 봄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패션계의 계절별 ‘트렌드 사전’은 매해 뜻은 같으나 조사만 살짝 뒤튼 문장처럼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남성 패션은 더하다. 소재나 실루엣의 변화가 여성복에 비해 크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생각해 보라. 농염한 시폰 소재의 로미오 스타일 블라우스, 몸의 굴곡을 따라 숨구멍 하나 없이 밀착된 인어공주 라인을 트렌드로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뭐, 이런 디자이너가 가뭄에 콩 나듯 있긴 하다. 장 폴 고티에나 존 갈리아노, 비비안 웨스트우드 삼남매 정도?- 그렇다고 스커트와 드레스로 변화의 물꼬를 틀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수트라는 완벽에 가까운 유니폼이 준비되어 있으니 작은 변화의 폭은 오히려 남성 패션의 본질을 지키는 정체성이라 하겠다. 조선시대 이후 서양 복식을 거죽으로 차용한 우리 역시 이 수트의 위엄에 눌려 산다. 세기를 넘어 더욱 더 탄탄해진 수트의 진열 정비로 남성복은 여성복에 비해 클래식 패션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고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우리는 눈이 번쩍 뜨일 역발상의 패션 이슈가 없다는 이유로 새 계절이 도래할 때마다 ‘패션의 쳇바퀴’란 자조 섞인 평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패션의 쳇바퀴가 좋다. 아니 당연한 일이라 여긴다. 변화무쌍한 패션이란 소비자가 가질 수 없는 모호한 신기루일 뿐이다. 오히려 변화하지 않는 브랜드의 정체성이 세기를 뛰어넘어서도 소비자 군단을 브랜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경쟁력이라 믿는다. 패션계의 성공 키워드는 일종의 정통성 고수에 있다. 일시적인 붐을 노린 팔랑거리는 변화의 완장은 단거리 전력 질주용이다. 시간을 두고 브랜드마다 정체성이 지층처럼 켜켜이, 공고히 쌓이도록 해야 한다. 그게 소비자에게서 역으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해법이다. 안타까운 건 바로 이 부분이다. 많은 국내 브랜드들이 캣워크를 장식하는 글로벌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기초로 잦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각각의 정체성을 포장법만 살짝 바꿔 보여주는 데, 우리는 그 화려한 외양에 속아 그걸 살짝 잊게 되는 모양이다. 사실 전 세계 패션 기자들은 크리스찬 디올의 디자이너가 에디 슬리먼에서 크리스 반 아쉐로 바뀐다 해도 지각을 뒤엎을 만한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수십 년의 전통을 이어온 그 브랜드는 크리스찬 디올이 아니라 크리스찬 아쉐로 변질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피를 얼마나 잘 이어받았는지, 그 아들은 그래서 그 가문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뿐이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국내 브랜드들이 글로벌 브랜드의 마케팅을 본보기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톡톡 튀는 단기 마케팅보다는 우직하게 한 길을 가는 ‘정체성 마케팅’ 역시 두루 살피기를 바란다.   
소비자들에게 브랜드를 선별할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 것만이 21세기 패션 활성화의 해답이다. 아직도 수많은 소비자들은 국내 동종 브랜드 간의 차이를 깨닫지 못 한다. 가격만 맞으면 이 브랜드든 저 브랜드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레나>는 독자들이 패션에 대한 잡다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내 브랜드 변별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데 시간을 온전히 바치고 있다. 하지만 <아레나> 역시도 가끔은 국내 패션 브랜드들의 정체성에 혼동을 느낀다. 브랜드의 생존 주기는 짧아지고, 브랜드별 단기 변화의 폭은 커졌다. 채 인지하기도 전에 변화하고, 채 인지하기 전에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혜안을 가진 대변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을 텐데. 우리에게 브랜드의 심지를, 그 밑바닥에 흐르는 정신을 알려 달라. 아주 꾸준히. 그렇게만 해준다면 한국인의 뚝심으로 ‘made in Korea’라는 명찰을 단 우리네 브랜드의 소식을 전하는 파발마가 되어 달리겠다. 
2008년의 출발선에 서서 다시 한 번 <아레나>가 약속한다.
“<아레나>가 돕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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